신치토세 공항에는 2시간 2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충분히 일찍 왔음에도 카운터가 오전 9시 30분에 열린다고 쓰여 있어서 짐을 부칠 수 없었다. 카운터 오픈이 20분이나 남았는데도 사람들이 이미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셀프체크인 기계로 체크인 한 뒤 티켓을 들고 줄을 섰다. 삿포로로 올 때는 온라인으로 체크인하고 인천공항에서 셀프로 짐을 부쳐서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서 한국의 편리함이 새삼 느껴질 때가 있다.
15분쯤 서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프고 덥기 시작했다. 아침에 추울 것 같아 가장 두툼한 옷을 입었는데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미 내가 선 줄을 벗어나는 게 싫었지만 갈아입을 옷이 캐리어 안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줄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갔다. 누군가가 긴 줄을 빠져나오면 사람들은 즉시 앞으로 당겨 그 틈을 메꾼다. 마치 처음부터 그 사람은 줄에 없었던 것처럼.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체크인이 시작되었고, 줄은 더 길어졌다. 그리고 10분, 20분을 더 기다리는데 줄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문득 작년 봄, 서울숲 주차장으로 가는 길이 떠올랐다.
햇살 좋은 어느 날, 서울숲에 가기로 했다. 나는 운전하는 걸 좋아해서 조금 막히더라도 차를 가져가는 걸 선호한다. 차는 막히지 않았지만 서울숲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까지 차가 길게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한 3~400m쯤 남았을 때부터 기다렸는데 도무지 줄이 줄어들 것 같지 않았다. 차가 한 대씩 들어가는지 한참을 기다리면 차 한 대의 길이만큼 폭이 생겨 거리가 줄어들었다. 어떤 차들은 10분, 20분 기다리다가 그 대열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들이 다른 주차장을 찾았는지, 집으로 돌아갔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기다리는 나로서는 그들의 이탈이 반가웠다. 그리고 ‘오래 기다렸는데 그냥 기다리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차들은 대략 10분에 한 대씩 있었는데, 어떤 차는 나와 함께 거의 1시간을 기다렸는데도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인내심이 없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나의 재평가는 그로부터 30분이 지나 주차장 입구에서만 1시간 반을 기다린 끝에 겨우 들어오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그들은 현명했다. 빨리 이탈했을수록 더.
내 캐리어를 내려다보았다. 기내 반입 가능 캐리어였다. 다른 사람들의 캐리어도 보았다. 부칠 수밖에 없는 큰 사이즈의 캐리어들도 있었지만, 나처럼 기내 반입용 캐리어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무겁고 귀찮고 많이 기다렸는데...’
라고 생각하다가 그날 서울숲에서의 다짐이 떠올랐다. ‘이 전에 얼마나 시간을 썼든 간에 앞으로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기내에 반입할 수 없는 물건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600ml통에 든 거의 다 쓴 바디로션이 떠올랐다. 그 외에는 없었다. 없는데 왜 나는 거기에 있었는지. 곧바로 줄에서 나와 적당히 떨어진 곳 의자에 앉아 캐리어를 열고 바디로션을 꺼냈다. 그리고 100ml이하의 화장품들은 하나의 비닐 지퍼백에 모아서 넣었다. 바디로션을 버리고 짐을 부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바로 출국심사를 받으러 갔다. 가방은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되었다.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건강 상태 체크를 하는 종이를 주었는데 펜이 없어서 그냥 못 쓰고 나왔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열 체크를 하는 포인트에 다다르자 40대에서 5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 직원이 모바일로 건강 상태 체크를 할 수 있다는 안내를 해 주어서 그 자리에서 QR코드를 찍어서 입력하기 시작했다. 아주 넓은 공간이었고 내가 누구의 길을 막지도, 답답해하지도 않고 묵묵히 절차대로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직원은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 나를 보며 답답했는지 승무원이 내게 준 노란색 종이를 건네며 ‘쓰는 방법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그때 한국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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