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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껌 Oct 10. 2023

12)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건물에 비를 피해 잠시 섰다. 그놈의 우산. 왜 항상 챙길 때는 비가 안 오고 안 챙길 때는 비가 오는 거냔 말이다. 숨을 크게 한 번 내쉬고 니혼다이라 유메테라스까지 200m 정도를 비를 맞으며 달려 올라갔다.      


 비에 젖은 채 입구로 들어가자 인이어를 끼고 있는 여직원이 내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일본어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아메(비)’라는 단어를 유일하게 알아들었으므로 아마도 ‘비가 많이 오네요’와 같은 내용이었을 것이다.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영어로 화장실을 묻자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다.      


 니혼다이라 유메테라스(日本平 夢Terrace)는 3층짜리 원형 건물로 1층에는 간단한 전시가 있고 2층에선 차를 판매하며 3층이 전망대이다. 일본의 유명 건축가가 디자인한 목조건물로 가운데가 뚫려있어 위층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볼 수 있고 통창이라 내부에서 바깥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내가 시즈오카에서 꼭 오고 싶었던 곳 중 하나였다.      


 2층으로 올라가서 밖을 보니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안개로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비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꿈(夢)인 줄 알았는데 다시 현실이구나. 그 시간에 전망할 수 없는 전망대를 찾은 사람들은 차를 마시며 대화하던 일본 여자 둘, 어떤 부부와 아들 한 명,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산을 챙겼어야 해. 아니, 아침에 왔었어야 해.’   

  

 화가 났다. 후지산이 보이지 않아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잘못된 판단을 내린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우산을 챙기는 것과 아침에 간다는 결정은 사실 인생에서 내가 내리지 않은 수많은 결정들의 투영이었다. ‘이렇게 했다면 나았을 거야’라는 의미 없는 자책.      


 3층의 야외 테라스로 나가는 입구에도 직원이 있었다. 직원을 보고 나는 어색한 쓴웃음을 지으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짙게 낀 안개로 완전히 가려진 밖을 보며 허탈하게 실내로 다시 들어와 계단을 내려가려 하자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타길 권했다.     


 “아, 저 아직 안 나가요. 다음 버스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거든요.” 

 번역기를 사용하여 직원에게 설명하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저... 혹시 우산을 빌릴 수 있나요?” (다음 날 오전에 다시 올까 고민 중이었다.)

 안경을 쓴 온화한 인상의 여직원은 잘 모르겠다며 인이어로 다른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1층의 그 직원이 엘리베이터로 올라와서 우산 대여는 없고 2층에서 판매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가려 하자 1층의 직원이 엘리베이터를 권했다. 그제야 나는 계단은 올라가는 사람만 이용하고, 내려가는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탄다는 걸 알았다.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냥 계단으로 가게 허용해 주었다.      


 비닐우산은 다행히 300엔(3000원 정도)밖에 하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게 샀다. 우산은 해결해서 걱정 하나가 덜어졌다. 우산을 쓰고 야외로 나갔다가 테라스의 3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따라 올라가 테라스를 쭉 둘러보았다. 넓은 나무 테라스의 유리 난간에는 각각의 방향에 있는 명소들이 적혀있었다. 테라스를 따라 얼마간 걸으니 유리에 화살표와 함께 한자로 ‘富士山(후지산)’이라고 적혀있었다. 후지산이 보여야 하는 자리는 짙은 안개가 가려 흔적조차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3층의 직원과 눈이 마주쳤는데 나의 실망감을 읽은 것 같았다. 얼마지 않아 그 직원은 따뜻하게 웃으며 판에 붙어있는 후지산의 사진을 가져왔다. 멀리 바다 뒤로 후지산의 정상에 눈이 쌓여있는 모습이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후지산이 보이지 않는 날에 나같이 실망한 방문객들을 위해 보여주는 사진인 것 같았다.     


 “저, 혹시 아침에 후지산을 볼 수 있었나요?”

 나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직원이 일본어로 답을 했는데 번역기의 속도가 느리다고 느껴졌다.

 “아뇨. 오늘 아침에도 이랬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못된 결정이 아니었어’하는.

 “아침에 날이 맑았잖아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 왔었어야 했다고 자책하고 있었어요.”

 “산의 날씨는 달라요. 오늘뿐 아니라 어제도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그저께는 좀 보였지만.”

 전날, 그 전날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빠르게 복기해 보았다. 오후까지는 시즈오카에서 약 90km 떨어진 맑은 날씨의 슈젠지에서 있었고, 오후 3-4시경 이즈에서 시즈오카로 오는 배에 있었는데 날이 몹시 흐려 거기에서도 후지산을 볼 수 없었다. 그 전날은 덥다 못해 뜨거운 날 야마나카호수 주변에서 있었다. 결국 유메테라스에서 후지산을 볼 수 있었던 때에 나는 시즈오카에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결론을 내리고 나서야 나는 완전히 안도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어차피 결과를 바꿀 수 없었을 결정들에 대해 후회하며 살고 있는가.      


 “저, 혹시 이 사진을 사진 찍어도 될까요?”

 직원은 흔쾌히 허락했다. 

 “아, 잠깐만요. 좋은 생각이 있어요.”

 나는 사진을 들고 후지산 방향의 테라스로 향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따라온 직원은 내가 무슨 생각인지 이해한 듯 내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하이 치-즈’라는 말 대신 ‘기무치-’라는 말을 한 뒤 안개 속에서 후지산 사진을 들고 있는 내 사진을 찍어주었다.      

 


 “마음이 나아졌어요. 감사합니다.”

 “2월에는 후지산이 잘 보여요.”

 “제가 다시 오면 그때도 여기에 계시는 거죠?” 

 번역기에는 그녀가 한 일본어와 함께 한국어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고 쓰여있었다.      


 버스 시간이 되어 나를 도운 두 명의 직원에게 각각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새로 산 빨간색 투명 우산을 쓰고 버스정류장으로 내려왔다.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어.’

 아무도 없는 산길의 비 내리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원래는 쓰지 않으려 했던 시즈오카 여행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날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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