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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껌 Oct 16. 2023

13) 후지산에 가 본 한국인, 안 가 본 일본인

 “Is this bus going to the airport?”

 내 영어 질문을 받은 일본 남학생은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거 아녜요. 공항 가는 버스는 2시 40분일 걸요?”

 공항 가는 버스정류장 바로 옆 의자에 앉아있는 여자가 대뜸 한국어로 대신 답을 해 주었다. 내 질문을 받은 남학생은 꾸벅 인사하며 죄송하다고 했다. 미안할 필요 없는 일을 미안하게 만들어서 내가 미안했다. 

 “감사합니다.” 

 답을 해 준 여자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한 후 그녀의 뒤에 앉았다. 6박 7일의 여행을 마치고 피곤에 절어있던 나와는 다르게 풀메이크업에 단정한 옷을 입은 그녀는 더위에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공항 출국 수속은 입국 수속보다 빨랐다. 시즈오카공항이 워낙 작다 보니 내가 타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만이 공항 승객의 전부였다. 공항 편의점의 매대 반이 비어있을 정도로 물건을 많이 받는 것 같지도, 물건이 많이 나가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것 외에 할 일이 없는 와중에 시즈오카로 오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는지 우리가 탈 비행기도 30분 지연되었다.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서 녹차 도넛과 샌드위치를 사서 먹었다.      


 탑승 대기 줄이 많이 줄었을 즈음 나도 줄을 섰다. 내 좌석은 10A로 전날 밤에 미리 골라둔 창가 자리였다.

 “어?”

 복도 쪽에 앉은 사람에게 ‘안쪽으로 들어가야 하니 잠시 비켜달라’는 말을 하려고 보니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도와준 그 여자였다.     

 

 “혼자 여행하신 거예요?”

 “네. 혼자 여행하셨어요?”

 그녀는 지긋이 웃으며 답했다. 

 “아, 저 일본사람이에요.”


 나는 마치 일본 예능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충격을 받으면 ‘에에?’하며 놀라는 투로 ‘네?’와 ‘정말요?’를 수차례 물어보았다.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한국 사람 같은 발음이었다. 얼마간 대화를 해도 단어 선택이나 문법 같은 부분에서 일본인인 걸 알고 들어도 한국 사람이 말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한국어가 매우 유창했다. 나는 이 인지 부조화를 깨야 했다. 

 “아까 정류장에서 약간 대구 사투리 쓰는 것 같아서 전혀 의심도 안 했네요.”

 “아, 제 친구가 대구사람이에요.” 

 한국에 살아본 적은 없고 한국 방문만 10번 정도 할 정도로 한국 문화에 푹 빠진 그녀는 한국어를 2년간 독학했으며, 이번 방문 목적은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일을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한국에 워킹홀리데이가 있어요?” 

 “네. 있어요.” 

 임상병리학 전공을 했다는 그녀는 성형외과 같은 곳에 취업을 해서 궁극적으로는 한국에 쭉 머무르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말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신청과 관련해서 2주 전에 이미 한국에 방문했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비자로 입국하게 되어 몹시 들뜨고 설렌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어디에 사는 거예요?”

 “미시마예요.” 

 내가 후지산의 야마나카호수에서 내려와 숙박만 하루 했던 그 미시마였다. 관광이라도 했으면 뭐라도 얘기할 텐데 딱히 꺼낼 말이 없었다. 

 “그러면 후지산 자주 가봤겠네요. 가깝잖아요.”

 “한 번도 안 가봤어요.”

 2차 충격이었다. 후지산 바로 앞에 사는데 후지산을 안 가봤다고? 

 “집에서 보여요. 그리고 후지산은 너무 힘들어요.” 

 “산을 올라간 적이 없다는 거죠? 그래도 근처에 호수라도 안 가봤어요? 가와구치코 같은...”

 “호수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이랑 갔었는데 기억은 없어요. 이름도 기억이 안 나요”

 가까이에 있으면 가지 않아도 간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안 가게 되는 그게 뭔지 알 것도 같았다.      


 “저는 가봤어요. 예전에 실제로 올라가기도 해 보고, 이번에는 그냥 그 아래 호수만 갔어요. 불꽃놀이 보려고요.”

 내가 한국에 워킹홀리데이가 있는지 몰랐던 것처럼 후지산에 가본 적 없는 그녀 또한 후지산에서 불꽃놀이축제가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살면서 먹어본 적 없는 닭발을 좋아했으며, 내가 지나간 적만 있는 하남이 신도시라 깨끗해서 진지하게 거기에서 살 것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가장 놀랐던 것은 그녀가 본 한국 드라마 리스트였는데, MBTI가 J라는 그녀는 핸드폰 메모장에 자신이 본 한국 드라마를 연도별로 쭉 정리해 두었고 각 드라마 별로 별점을 매겨두었다. 지난 5년간 한국에서 방영한 드라마 모두가 적혀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았고, 내가 본 적 없을뿐더러 들어본 적도 없는 제목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즈오카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오는 두 시간 동안 우리는 한국과 일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하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대화했다. 공항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비행기가 착륙을 시도하다가 다시 올라가는 ‘고어라운드’를 했는데 내가 경험한 건 처음이었다. 얼마간 하늘을 돌던 비행기는 다시 착륙 시도를 했고, 우리는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의 안전벨트 사인이 꺼지자마자 거의 모두가 일어났다. 복도 쪽에 앉았던 그녀가 나의 빨간색 장우산을 꺼내어 건네주었다. 문이 열릴 때까지 대기하던 중에 우리의 뒷좌석에 앉았던 60대로 보이는 부부가 대뜸 ‘무섭지 않았어요?’라고 말을 걸었다. 고어라운드를 할 때 기름 냄새가 났다는 것이었다. 진짜로 냄새가 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안전 걱정을 하며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나 또한 고어라운드 시에 걱정 하나를 하긴 했다.

 ‘비행기도 지연됐고, 착륙도 지연되면 배고픈데 밥 먹는 시간 늦어지겠네.’ 

 내가 여전히 현실 도피 중인지, 지극히 현실적인 건지 헷갈렸다. 각자의 걱정이 다른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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