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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wover Dec 12. 2019

오랜만에 해봄_세라믹

만지작 공방이 생기면 어떨까?

흙을 만질 때면

10년 전쯤 미국 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 학기 동안 세라믹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물레를 돌려가며 만들고 싶은 그릇들을 만들었었는데 내 그릇들은 대부분 도둑맞아 마지막까지 구워서 완성한 건 집에 있는 요상한 모양의 찻잔 하나가 끝이다.


완성된 작품은 비록 하나지만 기억에 남는 건 하나 더 있다. 만지작만지작 거리던 흙의 감촉. 물레를 발로 밟아가며 원기둥을 올렸다가 다시 무너트렸다가, 화병을 만들 듯 높게 호리병을 올렸다가 무너트렸다가. 그렇게 한참을 만지면 흙이 말라 뻑뻑해진다. 그럴 때 스펀지에 물을 적셔 흙에 발라주면 다시 보들보들하게 돌아온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고 나면 그 흙으로는 더 이상 그릇을 만들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의 나는 그릇을 만드는 것보다 흙을 만지작 거리는 데에 온 신경이 가있었던 것 같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목적도 없이 그냥 흙을 이리저리 만지며 만지는대로 이렇게 저렇게 모양을 바꾸는 흙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게 좋았다. 실크스크린, 금속 공예 같은 수업도 들었었는데 어느 것도 세라믹처럼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13년 만에 다시 도전해본 도예는 석고틀을 가지고 접시를 만드는 방식이었다. 코일링(돌돌 흙을 말아 쌓아 올리고 손으로 틈을 매우는 방법)이나 물레질을 통해 만드는 것보다는 흙과의 접촉(?)이 적은 방식이었지만, 오랜만에 흙을 만지니 전에 왜 한 학기 내내 만들라는 그릇은 안 만들고 흙만 만지작 거렸었는지가 떠올랐다.



스마일:)

지금은 개인 전시와 작품 활동으로 바빠서 원데이 클래스를 안 하시는 작가님이었지만 어찌어찌 지인 찬스로 수업을 덜컥 잡았다. 솔방울 느낌이 나는 울퉁불퉁 뾰족뾰족한 장식과 찢어진 그릇이 특징인 권은영 작가님 작품을 눈앞에 두고 기를 받으며 만들어봤지만 현실은 스마일 하나 새겨 넣는 것도 쉽지 않았다. '행복하자'라고 쓰려던 그릇의 뒷면에는 현실과 타협하고 받침을 조금 줄여 '해피하자'라고 썼고, 앞면에는 자그마한 스마일을 하나 박았다. 3~4주 뒤에 완성된 접시가 집으로 날아올 텐데 제발 깨지지 마렴:)



만지작 공방

손으로 무언가를 주무르는 게 스트레스 완화에 좋다는 연구와 실제 사례들은 넘쳐흐른다. 90년대에 유행했던 만득이도, 얼마 전까지 난리였던 액체 괴물도 같은 맥락이다. 전에 심리상담사에게 모래를 이용한 놀이치료를 받아본 적이 있다. 일단 다양한 감촉의 모래가 담겨있는 모래판 속의 모래를 하나하나 만져보다가 맘이 끌리는 모래판을 고른다. 그리고 그 위에 다양한 장난감과 피규어들을 가지고 모래장난을 하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보고 심리상태를 파악하는 방법이었다. 이렇듯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고 감촉을 느끼는 것은 심리적인 부분과 꽤나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그래서 떠오른 건데, 만지작 공방을 만들면 어떨까?


머리가 복잡한 날 불쑥 찾아가 흙을 만질 수 있는 공방. 그럴듯한 작품 하나를 만들어 집에 가져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정말 흙을 만지작 거리는 게 목적인 공방. 일이 안 풀려서 스트레스받는 사람, 가족과 싸우고 덜컥 문 열고 나와버린 사람, 뭐가 문제인지 눈에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자꾸 눈물 나는 사람,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 누구나 찾아가서 시간 되는대로 흙을 만지작 거리다가 '1시간 15분 만지작 비용’ 또는 ‘1시간 만지작 비용 + 머그컵 비용' 이런 식으로 사용료를 받아 운영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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