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소설
"냉장고는 멸치로 그득하고… 또 누굴 줄꼬.”
할머니가 늘 하는 한탄을 했다. 연주의 할머니는 심심해하는 손녀를 위해 마른 멸치를 매주 사들인다.
"더는 멸치 살 돈도 없어. 네가 매일 멸치 똥만 까려고 드니."
"멸치 사와!”
연주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소리쳤다.
"더는 안 사!"
할머니도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할머니는 다시 시장에서 멸치를 사올 것이다. 아니면 연주가 "심심해. 심심해 죽겠어."하고 투정을 부릴 테니까.
"저 한 봉지 주세요. 저번에 받은 멸치가 떨어졌어요."
나는 지갑에서 멸치 값을 꺼내 건네며 말했다. 할머니는 몇 번 손사래를 치다가 만 원을 받았다.
"선생에게 보여줄 것이 있는데."
할머니는 거실장 서랍에서 우편물을 꺼냈다. 할머니는 한글을 읽지 못한다. 우편물의 내용은 죽은 연주의 아버지가 진 카드빚을 연주가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초생활 수급자이고 지적장애 2급인 연주가. 635만 원의 카드빚은 이 년 만에 952만원으로 몸집이 불어나 있었다. 내용을 말해주자 연주의 할머니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할머니를 위로했다.
나는 빚의 무서움을 잘 안다. 중등 임용 시험에 세 번 떨어지고 응시를 포기한 것도 학자금 대출과 마이너스 통장에 쌓여가는 빚 때문이었다. 학원 강사로 일한 이 년 동안 나는 스타벅스조차 한 번 가지 않았다. 빚을 다 갚은 후에야 우울증 진단을 받고 일을 그만뒀다. 우울감을 떨치기 위한 산책길에서 나는 지적 장애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복지관 옆 놀이터에서 서로에게 눈뭉치를 던지며 놀고 있었고, 서로에게 속해 있었다. 나의 고독이 뺨에 닿은 눈송이처럼 서늘하고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도 그들 안에 속해서 눈뭉치를 마구 맞고 싶었다. 그렇게 눈의 세례를 받고 나면 새로운 사람이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눈은 사방에서 하얗게 빛나고 있었고, 기대감도 흰색이었다. 나의 내면에 희망과 비슷한 색조의 감정이 생긴 것은 몇 년 만의 일이었다. 나는 복지관 건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장애활동 지원인 공고를 보았다. 시급과 업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시급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통장의 돈이 점점 떨어져간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무실에 가서 장애활동 지원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처음 돕게 된 장애인이 연주다. 눈싸움을 하면서 가장 신나는 표정을 짓던…
나는 연주의 채무 이행장을 들고 몇 번이나 법률구조공단을 찾아갔다. 국선변호사를 위임하고 변론 기일을 잡았다. 그러면서도 연주의 방을 청소하고, 몸을 씻기고, 연주를 복지관에 데려다 주었다. 연주가 사는 임대 아파트에서 복지관까지는 연주 걸음으로 삼십 분 거리다. 날씨가 궂으면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고, 날씨가 선선하면 걸어서 간다. 임대 아파트의 옆 동에 사는 희정도 복지관에 다녀서, 함께 이동할 때가 잦다. 자연히 나는 희정의 활동 보조인 미리와 친해졌다. 미리는 자폐적인 면이 있는 마흔한 살의 여자다.
함께 복지관으로 걸어가는 길에 나는 채무 이행에 대해 말을 꺼냈다. 미리는 "그렇군요."라고 심드렁하게 반응하더니 푸코의 책으로 화제를 돌렸다. "중세 시대에 바보는 마을에 한 명씩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어릿광대 같은 역할을 했죠. 권력 구조가 바뀌며 그들은 광인으로 분류되어 수용소로 쫓겨났어요."
미리는 한동안 장자를 탐독하더니, 요즘은 미셀 푸코를 읽고 있다. 그녀는 독학자이다. 조용히 있다가도 갑작스레 말을 터뜨리고, 상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딴 데를 보며 떠들어댄다. 그녀가 내게 기대하는 것은 섬세한 반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추종이다. 미리에겐 인간관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확실한 세계에 뿌리내리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그녀의 얼굴은 몇 겹의 시간을 부유하고 있어서 때로는 내 또래로, 때로는 중년의 고독한 여자처럼 보였다.
"푸코를 읽다가 나는 새로운 이론을 세웠어요.”
미리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그건 수용소로 쫓겨나기 전, 마을에 살던 바보들이 마법적인 힘을 지녔다는 거예요. 현실의 풍경 안에는 초월적 풍경이 내재되어 있어요. 마을의 바보들은 나뭇가지의 각도나 구름의 움직임을 통해 초월성을 알아차려요. 스스로 성스러운 순간을 창조하기도 하고요."
희정이 갑자기 은행나무 아래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면 미리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을 것이다. 희정의 생물학적 나이는 나와 같은 서른한 살이고 지능은 두 살 정도에 머물러 있다. 희정이 자기 코를 후벼 파서, 미리가 물티슈로 그녀의 손가락을 닦아주었다.
"희정 씨의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희정 씨가 갇혀 있는, 언어도 감정도 없는 세계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요?"
나는 감상적으로 물었다. 채무 이행장이 준 타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갇혀 있는 건 오히려 우리 쪽 아닌가요? 스스로에게 갇히지 않은 희정 씨는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지요."
미리는 지휘를 하듯 손을 내저으며 자신이 작곡한 음을 흥얼거렸다. 그녀는 스스로를 작곡가로 여긴다. "어쩌면 내가 죽은 후에야 후대인들이 내 곡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겠죠.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미리가 아무 데서나 지휘를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나는 당황했다. 초등학교 육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애 셋이 킥킥거리며 이 쪽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곰이 그려진 분홍 티셔츠를 입은 거대한 몸집의 희정, 계절에 맞지 않는 낡은 쥐색 외투를 걸치고 허공에 손을 휘젓는 깡마른 미리… 연주와 나 역시 한 팀으로 보일 것이다. 초등학생들은 아예 걸음을 멈추고 우리 팀을 구경했다.
연주는 누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싫어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연주는 희정의 손을 끌고 은행나무 그늘에서 빠져나왔다. 초등학생 한 명이 "형을 챙기나 봐. 착하다."라고 말했다. 머리카락이 짧은 연주와 희정을 남자로 본 것이다. 마치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향해 말하는 듯한 초등학생의 태도에, 나는 연주와 희정의 생물학적 나이가 그들의 이모뻘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풍성한 미래를 가질 것이고, 연주와 희정에게는 각각 다섯 살, 두 살의 오늘밖에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미리의 새로운 이론에 기대고 싶었다. 연주와 희정은 마법사이고, 마법으로 시간을 고정시킨 것이다. 그리고 멈춘 시간 안에서 초월적인 순간을 산다.
복지관의 수업은 미술, 연극, 국어와 수학 이렇게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장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연극 시간이다. 지역 연극인이 와서 '개미와 배짱이'같은 간단한 연극을 하기도 하고(아무도 대사를 외울 수 없어서 즉홍극으로 이루어진다) 술래잡기나 얼음땡, 기차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열 명 남짓한 장애인들이 수업에 참여하는 동안 활동 지원인들은 휴게실에 모여 수다를 떨거나 잠을 잔다. 미리는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나는 수업을 참관해서 선생님을 돕는다. "삼 년 내내 이 더하기 오를 가르치는 건 어떤 기분인가요?"라고 나는 국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육십 대 여성에게 물은 적이 있다. 복지관에서 그녀는 사업가의 부인이고 자녀가 없다고 알려져 있다. 그녀는 "매번 새로운 기분이죠, 아침 해가 뜨는 것처럼."라고 싱긋 웃었다.
국어와 수학 시간에 나는 희정이 손에 쥔 색연필을 종종 다른 색으로 바꿔준다. 희정은 수업시간 내내 색연필로 공책에 낙서를 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불협화음 같은 그 선들은 희정의 정신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그 밖에도 나는 선생님을 도와 장애인들이 덧셈과 뺄셈을 정확히 했는지(대체로 뺄셈을 많이 틀린다) 채점을 하고, 공책에 문장을 적어주기도 한다. 그러면 장애인들은 한 장 가득 내가 쓴 문장을 따라 쓴다. 연주는 개를 좋아합니다, 태훈은 연주를 잘 보살펴 줍니다 같은.
태훈은 연주의 단짝인 오십 대 남성인데, 지능은 여섯 살에 머물러 있다. 그가 내게 보이는 관심은 복지관 안에서 유명하다. 태훈은 추리닝 바지를 배까지 올려 입고, 나를 보면 "언니, 내 언니!"하고 소리를 지른다.
한 번은 태훈이 연주의 가슴을 만진 적이 있다. 연극 시간이었다. 장애인들은 복지관 3층의 강당에서 술래와 도망자로 나뉘어 뛰어다니고 있었다. 태훈은 "에잇"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연주의 젖가슴을 손바닥으로 쳤다. 마치 친구의 등을 밀치듯 돌발적인 장난인 것처럼. 태훈은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그의 주체할 수 없는 성충동이 입가의 떨림으로 배어나왔다. 나는 태훈이 내 가슴을 친 것 같은 황망함을 느꼈다. 태훈이 정말 만지고 싶었던 것은 사랑이니 연애니 하는, 그가 평생 닿을 수 없는 복잡하고 감미로운 감정인 것이다.
연극 선생님은 마흔 두 살의 지역 연극인으로 덩치가 큰 장발의 남자다. 그가 "여성의 가슴을 허락 없이 만지면 안됩니다."라고 부드럽게 말하자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 선생님은 태훈에게 사과를 시켰다. 연주가 커다란 가슴이 달린 천진한 소년 같은 얼굴로 “괜찮아.”라고 말해서, 나는 “싫다고 해야지.”하고 타일렀다. 연극 선생님은 연주에게 이제 무얼 하고 싶냐고 묻자 연주는 “얼음땡!”하고 외쳤다. 연극 선생님은 복지관 옆 놀이터로 가자고 제안했다. 지적 장애인 사이에서 와-하는 함성이 일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놀이터에서 지적 장애인 여덟 명이 얼음땡 놀이를 하는 모습은 나의 내면에 스며들어 뭔가를 뒤바꾸어 놓았다.
분홍 벚꽃 나무 아래의 얼음땡 놀이. 쉰두 살의 태훈이 술래가 되었다. 땡-을 외치자 배까지 올려 입은 추리닝 바지가 아닌 번듯한 정장 차림으로 태훈이 중년의 부인과 함께 봄길을 산책 중이다. 둘은 부쩍 오른 가스비와 중학생 아들의 낮은 성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얼음-을 외치자 모두가 얼음 속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두 살의, 네 살의, 다섯 살의, 열 살의 시간으로 얼어붙는다.
그때 한 발로 서있던 연주가 휘청거린다. 녹아내리는 시간 속에서 연주는 스물한 살의 여대생이 되어 서툰 화장을 하고 수줍은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한다. 연인은 꽃그늘 아래서 키스를 하고, 어쩌면 오늘이 같이 모텔에 가는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움직였어, 네가 술래야! 라고 태훈이 외친다.
술래가 된 연주는 얼음 땡 얼음 땡을 외치며 뛰어다닌다. 시간을 얼렸다가, 녹았다가, 순간을 영원으로 늘렸다가, 영원을 순간에 집어넣었다가… 삶과 몸을 맞댄 죽음이 분홍 꽃잎으로 흩날린다. 너무나 이상한 시간을 사는, 아이인 채로 죽을 아이들 곁으로.
다음 날 아침, 나는 내가 곧 죽을 것이란 실감과 함께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몇 년 안에 내가 죽을 것이라는 망상은 중등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동안 시작되었다. 당시의 나는 곧 죽을 내가 수험 공부를 하는 게 모순이라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저 수험의 실패가 곧 내 인생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채찍질했을 뿐이다. 죽음 망상은 공기 중에 옅게 떠돌다가 어느 순간 손에 잡힐 듯 농밀해져서 내 정신의 목을 조르는데, 특히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그렇다.
나는 두 시간도 넘게 침대에 누워 내 인생의 모든 실패들을 곱씹었다. 학원 강사로 일하는 것은 즐겁지 않았다. 나의 지긋지긋한 대입 수험을 떠올리게 했고- 나는 명문대에 가기 위해 재수를 했다- 학생들을 숨 막히는 경쟁으로 떠미는 느낌도 싫었다. 그러나 장애활동 지원인의 삶 역시 지긋지긋하지 않은가. 동네에 말 상대가 없어서 나를 보면 쫓아다니며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연주의 할머니, 남아도는 시간에 짜증을 내는 연주, 표정 없이 침만 흘리는 희정, 자신의 세계에 갇혀 길거리에서 팔을 휘젓는 미리… '바보배'에 탄 우리들.
미리는 푸코의 책에 나온 바보배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책에는 '광인들의 배'라고 번역이 되었지만, '바보배'가 더 정확한 표현이지요. 하긴 당시에 정신 이상자와 지적 장애인은 동일한 범주에 묶였으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16세기에 그들은 함께 배에 태워졌어요."
나는 바보배의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목적지는 없어요. 그저 바다를 떠돌 뿐이죠."
바보배에는 우울증 환자를 위한 자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태워진'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은 것은 나 자신이다. 지적 장애인과 자폐인과 함께 세계의 외부를 떠돌 운명을 나는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배는 언젠가 폭풍우를 만나 난파당할 것이다. 연주 앞으로 온 채무이행장이 그 증거다.
침대에 계속 누워있을 수 없었다. 9시까지 연주를 돌보러 가야하기 때문이다. 시곗바늘은 8시 16분을 가리켰다. 일어나서 샤워를 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예민해진 나의 정신이 샤워의 자극을 견딜 수 있을까? 물방울들이 바위처럼 굴러 떨어져 내 머리통을 부서뜨릴 것이다. 나의 뇌수는 머리카락들과 함께 하수구 뚜껑에 들러붙겠지… 결국 샤워를 하지 않은 채로 나는 야구 모자를 눌러 쓰고 집을 나섰다.
"선생님.”
땅을 보며 걷는데 오거리 근처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작년에 고3이었던 남자애였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고, 여드름투성이에 앞머리로 눈을 가렸다. 낮은 코는 정면에서도 콧구멍이 보여서 어딘지 유인원 같은 인상을 줬다. 나는 이런 어두운 느낌의 학생들에게 묘하게 인기가 많았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 학생도 내게 음료수를 건네거나 이메일을 보내곤 했다. 마주친 사람이 밝고 산뜻한 느낌의 대학생이 아니라서 나는 안도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그가 물었다.
"기억나지. 지금은 대학생이니?"
"아뇨. 저는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다 떨어졌어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재수 중이야?"
"대학에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프로 댄서가 될 거예요. 알바를 하면서요."
그러고 보니 이메일에 댄스를 좋아한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가 고위공무원이라고 했던가… 명문대에 가라는 아버지의 강요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또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춤을 춘다고.
"아버지가 허락하셨니?"
"아버지 허락은 필요 없어요."
내가 가만히 있자 그가 말을 이었다.
"선생님이 그랬잖아요. 지금은 대학 입시가 전부인 것 같지만, 사실은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세계가 존재한다고. 만일 무언가가 견고한 벽처럼 느껴진다면, 정말 그게 전부인지 의심해야 한다고. 그 말에 제가 선생님에게 반해 이메일을 보내곤 했잖아요."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나는 그럴싸한 말로 궁지에 몰린 십대의 환심을 사는 어른이었나. 갑자기 미리가 며칠 전 원시인의 대이주에 대해 말한 것이 떠올랐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이야기였다.
“호모 에렉투스를 아니?”
그는 “호모 에렉투스요? 하고 되물었다. 내가 연주의 집 쪽으로 걸어가자 그도 따라왔다.
“현생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이지. 지능은 두 살 정도. 지적 장애인에 해당하는 지능을 가졌는데도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로 갔어. 이동 자체도 놀랍지만, 그들이 아시아에서 맞이한 변화도 마법처럼 극적이었어. 원시인들은 현대인보다 훨씬 자연에 밀접했으니까 새로운 나무와 과일, 기후 변화가 충격적이었을 걸. 내가 아는 사람은 호모 에렉투스가 어떻게 대이주를 감행하고 낯선 환경에 적응했는지에 대한 이론을 세웠어.”
우리는 슈퍼 앞을 지나갔다. 슈퍼 입구에는 막대기 같은 공기인간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고, 유행가가 쿵쾅대며 흘러나왔다. 나는 음악소리가 조용해지는 곳까지 잰 걸음으로 걸어가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 예술을 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너머에 있는 먼 장소를 상상할 수 있다고. 호모 에렉투스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 최초의 원시인이었어. 그들이 떠날 힘을 키워준 춤과 노래는 마법의 주술인 셈이야.”
“저는 멀리 떠날 생각이에요. 조만간 집을 나올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그는 불안과 단호함이 섞인 얼굴로 돌아섰다. 나는 연주의 집으로 향하며 그의 미래를 생각했다. 그는 벽에 부딪치지 않을 것이다. 벽이 희미해져서 보이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미지의 대륙으로 떠날 테니까.
연주는 안방에서 <짱구는 못 말려>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읽지도 못하는 채무 이행장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어멈이 나쁜 년이지 연주가 한 살 때 집에 나갔으니까 하긴 나라도 버틸 수 있나 남편은 손찌검하지 애는 언청이에 머리도 모자라지 연주가 언청이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자국이 입술 위에 실금처럼 남아있어요 그 후로 전화 한 통 없으니 짐승도 새끼는 챙기는데 어찌 그리 무정할꼬 그러니 애 아범이 가슴이 타들어가 술을 마시지 내가 아범아 그렇게 술을 마시면 네가 죽는다 말을 했어요 그런데 듣나 안듣지 아범이 그러더라도 어머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방에는 소주병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노가다 하러 가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지 그러다 간암에 걸렸는데 죽는 날에 어머니 연주는 어찌하나요 하고 죽었어 그렇게 걱정이 되면 술을 퍼마시질 말던가 내가 억장이 무너져 아범도 이렇게 될 줄 몰랐겠지 저 세상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도와주겠지 병원비로 빚만 남기고 육백 만원이 천만 원이 되는 게 무슨 법인가 내 사는 꼬라지를 봐도 돈 달라는 말이 나올런가 기초수급비랍시고 얼마나 나온다고 연주는 치킨을 일주일에 두 번은 먹어야 되는 애인데 뒤룩뒤룩 살이 찌는 건 찌는 거지만 애가 원하는데 안 사줄 수가 있나 둘이 있으면 얼마나 심심하다고 난리인지 선생은 네 시간만 하고 돌아가고 복지관도 주 이 회만 하니 나머지 시간에는 저 애가 날 시집살이를 시켜 시집살이도 보통 시집살이가 아니야 심심해 죽겠어 죽겠어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당해낼 장사가 있나 선생 내가 여든이 넘었어요 아침마당에서 전원주가 그러더라고 죽을 날이 가까울수록 하루하루를 선물로 여기고 살아야 한다고 선물이 뭐야 나는 시간이 무슨 쓰레기 같아 매일 치워도 계속 쌓이고 쌓이는 쓰레기 이러다 죽으면 우리 연주는 누가 보살피나 시설로 가겠지 요새 시설이 좋아졌다지만 시설은 시설이지 어디 집 같나 티브이에서 보면 우리 연주 같은 여자가 아니 그 여자는 설거지도 하고 라면도 끓이고 연주보다는 똑똑한데 결혼도 하고 남자가 정상이에요 직업은 택배 나르는데 여자를 끔찍히 위해 그 여자는 무슨 복으로 그런 남자를 만났나 그래도 그 여자는 서방님 하고 애교도 피우는데 연주는 남자 여자 이런 일을 몰라 노는 것만 알지 그래도 생리도 하고 할 건 다 해 생리가 열흘씩 해서 병원에 간 적이 있는데 의사가 자궁을 떼자는 거야 스스로 처리도 못하고 험한 일 당해서 임신도 될 수 있고 생리대도 자주 갈아줘야 하는데 혼자 제대로 하나 내가 도와줘야지 그 의사 선생에게 내가 말했어 여보 의사선생도 딸이 있소 딸자식 자궁부터 한 번 떼보시오 그러니 아무 말 못하더라고 나도 죽는 게 무서워 사는 것도 무섭고 죽는 것도 무섭다”
나는 연주와 산책을 한다는 구실로 할머니의 중얼거림으로 가득찬 집에서 빠져나왔다. 주택 사이를 이십 분 정도 걸어서 고물상으로 갔다. 그곳에는 크고 순한 백구가 묶여 있다.
"흰둥이 배고파?"
연주가 물었다.
"응. 흰둥이가 배고파서 꼬리를 흔들고 있네."
내가 대답했다. 이것은 나와 연주가 백구 앞에서 늘 하는 대화다.
"빵 먹어?"
연주는 흰둥이 먹이로 할머니가 챙겨준 식빵 봉지를 흔들었다. 그리고 한 걸음 다가서더니, "무서워 죽겠어! 큰 개!"하고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흰둥이는 착한 개야. 괜찮아."
"착한 개야?"
연주는 조금씩 개에게 접근하더니, 개가 빵을 받아먹자 "흰둥이 배불러!"하고 기쁨에 겨워 소리를 질렀다.
이런 일을 산책을 할 때마다 연주는 의식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이 의식에 참여하며 위안을 받는다. 만약 어느 날 고물상에 도착해서 흰둥이가 없는 빈 개집을 마주한다면, 연주만큼이나 나도 상처를 받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자 할머니가 연주를 씻겨달라고 했다.
"애가 땀으로 축축하구먼."
"개 때문에 흥분해서 그래요."
"그놈의 개새끼."
할머니는 투덜거렸다. 그러나 할머니는 다음에도 개의 먹이를 챙겨놓을 것이다. 아니면 연주가 "흰둥이 배고파 죽겠어."하며 울상을 지을 테니까.
나는 연주의 옷을 벗겨 욕실로 데리고 갔다. 나 자신은 샤워를 하지 않은, 전날의 피로와 아침의 우울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몸으로 연주의 땀을 씻어내는구나. 나는 자조적인 눈으로 연주의 통통한 몸과 털이 없는 성기를 바라보았다.
연주는 자신의 몸을 비누 거품으로 문지르며 춤을 추었다. 만화영화에 나온 춤을 따라하는 것인데, 엉성한 동작이지만 의외로 리듬감이 있다. 연주가 흥얼거리는 곡은 평소처럼 만화영화의 주제가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 곡은 미리가 작곡한, 길에서 지휘를 하며 허밍으로 부르는 곡이었다. 새소리처럼 높고 단조로운 음.
나는 연주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으로 미리가 작곡한 곡의 아름다움을 느꼈다. 어쩌면 미리는 이 곡을 연주가 욕실에서 흥얼거릴 때 가장 아름다운 음색으로 들리도록 작곡한 것이 아닐까. 이 바보배의 작곡가는 갸우뚱거리는 배의 리듬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 음정이 부정확한 가수의 역량을 애초에 염두에 두고 곡을 쓴 것이다. 터무니없어 보일지도 모르는 이 생각에 나는 빠져들었다. 내가 연주의 등에 비누칠을 하고 샤워기로 물을 뿌려주는 동안 연주는 계속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연주의 허밍은 내게 이렇게 들렸다.
라 라 라
나는 광부예요. 천만 년 동안 단단해진 시간을 부수는 광부예요. 천만 개의 물방울이 시간의 파편으로 튀고 있어요.
나는 발가벗고 춤을 춰요. 재투성이로 춤을 춰요. 그것은 겹겹의 하루를 캐내는 광부의 동작이에요.
광물엔 순간의 빛과 천만 년의 시간을 새겨져 있어요. 그것이 나의 리듬이에요. 나는 나 자신의 바다니까요. 당신이 당신 자신의 구름이듯이.
라 라 라
변론 기일은 4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젊고 의욕적인 남자 변호사는 재판에 연주가 참석하길 바랐다. "판사가 직접 눈으로 연주 씨의 상태를 보는 것이 판결에 영향을 끼칠 겁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연주는 아침부터 초조한 기색으로 "재판 싫어… 싫어 죽겠어…"라고 중얼거리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연주는 재판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재판 얘기가 나올 때마다 할머니가 내쉬는 한숨을 통해 그것이 꺼림칙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할머니는 “재판 잘하고 오너라.”하고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다행히 희정과 미리가 함께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지방법원으로 가주었는데, 재판이 끝나고 함께 강가의 유원지에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재판장의 대기실에는 연주와 나를 제외하고도 네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중 은발에 은테 안경을 낀 남자가 연주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스물한 살의 연주를 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도 재판이 싫구나. 너도 싫으니?"
연주는 자신의 운동화를 바라보며 "싫어 죽겠어."라고 말했다. "연주야, 나도 재판이 싫어요 라고 해야지."라고 내가 타이르자, 은발의 남자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분이 이연주 씨입니까?"
맞다고 하자, 그는 "나는… 미안합니다. 몰랐습니다."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정장에 달린 명찰에는 부지점장이란 직책이 적혀 있었다. 그는 연주의 채권자인 ㅇㅇ은행의 부지점장이었다. 이 만남에 나는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채권자를 경멸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그는 너무나 젠틀하고 상냥한 노인이었다.
재판장은 대학의 세미나실처럼 작았다. 열 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가 놓여있었고, 사십대로 보이는 판사는 졸업식 날의 대학생 같은 복장을 하고 단상에 앉아 있었다.
재판은 혼란 속에서 진행되었다. 연주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고 재판 내내 탁자에 머리를 쿵쿵 찧어대었다. 그러다 티셔츠를 걷어 올렸는데,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서 유륜이 분홍색인 커다란 젖가슴을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나는 연주를 진정시키느라 재판 과정에 집중할 수 없었다. 판사도, 변호사도, 채권자도 모두 참담한 표정이었다. 재판은 십 분도 안 되어 끝났다. 판사는 연주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나는 권력 구조가 광기를 규정한다는 미리의 말을 떠올렸다. “권력은 광인을 마을의 어릿광대로 만들 수도, 바보배에 태워 바다를 떠돌게 할 수도, 범죄자로서 감옥에 가둘 수도, 환자로서 병원에 입원시킬 수도 있죠.”라고 그녀는 말했다. 현대의 권력 구조는 빚을 탕감해주는 조건으로 연주의 바보를 드러나게 만들었다. 과거의 내가 빚을 다 갚기 전까지 우울을 유예할 수밖에 없었듯이. 나는 무력감을 느끼며 연주의 손을 잡고 재판장을 빠져나왔다.
일층 로비의 기둥 옆에 서있는 미리와 희정을 보니 내 기분은 더 암울해졌다. 미리는 새로운 악상이 떠올랐는지 눈을 감은 채로 손을 휘젓고 있었고, 희정은 침으로 티셔츠가 흠뻑 적신 채로 사시의 눈을 굴리고 있었다. 희정은 연주의 미래였다. 연주는 점점 지능이 낮아져 결국은 침만 흘리게 될 것이다. 미리는 나의 십 년 후였다. 나는 연인도 친구도 희망도 없이 초라하게 늙어갈 것이다.
"싫어… 싫어 죽겠어!"
연주가 울부짖으며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때렸다.
“그만해, 연주야.”
내가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연주의 행동은 더 거칠어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멈추어 쳐다보았다. 경비를 부를까요, 라고 어떤 여자가 말했다.
그때였다. 공기 속에 투명인간이 형체를 드러내듯이, 희정이 연주의 팔을 잡았다. 그러더니 "어…어…."하고 중얼거렸다. 연주는 눈물 맺힌 눈으로 희정을 쳐다보았다. 희정은 연주의 팔에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켰다. 마치 껴안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희정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미리와 내가 놀라서 서로를 바라보는데, 연주가 희정을 두 팔로 안았다. 그리고 희정의 언어를 흉내내어 “어…”라고 중얼거렸다. 희정도 “어…”라고 회답했다.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어! 어! 어…”
그 순간 뜨겁고 밝은 것이 나의 안쪽을 샅샅이 훑었다. 무언가 녹고 변형되었다. 이젠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바보배는 태양과 가장 가까운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