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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섬, 소설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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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연 Oct 20. 2024

조각가의 하루와 다음날 아침

섬, 소설



  어느 계절이든 조각가는 동이 트기 직전에 깨어났다. 알람이 없이 저절로 그랬다. 태양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는 것처럼. 여름에는 다섯 시 즈음에, 겨울엔 여섯 시 즈음에 깼다. 요즘 같은 오월에는 다섯 시 반. 조각가는 간단히 물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소변을 본 후 미지근한 물 한잔을 마시고 산책을 나선다. 동이 트기 전에 저절로 깨는 이유는 새벽을 지켜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눈꺼풀을 서서히 뜨는 모습을, 그 푸른 눈동자와 속눈썹에 맺힌 이슬을 지켜보기 위해서라고. 

  조각가는 패딩을 걸친 채 집 밖으로 나와 정원의 뒷문을 열었다. 작고 검은 늙은 개가 조각가의 뒤를 따라나섰다. 십오 년 전 조각가의 부인은 어딘지 가여워 보이는 암컷 강아지를 얻어 와서 장난스럽게 까미유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조각가가 까미유에게 애정을 보이자 질투했다. 조각가의 집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중턱에 있었다. 조각가는 언덕 꼭대기를 산책의 목적지로 삼고 삼나무와 귤나무들 사이로 구불구불한 길을 걸었다. 드문드문 담으로 둘러싸인 집이 서 있었고, 집 앞을 지날 때면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깨어있는 사람이 없는지 창문 너머는 어둑했다. 가로등도 없어서 발밑이 어두침침했지만, 조각가는 지난 오 년 동안 거의 매일 걸었기 때문에 돌부리가 어디에 있는지, 흙이 파인 곳이 어딘지 알고 있었다. 조각가는 언제 태양이 솟아오르는지 알았다. 조각가는 남들이 그저 밤에 속한다고 여길 그런 어둠 속에서도 푸르스름한 새벽의 숨결을 느꼈다. 솟아오를 태양에 대한 예감으로 조각가의 가슴이 떨렸다.

  “까미유.”

  조각가는 네이비색 하늘을 향해 “빛을!”혹은 “더 많은 빛을!”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대신 개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조각가가 오늘 처음 뱉은 말이었다. 어둠 속에서 까미유가 꼬리를 흔들었다. 앞으로 개는 몇 년이나 더 산책길을 따라 나올 수 있을까. 이미 개는 이가 나빠져 사료를 물에 불려줘야 한다. 작은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고, 먼 곳에서 까마귀가 울었다. 새벽 어스름이 막 태어난 사물들을 미사보처럼 감쌌다. 조각가는 어릴 적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다니곤 했다. 어머니가 쓰던 미사보에는 클라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어머니는 주일이면 아들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클라라를 내 얼굴에 씌워주렴. 미사보를 쓴 어머니는 아름답고 낯설었다. 어머니는 조각가가 열두 살이 된 해에 백혈병으로 죽었다. 조각가는 어머니가 은초롱꽃이 수 놓인 레이스 베일 너머로 영영 사라졌다고 느꼈다. 

  조각가는 일흔 넷이었고 육체가 더 이상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발바닥 중간까지 벗겨진 양말을 끌어 올리지 않고 그냥 걷는 것처럼, 조각가의 몸은 더 이상 그의 정신에 밀착하지 못했다. 무릎은 삐걱거렸고, 허리는 묵직했고, 어깨는 욱신거렸다. 그러나 새벽을 걷다보면 어느새 육체의 불편함을 잊었다. 조각가는 자신이 전날 죽은 영혼이지만 그걸 모른 채로 마지막 산책을 한다고 생각하길 좋아했다. 그러면 쏟아지는 새소리도, 삼나무의 우듬지도, 희고 연약한 제비꽃이나 은은한 귤꽃 냄새도 더없이 의미심장했다. 만약 언젠가 죽는다면 그 다음 날 아침까지는 이승에 머물고 싶었다. 죽은 채로 동네를 산책하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죽은 조각가는 기꺼이 떠오르는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리라.

  언덕 꼭대기에 도착한 조각가는 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해가 떠 있었다. 세계를 덮은 미사보는 걷어지고 모든 사물이 섬처럼 솟아올라 있었다. 조각가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 한 개피의 담배가 산책을 완성시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사건이 있었다.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목줄이 풀린 갈색 털의 셰퍼드가 까미유에게 달려들었다. 까미유는 캉캉, 하고 비명을 내질렀고 조각가는 정신없이 다가가 셰펴드를 잡았다. 셰퍼드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조각가는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셰퍼드는 조각가를 공격하진 않았으나,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까미유는 종종거리며 도망가다 뒤를 돌아보았고, 셰퍼드 밑에 깔린 조각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뭔가 결심을 한 듯 눈빛을 굳히더니 몸을 돌려 셰퍼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몇 개 남지 않은 조그만 이빨로 셰퍼드의 목덜미를 물었는데, 이 공격에 셰퍼드는 자극을 받아 조각가의 품에서 빠져나와 까미유를 공격했다. 조각가는 주변에 있었던 나뭇가지를 잡고 셰퍼드를  세게 내리쳤고, 그제야 셰퍼드는 도망갔다. 

  조각가는 까미유를 안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피가 흐르지만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았다. 조각가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부상을 당한 이 늙고 가엾은 개를 위해 개집의 담요를 잘 펴주고 사료를 물에 불려주었다. 까미유는 개집 안에서 몸을 둥글게 웅크리고 앉아 피 묻은 허벅지를 핥았다. 조각가는 한 번도 까미유를 동물 병원에 데려간 적이 없는데, 짐승은 자연에서 회복력을 얻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조각가에게도 적용되어, 그는 아무리 심한 감기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않고 뜨거운 생강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러다 감기가 기관지염이 되어 고생한 적도 있었다. 조각가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걸 알았을 때도 외과적 수술은 거부하고 순순히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각가는 폐암 4기였다. 수술이 불가능할 정도로 암이 퍼져 있었고, 암 표적 치료제를 복용하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저녁에 그 붉은 커다란 알약을 삼키면 속이 메슥거렸고 졸음이 쏟아졌다. 사 년 안에 죽을 확률이 십분의 구라고 했다. 겨울과 봄, 여름, 가을을 네 번 더 볼 수 있다.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일 것이다. 조각가는 일곱 살 때 처음 찰흙으로 집에서 키우던 개를 만든 이후로 조각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죽음-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상태는 어떤 것일까. 조각가는 개집에 다가가 늙은 개를 쓰다듬었다. 개는 바들바들 떨었고, 심장은 거칠게 펄떡거렸다. 조각가는 집안일을 돕는 김 실장에게 문자를 보내 개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조각가는 샤워를 하고 부인이 운영하는 카페로 갔다. 카페는 집에서 정원을 가로질러 오 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는데, 갤러리를 겸했다. 오십 평 남짓한 공간에 청동으로 만든 인물 조각들이 놓여 있고 크로키가 걸려 있었는데 모두 조각가의 작품이었다. 조각가는 카페 부엌에서 냉동된 빵을 꺼내 오븐에 넣고, 사과껍질을 벗겨 얇게 썰었다. 그리고 커피를 머신으로 내리고, 오븐에서 꺼낸 빵에 사과 조각들을 올리고 올리브유를 뿌렸다. 어떨 때는 빵에 치즈와 바질페스토를 발라 먹었고, 어떨 때는 빵을 프랑스 버터에만 찍어 먹기도 했지만, 오늘은 신선한 사과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다. 조각가는 아침을 카페에서 먹을 때도 있었다. 전날 온 손님들이 남긴 웅성거림이 담긴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그러나 오늘은 혼자이고 싶었다. 조각가는 한 손에는 사과 샌드위치가 든 접시를, 다른 손으로는 뜨거운 커피가 든 머그잔을 들고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을 통과하는 오 분 동안 커피는 구름을 머금은 채 한 김 식을 것이고, 샌드위치에는 꽃과 들풀의 냄새가 배일 것이다.

  조각가의 집은 삼 층이었는데 일 층은 작업실이었고 이층은 조각가의 부인이, 삼층은 조각가가 살았다. 이층과 삼층은 내부에서 나선형 목재 계단으로 이어졌지만, 외부에서 삼층으로 바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었다. 부부 사이는 좋았지만 조각가는 외부와 완전히 분리된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했다. 삼층은 층고가 높고 한 면은 통유리창이어서 바다와 섬이 내려다보였다. 곳곳에 조각품이 놓여 있고 그 외의 모든 게 하얗고 현대적인 그 방에서 유일하게 골동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통유리창 앞에 놓인 낡은 체리목 책상이다. 조각가의 부인은 조각가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그 책상을 탐탁치 않아 했다. 조각가의 부인은 이 방에 붉은 기가 도는 체리 나무 책상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조각가는 적토로 만든 여자아이의 두상과 책상이 어울린다고 주장했다. 조각가는 책상에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었다. 성당에서 신자들이 맛없는 빵을 나눠 먹으며 신의 아들을 조금 먹는다고 여기는 것처럼. 먹는 것은 세상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의식이니까. 조각가는 기분에 따라 아침 식사 시간에 바흐나 슈만을 틀기도 했지만 오늘은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로 충분했다. 

  식사를 마친 조각가는 스케치북에 크로키를 그리기 시작했다. 책상이 있고, 사제가 의자에 앉아 있는 그림이다. 조각가는 몇 장이고 계속 그렸다. 책상과 수도복은 매번 동일했다. 그러나 어떤 어깨는 좀 더 선이 단단했고, 어떤 어깨는 구부정했다. 조각가는 젊은 수도사와 늙은 수도사 사이에서 고민했다. 책상은 필요했다. 책상은 거대해야 할까? 왜냐하면 사제는 뭔가를 쓰고 있고, 뭔가를 쓰는 사람에게 책상은 우주이므로. 아니면 책상은 사제의 소박한 성정을 드러낼 만큼 작아야 할까? 사제는 뭘 쓰고 있을까? 먼 곳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있을까? 자신의 안에서 들리는 신의 목소리를 받아적고 있을까? 신의 내면에 우주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처럼, 조각가도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 그래서 스스로도 닿지 못한 곳에 이 형상이 이미 들어 있다는 걸 알았다. 조각가는 그 미지의 형상에 다가서는 순간의 떨림을 사랑했다. 그러나 억지로 잡아 끌어낼 순 없었다. 비어있는 두 손을 세상을 향해 겸허히 내밀어야 했다. 그래야만 조각가의 두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조각가는 열 장이 넘는 크로키를 그린 후에야 크지도 작지도 않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구부정한 어깨, 회색 머리칼에 수도복을 입은 뒷모습이 자신의 내부에 이미 있었던 그 형상이라는 걸 알았다. 조각가는 만족스러웠다. 작업은 조각가의 나날의 삶을 하나로 이어줬고, 작품 속의 그림자 하나, 빛 한 조각이 조각가의 하루에 엄청난 깊이를 더했다. 사제의 뒷모습을 얻어냈으므로 조각가의 남은 하루는 충만할 것이다. 

  그런데 앞모습은? 조각가는 욕심을 내서 앞모습을 그려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어쩌면 조각가는 수도사의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게 두려운지도 모른다. 죽음의 맨얼굴을 보는 것처럼. 사제의 얼굴은 아주 늙었을까? 그래서 주름과 주름 사이의 심연마다 그의 영혼이 천사처럼 낙하하고 있을까? 아니면 노인과 소년의 얼굴이 혼재되어있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껴안은 얼굴일까? 조각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죽기 전에 이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까?      

  열두 시였다. 조각가는 나선형 계단으로 이층으로 내려갔다. 그는 쌈채소와 보리밥, 프랑스식 닭고기 스튜를 먹으며 부인이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아르바이트생이 그만둔다고 해서, 왜냐고 물어보니 울면서 김 실장 때문이라는 거야.”

  김 실장은 아내와 같은 교회에 다녔고 나이는 육십이 막 넘은 여자로 카페 일을 도왔다. 뚱뚱하고 가난하지만 그것이 거의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옷을 잘 입었다. 실장의 남편은 도예가지만 어떤 작품도 팔지 못했고 평생 돈을 벌어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부인은 남편을 예술가로 숭앙했다. 조각가는 자신이 그 남편의 입장이면 어떨까 상상한 적이 있다. 국립대 교수로 은퇴한 일류 조각가가 아니라,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은 무명의 예술가라면. 그러나 자신의 위치에 대한 우월감을 불러 일으킬까봐 조각가는 그런 상상을 금방 그만두었다. 조각가가 생각하기에 우월감은 저급한 감정이었다. 실장은 남편이 만든 백자 도자기를 조각가 부부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는데, 부부의 눈에 그것은 분명히 삼류였다. 선과 색이 거칠고 그 안에 담긴 정신은 조악했다. 칭찬을 바라는 실장의 눈빛에도, 조각가는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부인은 자신의 집 안에 그런 물건을 둘 수 없고 남에게 주기도 부끄럽다며 도자기를 내다 버렸다. 

  “새로 들어온 여자애랑 둘이 친해지니까, 자기같이 늙은 여자보다 또래가 좋냐며 김실장이 흘겨보더래. 둘이 붙어서 내 욕을 하는 건 아니냐고 추궁하기도 하고. 아르바이트생들에게 자꾸 근무 시간이 끝나면 자기랑 술을 마시자고 조른대. 아르바이트생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소리를 지르고.”

  “그런 문제가 있었는지 몰랐어.”

  조각가가 대꾸했다.

  “여보, 김 실장이 우리에겐 그렇게 충직하면서 아랫사람들에겐 함부로 하는 게 모순되는 것 같아.”

  “그런가? 딱히 모순은 아닌 것 같은데. 오늘 스튜가 참 잘 끓여졌다.”

  “당신 프랑스 유학 시절에 먹던 그 맛이지?”

  “그래. 닭고기가 부드럽게 잘 익었어. 라임을 넣었나? 향이 좋아.”

  “김 실장이 또 새로운 애를 뽑겠지... 우리 갤러리가 아르바이트생들에게 가혹한 곳이라는 인상이 생기는 건 싫어. 김실장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할 것 같아.”

  “천성은 잘 변하지 않아. 하긴, 그 사람은 당신에게 인정받는 걸 무서울 정도로 목표로 삼으니 당분간 조심하겠지.”

  “내가 직접 갤러리 카페를 운영해도 되지만, 난 장사가 적성에 맞지 않으니.”

  부인은 염색하지 않은 흰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칠순인 여자에게 아직도 소녀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이 조각가는 신기했다. 부유하고 명망있는 집안에서 사랑받고 자란 영향이 평생 가는 것이리라. 섬에서 건물과 땅을 산 것도 부인이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이 암을 이겨내도록 도와야 하니까.”

  부인은 도우려고 일어서는 조각가를 고갯짓으로 막은 뒤 식기를 치우고 행주로 식탁을 가볍게 닦은 뒤 냉장고에서 귤과 복숭아를 꺼냈다. 

  “미안해. 쓸데없이 김 실장 얘기로 식사 시간을 방해해서.”

  부인이 복숭아를 깎으며 말했다. 

  “사는 데 생활이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근사한 것만 보고 살 순 없어.”

  “당신은 아직도 너무 근사해서, 아직도 이 사람이 내 남편인가 맞나 어색해. 국민학교 때 선생님이 화장실에 가는 걸 본 것처럼.”

  “암 환자에게 하는 립서비스인가. 고맙네.”

  조각가가 웃으며 복숭아를 먹었다. 

  “아니, 정말 그래. 가끔은 당신이 여기가 아닌 멀고 아득한 장소에 가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해. 당신, 교회에 다니지 그래. 그러면 내가 덜 불안할 거야.”

  “하나님이 성경에서 가장 먼저 축복을 내린 것은 장소가 아닌 시간이었어.”

  조각가가 말했다. 
   “모든 것을 창조하고 일곱 번째 날을 안식일로 삼았지. 어떤 사람에게 특정한 시간은 성소가 되어, 그의 나머지 생애는 그 시간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교회 집사인 나보다 당신이 성경을 더 잘 아는 것 같아.”

  “조각도 공간에 대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다루는 것이야. 조각품의 내부에는 그 나름의 시간이 흐르고 있지. 외부의 시간이 결코 닿을 수 없는...”

  “하지만 당신은 조각품은 아침에 보느냐, 낮에 보느냐, 저녁에 보느냐에 따라 모두 다르니 음영이 주는 효과를 미리 계산해야 한다고 말했잖아?”

  “그래. 조각은 야외에 두고 자연의 변화와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감상하는 게 가장 좋지. 하지만 그럴 때조차 조각 내부에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시간이 흐르고 있어. 그 시간은 결코 손상되지 않는 거야.”

  “아니라고 말하지만, 당신은 종교적인 사람이야.” 

  “이 귤은 거의 썩기 직전이네. 맛이 이상해.”

  “그래? 김 실장에게 줘야겠다.”

  조각가의 부인은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 같은 것을 김 실장에게 주곤 했다. 김 실장이 혀를 차며 부인이 준 물건을 버릴 것이라는 걸 알았지만, 조각가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검소해.”   


  오후에 조각가는 k의 집으로 갔다. k는 조각가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다닌 사이로, 집을 지을만한 제주도의 땅을 소개해줬다. 조각가는 k의 집을 좋아했다. k의 집에선 섬 중앙에 자리잡은 높은 산이 보였고 사람 키만한 하귤 나무가 오십 그루 정도 있었다. 하귤나무에는 벌써 노랗고 큰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k는 부인과 개의 안부를 묻고는 웃으며 덧붙였다. 

  “부인은 아직도 까미유를 질투하는가?”

  “안사람은 개와 아주 잘 지낸다네.”

  조각가는 대답했다.

  “참으로 열렬한 사랑이야. 따지고 보면, 자네가 십 년 전 이곳에 온 것도 이 교수에 대한 부인의 질투 때문 아닌가.”

  k는 조각가를 놀리길 좋아했는데, 부인의 과도한 애정도 놀림감이었다. k는 십 년 전 조각가가 은퇴를 하자 마자 섬으로 온 사정을 말하는 것이었다. k의 부인은 k와 친하게 지내던, 동료 교수이자 시인인 이 교수를 질투했다. 이 교수와 k는 대학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고, 조각가와 마찬가지로 환갑을 넘은 나이였다. 그 질투는 아무 근거도 없는 것이었으나 k의 부인은 우울증으로 신경과에 다녔다. 조각가는 섬으로 이주했고 부인은 병에서 회복되었다. 

  “여자의 질투는 날카로운 법이라네. 이 교수는 대학시절 자네를 연모했지. 십 년 전엔 남편과 불화하고 있었고. 그 시기에 이 교수와 자네가 더 자주 만나지 않았나.”

  “그런 얘기는 처음 하는군. 나는 이 교수에게 아무 마음도 없었어. 만나서 대화하기 즐거운 스마트한 여성이라고만 생각했지. 대학 때 날 좋아한지도 몰랐어.”

  “워낙 자네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많았으니까. 키 크지, 잘생겼지, 부잣집 아들에, 최연소로 국전에 입선한 천재!”

  “여대생들이란 원래 항상 누군가를 연모하기 마련, 자네야말로 젊은 시절 만날 때마다 여자친구가 바뀌지 않았나. 그리고 이제 나는 잊혀지고 있어. 새로운 조각가들이 쏟아지고 있으니.”

  “겸손까지. 우리 김 조각가님에겐 단점을 찾을 수가 없군.”

  “자네는 고교생 때부터 지금까지 짓궂기가 한결같아.”

  “다시 말하지만, 여자의 질투는 의외로 날카로운 법이지. 이 교수를 향한 것은 잘못되었지만, 자네의 마음속 어딘가에 아무도 닿지 못하는 방이 있는 걸 부인도 알았을 거야. 그러니 마음에 병이 왔겠지.”

  조각가는 웃으며 대꾸했다.

  “푸른 수염의 방인가. 미인의 시체들이 있으려나?”

  “그보다는 성스러운 신전 같은 곳이 아닐까.”

  조각가는 놀랐다. 점심시간에 부인도 같은 말을 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조각가가 지금 구상하는 작업이 신성을 다루고 있다는 걸 주변 사람들이 느끼는 걸까. 

  “성스러움은 저기 풍경 속에 있다네.”

  조각가는 턱짓으로 창밖의 산을 가리켰다. 사월 말인데도 아직도 산꼭대기에 눈이 덮여 있었다. 조각가가 말했다.

  “산이나 바다를 대할 때 인간이 경외감을 느끼는 건 크기 때문이지. 저렇게 광활한 피조물을 만든 누군가를 저절로 떠올리게 하니까.”

  “그러면 크기가 작은 조각은 덜 의미 있단 말인가?”

  k가 물었다.

  “내가 아는 어떤 중국인 조각가는, 로댕의 작품 중에 손을 조각한 작품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어. 소품에 불과하기 때문에 로댕의 자연스러운 솜씨가 극치를 이룬다고 했지. 마찬가지로, 나는 산책길에 본 손톱만한 자주괴불주머니꽃에서도 경외감을 느낀다네.”

  “며칠 전에 미카엘을 만났어.”
   미카엘이란 이름이 나오자 조각가는 창밖의 허공을 힐끗 쳐다보았다. 마치 그곳에 천사와 비슷한 존재가 있어 조각가를 곤경에서 구해줄 것처럼. 

  “그런가.” 

  “미카엘은 뇌수술을 받고 치매에 걸렸어.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천국의 풍경을 말한다네. 붉은 양귀비와 푸른 아네모네가 피어있고, 사슴과 토끼와 사자가 어울려 뛰어논다는군. 조금은 진부한 광경이지. 아, 하늘에 무지개도 있는데 그 무지개는 인간이 알지 못하는 몇 가지 색을 더 갖고 있다나? 뇌수술의 부작용으로 미카엘이 환각을 보는 것 같아. 수도원 사람들은 신의 축복이라고 해.”

  “그런가.”

  “한때 둘은 정말 돈독하지 않았나. 내가 샘을 낼 정도로... 내가 모르는 이유로 절연을 했지만, 자네도 미카엘도 이제 마지막이 다가왔으니 소식을 전하고 싶었네.”

  “미카엘도 얼마 남지 않았나?”

  “수술의 예후가 좋지 않아.”

  “얼마나?”  

  “반년.”

  “알았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조각가는 휴대전화를 챙기며 떠날 몸짓을 했다. 둘은 의례적인 작별인사를 했고, 집으로 나가는 조각가를 k가 배웅하며 말했다. 

  “미카엘이 말이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하다가... 꽃밭에 책상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네. 그리고 그곳은 다락방이기도 한다네. 치매에 걸린 사람다운 횡설수설이지.”


  차 안에서 혼자가 된 조각가는 눈물을 흘렸다. 미카엘이 스물셋, 조각가가 스물다섯이었을 때, 둘은 여름방학을 한 집에서 보냈다. 조각가는 조소과에 다니며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미카엘은 고아였고 외국인 신부의 후원을 받아 예비 수도사로서 신학과에 다녔다. 녹음이 우거진 교정에서 k와 함께 어딘가로 가는 미카엘을 처음 만났을 때, 조각가는 미카엘이 피에타상의 성모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에 가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본 뒤로 조각가는 늘 성모의 이미지를 마음에 품었다. 성모의 얼굴은 소년 같았다. 앳되고 무심했고, 아주 옅게 지은 미소로 세계를 구원하고 있었다. 성모의 이미지가 꿈에 나와 몽정을 한 적도 있었다. 그때 조각가는 얼마나 큰 수치심과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조각가는 대학 신입생 때 릴케를 읽다가 한 구절을 만나고 자신이 피에타상을 어떻게 느끼는지 깨달았다.     

  아름다움은 무서움의 시작이니      

  성모의 얼굴은 조각가가 모르는 세계로 가는 문이었고, 그 문이 아주 조금이라도 열린다면 새어 나오는 빛에 그는 눈이 멀 것이다. 조각가는 신앙을 갖지 않았으나, 평생 그 빛을 향하고 싶었다.  

  k의 소개로 미카엘과 조각가는 친구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 마땅히 갈 곳이 없는 미카엘에게 조각가는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했다. 조각가의 아버지는 학교 근처 하얀 양옥집의 이층을 빌려 주었다. 일 층에는 주인인 노부부가 살았는데, 부인의 취미는 꽃을 가꾸는 것이어서 마당은 늘 꽃으로 가득했다. 수많은 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을 골라 보자고 했을 때, 미카엘은 푸른 아네모네를, 조각가는 붉은 양귀비를 골랐다. 이층은 나무 계단을 통해 작은 다락방으로 이어졌는데, 미카엘은 그곳에 머물렀다. 조각가는 이층의 넓은 방을 주고 싶어 했지만 미카엘이 다락방을 마음에 들어했다. 양옥집은 언덕에 있어서 저녁이 되면 집들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고, 둘은 다락방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저녁의 마을을 내려다았다. 

  “밤에 번지는 불빛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어둠과 죽음도 축복의 일부라는 것을.”

  미카엘이 포도주에 취해 붉어진 얼굴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 불빛 중에는 아직 성소를 짓지 못해 낡은 집에서 모여 사는 도미니크 수녀회의 불빛도 있습니다.”

  조각가는 홍등가도 있다고 말했다. 동남쪽의 저 화려한 불빛들이 그것이라고. 

  “멀리서 보기엔 똑같은 빛이군요... 그 분이 보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미카엘은 독서가였다. 다락방에는 조각가가 고등학생 때 쓰던 체리목으로 만든 고풍스런 책상이 있었는데, 그 책상에 앉아 미카엘은 책을 읽곤 했다. 조각가 미카엘은 조각가에게 <미하엘 콜하스의 고백>이란 책을 빌려준 적도 있다. 조각가는 책을 다 읽고 물었다. 어떤 길의 끝에 죽음이 있어도 신념을 위해 그 길을 택할 수 있는가? 미카엘은 신념이란 단어 대신 신앙을 넣어도 된다면, 예스라고 대답했다. 미카엘도 같은 질문을 했을 때, 조각가는 말했다. 신념 대신 아름다움이란 단어를 넣어도 된다면, 자신도 예스라고.  

  언젠가 선풍기를 틀어놓고 둘은 두 손을 잡고 춤을 춘 적이 있다. 사이먼앤 가펑클의 <침묵의 소리>가 LP판에서 흘러나왔다. 마룻바닥에 맨발이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나는 것이 둘은 즐거웠다. 땀투성이가 된 둘은 바닥에 앉아 수박을 먹었다. 미카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시간은 너무 완전해서 영원과 이어진 것 같군요.”

  조각가는 말했다. 한없는 기쁨 속에는 늘 비애의 예감이 깃들어 있다고. 왜냐면 어떠한 기쁨도 삶에 깃든 기쁨이니, 삶이 언젠가 무너질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냐고.

  “아니요. 삶이 무너진 자리에 천국이 일어설 겁니다.”

   조각가는 천국과 지옥이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개념이라고 말했다. 신이 인간을 영원한 지옥불에 타오르게 할 만큼 조악한 취미를 가질 리가 없으며, 천국이 있다면 바로 현재의 삶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비참한 삶이라도, 끝없는 죽음에서 건져 내어져 아주 잠깐 보는 천국이라고 했다. 미카엘이 얼굴이 빨개져 반박하려고 할 때 조각가는 그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유한한 삶 속에서도 어떤 시간은 일곱 번째 날처럼 특별하다. 너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평생 나의 성소로 여길 것이야.” 

  둘의 관계는 어떻게 끝이 났던가. 미카엘이 음욕에서 빠져나와 신에게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조각가는 그를 잡지 않았다. 함께한 여름으로 충분했다. 조각가를 따라다니는 상류층의 영애가 있었고, 결국 조각가가 돌아가야 할 곳은 그녀가 속한 세상이었다. 


  오십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둘은 만나지 않았다. 조각가는 미카엘이 있는 수도원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젊은 남자가 오늘은 방문이 가능한 날이라고 했다. 한 시간 후로 방문 약속을 잡았다. 네비게이션에 수도원의 이름을 터치하는 조각가의 손가락이 떨렸다. 

  조각가는 백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조각가는 자신이 너무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자의식을 가지고 스스로의 얼굴을 바라본 것은 오랜만의 일이었다. 미카엘은 조각가를 그의 얼굴로서 알아볼 것이다. 그건 억울한 일이었다. 지난 오십 년 동안 조각가가 보살핀 것은 얼굴이 아니라 영혼인데. 타인이란 그렇게 빈틈없이 육체에 둘러싸여 있는데, 어째서 나의 영혼은 늘 육체 너머로 흐르는 것일까. 그러나 어떤 얼굴은 그 얼굴의 주인이 미처 알지 못한 미세한 영혼의 떨림까지도 드러내지 않는가. 외면의 힘은 내면의 힘과 팽팽한 평형 상태를 이룬다. 그렇기에 인간이 팽창하거나 쪼그라들거나 여럿으로 분열되지 않은 채 하나의 육체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조각가는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만두고 엑셀을 밟았다.

  수도원으로 가는 길은 두 개였는데, 하나는 바닷가와 가까운 넓은 도로였고 다른 하나는 섬의 중심에 있는 높은 산에 가까운 이차선 도로였다. 산 쪽의 도로는 울창한 숲을 통과해서 가끔 노루가 튀어나왔고 차량이 드물었다. 조각가는 평소와 달리 산 쪽의 도로를 택했다. 조각가는 카 오디오로 프랑스 성가를 틀었다. 기리에 엘레시온,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제목이었다. 운전을 하는 와중에도 손가락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조각가는 부끄러웠다. 일흔넷의 생애 동안 많은 것을 겪었고, 이제 잃을 것밖에 없다. 그럼에도 마치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소년처럼 떨 이유는 무엇인가. 조각가는 자신의 내부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창 밖의 풍경을 보았다. 벚나무들의 뒷모습을. 벚나무들은 고개를 숙이고 행렬을 이루어 수도원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저렇듯 걸음이 느린 것은 나무들의 순례가 경건하기 때문이다. 땅속의 뿌리들로 걷기 때문이다. 

  조각가는 프랑스에서 만났던 플라타너스 나무를 떠올렸다. 미카엘이 떠난 후 조각가는  프랑스로 갔다. 학비와 기숙사비는 장학금을 받았지만, 갑작스레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는 바람에 집의 지원이 끊겼다. 조각가는 다른 가난한 학생에게서 생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주말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준 돈으로 빵을 샀고, 낚시를 배워 호숫가에서 물고기를 낚아 먹었다. 사흘을 굶은 채 낚시를 하다가 장화를 건졌을 때, 조각가는 허탈감에 나무 아래 벌러덩 누워 눈을 감았다. 유학을 포기하고 한국에 돌아갈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 나뭇잎 사이로 유리 조각처럼 부서지는 빛의 파편을 보았다. 빛의 조각들은 하나하나가 완성된 세계였다. 그리고 나무를 타고 줄지어 올라가는 개미들의 움직임. 조각가는 그 개미들의 이름을 동시에 모두 불렀다. 하늘을 날거나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열두 마리 새들의 노랫소리. 지느러미를 흔들며 유영하는 물고기들의 숨소리. 갑자기 사물들이 선명하고 완벽하게 지각되었고, 황홀감에 조각가는 눈물을 흘렸다. 훗날 조각가는 이때 겪은 황홀경이 굶주림과 스트레스로 인해 일시적으로 뇌에 엔돌핀이 쏟아져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난 순간에는 새로운 조각 세계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고 느꼈다. 조각가는 다시 낚싯줄을 호수에 던졌고 지금까지 낚아본 적이 없는 거대한 물고기를 낚았다. 그 물고기를 구워 먹은 조각가는 작업실로 향했다. 한 달간의 작업 끝에 조각가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나뭇잎 모양의 동판들을 연결해서 원기둥이나 삼각뿔, 원형을 만들고 그 안에 필라멘트 전구를 넣어 어두운 벽에 동판 사이로 새어 나온 빛과 그림자를 비추게 했다. 벽에 비친 그림자는 별무리 같기도 했고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움직임 같기도 했다. 작품은 전시회에서 호평을 받았고 프랑스인 기업가에게 제법 비싼 값에 팔렸다. 그때 조각가를 절망에서 다시 일으켜준 호숫가의 플라타너스 나무도 오랜 순례 끝에 이 벚나무들의 행렬 끄트머리에 합류했는지도 모른다.

  수도원에 도착하기까지 십오 분이 남았다. 운전을 하는 조각가는 늘 그렇듯 지금 구상하는 작품으로 생각이 향했다. 재료는 검은 흙을 써야겠다고. 왜냐면 흙은 땅이고, 땅은 신의 살갗이기 때문이다. 일본산 흑토를 써서 단단한 느낌을 줘야겠다. 재료가 중요하다. 이 세상을 창조한 이는 재료 선택이 얼마나 탁월한가. 나뭇가지에는 나뭇가지가, 구름에 구름보다 어울리는 재료가 있는가. 꽃잎의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은 연약한 촉감은 꽃잎의 색과 얼마나 어울리는가. 아기에겐 아기의 살갗이, 늙은이에겐 주름투성이의 살갗이 어울리는 것처럼. 땅의 심장에서 꺼낸 것처럼 새까만 흙을 써야 한다. 무덤가에서 파온 것처럼 죽음의 냄새가 나는 흙이어야 한다. 그러나 수도사의 얼굴에는 생명이 깃들어야 한다. 왜냐면 수도사는 신이 그의 귓가에 속삭이는 말들을 쓰고 있으니까.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말을 전한다는 기쁨에 전율하고 있으니까. 조각가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그가 미카엘에게 가는 이유는 작품 속 수도사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란 걸. 조각가의 심장이 떨린 이유는 작품이 완성될 수 있으리란 예감 때문이었다.      

  “미카엘 형제님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형제님의 눈은 천국을 보고, 귀는 천국을 듣고 있습니다.”

  젊은 수사가 복도를 먼저 걸어가며 말했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고, 어딘지 마네킹처럼 조악한 마리아상이 복도 끝에 놓여 있었다. 미카엘이 머무는 곳은 복도 가장 끝 방이었다.

  “미카엘 형제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 당황하지 마시고 미소를 지어 주십시오.”

  젊은 수사가 문을 열었고, 쏟아지는 빛에 조각가는 잠시 눈을 찌푸렸다. 미카엘은 창가에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기색에도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각가는 미카엘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미카엘은 낡은 갈색 투니카 차림에 머리카락은 숱이 적고 회색이었다. 그 순간 조각가는 미카엘과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완전하게 인식했고, 섬뜩한 기쁨을 느꼈다. 그들은 생애 동안 지녀온 하나의 얼굴에서 벗어나 무한의 얼굴을 나눠 가질 것이다. 

  “형제님, 오늘도 새들을 관찰하십니까? 친구분이 오셨습니다.”

  빛 속에서 미카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끝>


1) “더 많은 빛을.”은 괴테의 유언이다.

2) 사소하고 평범한 작품에서 로댕의 자연스러운 솜씨가 발휘된다는 내용은 중국 조각가 우웨이산의 저서 <조각가의 혼>을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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