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 소설
사라진 소녀를 찾으러 갈대숲으로 들어갔을 때 내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이었다. 초여름의 밤이기 때문이다. 목욕탕의 열탕에 오래 있다가 냉탕에 들어갔을 때 차가워 견딜 수 없다가도 이내 청량감이 온몸을 뒤덮는 것처럼, 나는 대지가 아직 머금고 있는 햇빛의 온기와 달이 내뿜는 서늘함을 동시에 즐겼다. 습기를 머금은 밤공기 속으로 팔을 움직일 때마다 손가락 끝에 물기가 번졌다. 여름 풀벌레 소리가 쏟아졌고, 바람에 갈대는 술렁거리며 스파이시한 풀냄새를 내뿜었다. 갈대숲이 어둠을 움켜쥐고 있어서 땅은 하늘보다 어두웠다.
사라진 소녀는 열일곱 살이고, 우울증 약을 복용했다. 재희는 밥을 먹거나 수행을 하는 중에 갑작스레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가 세어본 바로는, 하루에 스물세 번 운 적도 있다고 했다. 재희의 울음에 놀라는 사람은 선원에 새로 온 사람밖에 없었다. 재희는 아름다웠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재희의 눈은 비가 내린 후의 크고 하얀 꽃송이 같았다. 나는 재희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그녀 역시 나를 유난히 좋아해서, 내가 잠든 방에 몰래 들어와 이불 속 옆자리를 차지했다. 잠에서 깬 내게 재희는 자기의 어린 시절 얘기며 책 얘기를 들려줬다. 그러다 우리는 잠들었고, 날이 밝기 전에 재희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재희를 찾으러 갔는데, 대부분이 산기슭의 마을이나 선원에서 차로 삼십 분 거리인 시내로 갔다. 재희가 극단적인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른다며 저수지로 간 사람들도 있다. 나는 b가 갈대숲 쪽으로 갈 것을 알았고, b를 따라 나섰다. 오중 씨와 나의 룸메이트인 선애 씨도 함께 했다. 그들은 결혼하지 않은 오십대 커플이다. 갈대는 선원이 위치한 산과 다른 산 사이의 능선을 따라 넓고 길게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선원 사람들 중에 갈대숲 너머까지 가본 사람은 없었다.
선애 씨와 오중 씨는 갈대숲을 걸으면서 계속 말다툼을 했는데, 그 안에는 애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절박함이 있었다. 말다툼을 그치는 순간 정말로 헤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b는 빠르게 걸었고, 선원 씨와 오중 씨는 뒤처졌다. 어느새 커플의 목소리는 풀벌레 소리에 묻혔고, 손전등 불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 밤이 되면 사촌동생들과 숨바꼭질 놀이를 했었죠.” 나는 말했다. b는 잠긴 목소리로 왜 숨바꼭질 놀이를 밤에 하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네 명이었고, 술래가 방문 밖에서 백을 세는 동안 나머지 셋은 어두운 방 안에 숨었어요. 장롱 속, 커튼 뒤, 침대 밑, 책상 아래... 술래가 발견할 때까지 우리는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했어요. 가장 먼저 발견되는 아이가 다음 술래가 되었죠.”
“햇볕 아래 뛰어 다니며 서로를 잡는 놀이가 더 아이답지 않습니까?”
b는 어린 시절의 목가적인 풍경을 떠올리고 싶은 것 같았다. 나는 대꾸했다. “우리는 소년 탐정이 나오는 만화책에 빠져 있었어요. 방에서 늘 시체가 발견되는 만화였죠.”
“‘시체’라는 단어는 입 밖에 꺼내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b의 발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가 커다란 빨간 손전등으로 앞을 비췄고 나는 뒤따랐다. 팔과 목에 축축한 거미줄이 한 가닥씩 들러붙었고, 손전등 불빛을 따라 나방이 날아올랐다. 갈대숲 사이의 길은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갈댓잎이 팔과 종아리를 스쳤다. 나는 점점 사라졌다. 점점 사라져서 밤 속으로 숨었다.
나는 지금도 생생히 떠올린다. 커튼의 서늘한 주름 뒤에서 유령처럼 가벼워지는 기분을. 장롱에 들어가 겹겹의 이불에 파묻혀 무덤 속으로 떨어질 때의 자유로움을.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실루엣에 엉겨 붙었고, 사물이 되었고, 사물은 죽음의 편이기 때문에 죽음에도 속했다. 나는 끊임없이 숨었다. 나는 커튼 뒤에서, 침대 밑에서, 장롱 속에서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버렸다. 상쾌한 일이다. 누구에게든 완전히 자신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올 것이니, 그 전까지 할 수 있는 만큼은 자신을 잃어두는 편이 낫다. 죽자마자 미라가 될 수 있게 최소한의 음식으로 연명했다는 티벳의 어느 스님처럼. 그런데 너는 술래잡기를 좋아했을까. 너는 꼭꼭 숨었지. 너는 머리카락이 있었을까.
술래가 되는 건 어떤가. 문밖에서 백을 세며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 걸까? 나는 문 너머를 상상하며 평생을 보내고 싶구나. 다음 술래를 잡고 싶지 않구나. 너는 계속 죽음의 편에 있어라. 세상에서 살과 피를 갖고 부피를 늘리는 것은 공기를 밀어내는 일이 아니다. 바위를 밀치는 일이다. 온몸이 짓눌리며 너는 멍투성이로 자랄 것이다. 언젠가 죽음이 거대한 바위처럼 네 위로 떨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부피를 갖고 있으므로 너의 살은 으스러지고 피는 흥건할 것이다. 무섭구나. 너는 사물의 편에 있어라. 꼭꼭 숨어서 풍경 밖으로 나오지 말아라.
내가 티벳 밀교를 수행하는 단체로 온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이 단체는 산 중턱의 유스호스텔을 개조해서 선원으로 쓰고 있다. 약 팔십 명의 사람들이 선원에 있는데, 스물 두 명은 스님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수행자’로 불린다. 수행자들은 크고 작은 병을 앓고 있다. 내가 오고 석 달 후 중환자실로 간 여자도 있었는데, 결국 죽었다. 오십대 중반의 조용한 여자였다. 나는 그녀에게 오일 마사지를 해준 적이 있다. 오일을 계속 머금던 거칠고 건조한 살갗, 하나하나의 척추 뼈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마른 등, 무향의 오일과 뒤섞여 몸에서 풍기는 희미한 머스크 향, “내 몸은 뼈 밖에 없지요?”라는 말과 함께 그녀가 짓던 미소가 지금은 관 속에서 썩고 있을 것이다.
이곳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선원 사람들은 강당에 모여 시간표를 따라 수행을 한다. 강당에는 회색의 두툼한 방석들이 간격을 두고 놓여 있다. 방석들 가운데는 사람이 양손을 뻗은 것보다 넓은 길이 나있고, 오른쪽은 남자들이, 왼쪽은 여자들이 앉는다. 오전에는 호흡 명상을 하고 구결을 외운다. ‘움-치’ ‘옴-반잘사또홍’ ‘사마야 가-갸-갸’ 같은 구결을, 악센트와 발음, 혀의 위치에 주의하며 몇 백 번이고 외운다. 오후에는 가만히 앉아 몸 안의 기를 움직이는 수행을 하고, 저녁에는 호랑이, 제비, 원숭이 등의 동물의 움직임을 흉내 낸 기체조를 한다. 수행은 강제적인 것은 아니지만 참석률은 높다. 각자의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누가 수행에 빠졌는지 모두가 알 수 있다.
선원은 누군가의 소개로만 올 수 있는데, 나는 b의 소개로 왔다. b와 나는 한 번 잔 적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를 연애 상대로 느끼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b와 나는 육체관계를 가져보지 못한 남녀가 갖는 긴장에서 풀려나, 육체적 친밀감마저 포함한 친교를 맺게 되었다.
나는 이 수행을 하면 정말로 병이 나을 수 있냐고 b에게 물었다. b는 대답했다. “인간은 누구나 병에 걸려 있지요. 신성을 향하지 못하고 세속의 일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병에. 수행을 한다는 것 자체가 병이 나은 거지요.”
그것은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 역시 정말로 수행이 병을 낫게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호텔 스파에서 일하는 마사지사였고, 갑작스레 생긴 병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런 상황에서 티벳 밀교를 수행하는 단체에 합류해 보라고 b가 제안했다. 신성한 자로 불리는 티벳 스님이 있다는 말에도 흥미를 느꼈다. 신성함이 몸을 갖고 있다니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신성한 자는 유스호스텔의 4층 구석에 있는 방에서 ‘폐관 수행’을 하는 중이었다. 폐관 수행은 아홉 개월 동안 창문을 판자로 차단한 채 완전한 어둠 속에서 하는 수행이다. 신성한 자는 한 달에 한 번 폐관에서 나와 법문을 들려준다. 밤 열시 즈음, 모두가 자리에 앉아 불이 꺼진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신성한 자는 눈가리개를 하고 나타난다. 사람들은 신성한 자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을 동시에 들여다본다고 말했다. 나는 선원에 온 지 한 달 만에 처음 신성한 자의 법문을 들었는데, 긴장해서 틱이 왔다. 나는 손을 경련하듯 튕겨 올리며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사람이 사람을 꿰뚫어 본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이냐. 그는 볼 수 있는 걸까. 만질 수 있는 걸까. 쑤욱 손을 집어넣어 내 진실의 가장 말랑말랑한 부분과 거친 부분을 만지작거리는 걸까. 그것은 질구를 손가락으로 더듬는 것과 비슷할까. 아니면 질 속에 쇠막대를 쑤셔 넣는 것과 비슷할까.
커튼에 갇힌 어둠이 간장처럼 진해서 강단에 선 신성한 자의 모습은 보이진 않았다. 그의 한국어 발음은 어눌했고, 그가 하는 말들은 사소한 것들이었다. 검은깨 경단을 너무 크게 빚지 마라, 구기자차를 너무 오래 덖어서 탄 맛이 나게 하지 마라, 요리할 때 식용유를 적게 써라, 구결을 외울 때 ‘가-갸-갸’를 충분히 띄어서 읊어라.
신성한 자의 목소리는 무척 커서 사방에서 동시에 들리는 것 같았다. 늙은이의 음성 같기도, 젊은이의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외모 역시 그렇다고, 서른이라고 해도 예순이라고 해도 상관없는 얼굴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사람들은 그가 삶을 초월했다고도 했다. 어둠 속에 있는 수행을 반복하는 동안 죽음을 조금씩 끌어당겨 사용하며, 그는 태어나기 이전의 어둠과 죽음 이후의 어둠을 삶이라는 단절 없이 잇게 된 것일까.
법문이 끝나자 한 비구니 스님이 어둠 속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사부님에게 가 봐요. 그가 해결책을 줄 거예요.” 그녀는 속삭이며 내 팔을 끌었다. 그 비구니 스님은 어깨가 굳어 있었는데, 마사지를 매주 두 번씩 받으면서 팔이 어깨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그 후로 그녀가 내 마사지 실력을 소문내고 다녀서 마사지 예약이 보름 어치가 꽉 찼다. 나는 매일 한 명 내지 두 명을 마사지해줬고, 헌신적이고 실력 있는 마사지사로서 위상을 갖게 되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신성한 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몸에서 열이 난다든지, 밤에 헛것을 봤다든지 하는 일을 상의했다. 신성한 자는 흑임자 환을 아침 공복에 다섯 알을 먹어라, ‘움-치 도래’라는 구결을 매일 천 번 외워라 같은 처방을 내려주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둠이 눈에 익자 그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신성한 자는 덩치가 매우 컸고, 꼽추였다. 언젠가 누가 신성한 자에 대해 ‘우리의 고통을 대신 등에 짊어지신 분’이라는 표현을 썼을 때 나는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뿐, 그게 꼽추를 뜻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뮤턴트. 그는 기형이었다. 나는 기뻤다. 신성함을 지니기 위해서는 기형의 몸을 가져야 한다. 임산부의 솟아오른 배를 보며 누구나 그 안에 태아가 자라는 걸 알듯이, 사람들은 신성한 자의 불룩한 등에도 뭔가가 자란다고 믿는 것이다.
내 차례가 되자 비구니 스님이 내 증상을 설명했다. “틱... 틱이 뭐야?” 신성한 자가 갸웃거리자, 비구니 스님은 신성한 자의 손을 내 들썩거리는 어깨 위에 얹었다. 그는 “틱... 신경질환.”하고 결론을 내렸다.
“춤을 추세요.”
그가 엉성한 발음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지금요. 춤을 추세요.”
어둠 속에서 신성한 자는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나를 둥글게 둘러쌌다. 신성한 자의 노래는 너무나 낯선 언어와 리듬이어서 내 몸에 있는 낯선 동작들을 끌어냈다. 그 동작들은 내 의지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점, 몸 안에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점에서 틱과 비슷했다. 그러나 틱처럼 배설의 쾌감을 주지 않았다. 틱처럼 고무줄이 끊기듯 튕기는 움직임도 아니었다. 내 손발의 움직임은 느리고 부드러웠다. 나는 점점 고요해졌다. 마치 사람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미풍조차 없는 먼 바다처럼. 마침내는 텅 비어 버렸고, 도약이 내 몸에 찾아왔다. 나는 뛰어올랐다. 먼 바다에서 달을 향해 뛰어오르는 고래처럼. 바다와 하늘을 가로지르는 충만한 생명의 몸짓으로.
그가 이 장소에 있다는 것을, 신성함이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너에게 어떻게 설명할까. 신성함이란 스스로 빛을 발하는 태양이 아니라 모든 텅 빔이 모여드는 블랙홀이구나. 그래서 과거와 미래의 무수히 많은 어둠들이 이 곳의 어둠과 겹쳐지는구나. 그 중에는 태중의 네가 섞여있던 어둠, 네가 너 자신의 몸과 구분할 수 없었던 미끌미끌하고 아득한 물의 어둠도 있다.
아이란 무엇인가, 피와 살과 꿈으로 이루어진 아이여. 너는 꿈 안에서 자라고 있구나. 어둠 이외의 꿈은 꾸지 못하겠구나. 너의 눈꺼풀에 빛이 영영 닿지 않겠구나. 나는 매순간 묻는다. 어떤 곳인가, 네가 한 번도 겪지 못한 이 세상은.
“언제 처음 틱이 생긴 겁니까?”라고 뿔테안경을 낀 젊은 정신과 의사는 물었다. “해변에서 까마귀 다섯 마리에게 뜯어 먹히는 개 시체를 본 뒤로요. 나는 무척 놀랐어요. 처음에는 아이의 시체라고 생각했거든요. 내장만으로는 뭔지 잘 알 수 없었어요.”
출근길이었다. 나는 해안 도로를 달리다가 기이한 풍경에 놀라 차를 세웠다. 세찬 바람이 불었고, 파도가 지나간 해변에는 갈색 물거품이 너울거렸다.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까마귀들이 시체를 뜯어먹었다. 그 풍경은 내 기억 속에 정지 화면으로 남아있다. 죽은 개의 내장만이 붉게 처리된 흑백 사진으로.
그게 아이의 시체가 아닌 죽은 개라는 걸 깨달은 후에야 내가 묘한 동작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오른손을 경련하듯 튕기는 동작이... 동작은 내 의지로 통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동작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건 정확한 설명이 아니다. 동작은 내게 쾌감을 주었다. 점에 난 두꺼운 털을 뽑을 때와 같은, 불유쾌한 무언가를 뿌리채 몸 밖에 내보내는 쾌감... 내 정신의 두터운 살갗 아래서 엉망으로 뒤엉켜 곪고 있는 무언가가, 어떤 형태로든 세상에 배출되고 있다는 것...
하루 중에 수시로 틱이 왔고, 한 번 오면 한 시간이 넘게 지속되기도 했다. 나는 더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지만, 편의점에 가기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기이한 것을 보는 시선이야말로 내가 마땅히 받아야하는 것이라는,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상적인 사회인을 가장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병리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된 나의 다른 틱 동작은 눈 깜빡임이다. b가 알려줄 때까지 나는 내가 눈을 깜빡이는지도 그게 틱인지도 알지 못했다. 마치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는 아이처럼,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손을 튕기는 동작이 생길 때는 눈 깜빡임이 반드시 있었고, 때로 눈 깜빡임만 단독으로 일어날 때도 있었다. 나는 이런 틱 동작들을 무의미하고 과잉된 것으로 여겼는데, 어느 날 틱이 일어난 스스로를 거울로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금 누군가 내 손에 칼을 쥐어준다면, 앞에 사람이 있다면, 내 오른손은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을 찌를 것이다.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는 아이처럼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며.
두 시간 후에도 우리는 갈대숲의 어딘가에 있었다. 허리까지 오던 갈대의 키가 가슴팍까지 높아졌다. 계속 걸어가면 갈대숲은 우리의 키를 뛰어넘어 이층 건물처럼 높아질 것이다. 어쩌면 밤의 갈대숲은 평생이 걸려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인지도 모른다. b에겐 재희를 찾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b에게 필요한 건 재희가 아니라 장소이다. 사라진 것들을 애도할 수 있는, 모든 사라짐이 머무는 장소. 그런 장소에서 b는 끝없이 헤매고 싶은 것이다.
b는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일 년 전, 육전과 술을 파는 식당에서 사진을 보여 줄 수 있냐고 내가 물었을 때, b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방에서 인화된 사진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스무 장 가까이 되는 사진들은 낡고 꾸깃꾸깃했다. b는 그 사진들을 늘 갖고 다니는 것 같았다. 사진은 흑백이고 초점이 선명하지 않았다. 폐허나 공원, 바닷가 등 사진이 찍힌 장소는 다양했지만 사람은 등장하지 않았다. 놀이터를 찍은 사진조차도, 누군가 힘껏 민 것처럼 빈 그네가 공중에 치솟았지만 타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떤가요?” b가 물었다. 그는 육전을 향하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내 반응을 살폈다. 원래는 호리호리하던 그의 몸에는 군살이 붙어 있었고, 면도를 하지 않은 뺨과 코 밑에는 1mm 정도 굵게 수염이 자라 있었다. 나는 b의 얼굴을 최대한 보지 않았다. 만약 족집게로 뽑아도 된다면 나는 시간을 들여 그 털들을 모조리 뽑았을 것이다. 나는 불필요한 털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사진들 속에 누군가가 숨어 있는 것 같아요.”라고 나는 말했다. 심지어 지평선이 드러난 들판 사진에서도 그렇다고.
“그건 제가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법한 장소를 좋아하기 때문일 겁니다.”
“숨겨져 있는 것은 살아있나요? 아니면 죽은 것인가요?”
“무엇이 숨어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당신은 형사로서 계속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았죠. 그것이 범인이든, 행방불명된 사람이든, 시체든, 시체의 절단된 조각이든... ”
“저는 사진을 통해 숨겨진 것의 정체를 드러내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b가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대상과 나 사이의 거리감일 뿐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든 아니든, 내가 그것을 의식하는 이상 그것 역시 나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제게 사진은 대상과 나 사이의 긴장에 형태와 색채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나는 b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갈대숲 사진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바싹 마른 갈대숲의 일부는 사람이 웅크리고 있을 법한 크기로 눕혀져 있었는데, 마치 죽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 영정사진 같았다.
“그건 갈대가 아니라 억새입니다.”
b는 어떻게 갈대와 억새를 헷갈릴 수 있냐는 듯,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b에겐 갈대와 억새의 차이가 중요한 것이다. b는 지적 장애가 있는 십대가 실종된 사건에 대해 말했다. 지능이 대여섯 살에 멈춘 여자애였는데, 집에서 오십 키로 떨어진 억새숲에서 발견되었다. 여자애는 굶어 죽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사체였고, 장과 입 안에서 억새 씨앗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솜사탕을 좋아하는 아이였다고, 억새 솜털이 꼭 솜사탕처럼 보였을 거라고 여자애의 할머니가 울었다. b는 말했다. “몰랐어요. 억새의 잎이 그렇게 날카로운지. 그 여자애는 상처투성이로 발견됐어요. 억새잎에 베여서 죽었다고 해도 믿었을 겁니다. 갈댓잎은 그렇지 않아요. 부드러워서 살갗이 닿아도 다치지 않죠.”
b는 소주잔을 연신 기울였고, 나는 차가운 콩나물국과 막걸리를 번갈아 마셨다. 그는 십년 째 매주 경찰서에 찾아온 한 아주머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전단지를 보여주며 우리 딸 소식이 있나요, 라고 묻는다고 했다. 전단지에는 십년 전 사진이니 이제 서른여섯 살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 아주머니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포기를 했거나 이사를 갔나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목을 맨 거였다. 현장으로 출동한 사람은 b였다. 아주머니가 경찰서 앞으로 남겨둔 유서를 처음 읽은 사람도 b였다. ‘아이가 사라졌으니 나도 사라져서 찾아보겠습니다. 경찰 선생님들도 부디 계속 찾아주세요. 감사합니다.’
실종자 어머니의 자살 사건과 연이어 일어난 지적 장애 여성의 아사 사건은 b의 정신에 타격을 준 것 같았다. 그는 잠들기 전에 매일 소주를 마시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여자들이 꿈에 찾아온다고 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여자들이. 여자들의 얼굴은 다 다르지만 하는 말은 똑같다고 했다. b는 알콜 중독으로 휴직을 하고 강원도며 제주도로 내내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당시 나는 b의 사진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여자들을 찾지 못한 죄책감을 신비감으로 위장하는 기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육전을 파는 식당에서 얻은 b의 흑백사진을 책갈피로 사용했는데, 어느 날 문득 사진에서 뭔가가 어른거리는 걸 보았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사진은 마치 초음파 영상처럼 일렁거렸다.
너는 컴퓨터 모니터 안의 일렁이는 흑백 점의 이미지로 내게 남아있다. 나는 시력 검사표를 들여다보듯, 그 점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팔과 다리와 얼굴이 보일 것 같았다. 그건 그냥 점이었다. 별처럼 희미한 점. 십 칠년 전의 일이다. 나는 삼주 차의 태아인 너를 사라지게 했다. 나는 너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나는 낙태에 대해 무지했다. 의사는 ‘흡입’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렇듯 청소기가 먼지를 빨아들이는 것 같은 방식으로? 내게 일어난 일은 다른 여자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산부인과에서 다리를 벌리기. 배 위에 내려진 분홍 커튼으로 내 정신과 커튼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을 분리하기.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 다리 사이로 들어가는 섬뜩한 쇠막대. 그 일이 얼마나 오래 일어났는지는 모르겠다. 마취 주사를 맞았는데도 뱃속이 아팠다. 나는 두 끼를 굶은 상태였고, 그 일이 일어나는 와중에 햄버거가 떠올랐다. 나는 햄버거를 무척 좋아했다. 고기가 되어버린 돼지도 언젠가 엄마 돼지의 뱃속에 있었을 테고, 뱃속에서 자랐을 테고, 엄마 돼지의 질구를 피로 물들이며 태어났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 외엔 변한 게 없다. 그날은 잊혀졌다. 해변에서 까마귀 다섯 마리에게 뜯어 먹히는 너의 시체를 보기 전까지.
“재희가 요즘 달라진 점이 있나요?” 밤의 갈대숲에서 b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재희가 선원에서 유일하게 따르는 사람이 여진 씨잖아요.”
b의 말대로 재희는 선원에서 나 외의 사람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 재희를 눈으로 쫓았다. 어느 날 깨달았다. 만약 내가 낙태한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면 재희와 같은 나이였을 것이다.
“일주일 전에 재희가 마당에서 개미를 죽이는 모습을 봤어요.” 나는 말했다. “손가락으로 한 마리 한 마리를 꾹꾹 눌러 죽이더군요. 작은 점에 몰입하고 제거하는 모습에 내 강박증이 자극되어 틱이 왔어요.”
“재희 답지 않은 일이군요.”
“감정을 없애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라고 재희가 말했어요. 백 마리를 죽일 거라고. 그 아이는 나처럼 되고 싶다고도 말했어요. 자신이 관찰한 바로는, 내가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나는 오해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재희가 개미를 한 마리 죽여보라고 했지요. 나는 들썩거리는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개미를 한 마리 죽였어요. 재희는 무슨 느낌이냐고 물었고, 나는 느낀 바를 이야기했어요. 재희는 그것보라고, 내가 감각은 예리하지만 감정은 최대한 무디게 만들었다고, 그 간극 때문에 틱이 오는 거라고 했어요.”
십대 아이가 할 만한 표현은 아니라고 b가 말했다. 아마 어느 책에서 읽은 말이 아니겠냐고. 그 애가 늘 들고 다니는 토마스 만의 소설이라든지.
“재희는 내게 울어본 적이 있냐고도 물었어요. 나는 한 번, 고등학교 수업시간에 소설을 읽다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고 대답했어요. 그 소설은 지루했고 내용도 거의 이해가 안 갔는데, 그래도 학교 수업보다는 재밌었기 때문에 몰래 읽었죠. 책에서 어느 구절을 읽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통곡하듯이 꺼이꺼이 울었죠. 수학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도였어요. 나는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문자를 받았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재희가 좋아할만한 일화군요.”
“개미를 죽이는 일을 멈추고, 책의 제목을 물었어요. <파우스트>라고 대답했죠.”
현실과 직접 접촉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신의 살갗이 예민해서 현실과 정신 사이에 늘 얇은 책장을 끼고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재희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재희는 오늘 점심식사 때도 책을 읽지도 않으면서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었다.
나와 재희, b는 4인용 테이블에 앉았는데, 우리는 신체적으로는 건강하다는 이유로 뒤뜰의 풀을 베는 작업을 하고 왔기 때문에 함께 앉은 것이었다. 메뉴는 삶은 연근과 삶은 호박, 삶은 무, 아무 간이 되어 있지 않은 감자국과 보리밥이었다. 재희는 밥은 먹지 않고 연근 두 조각과 호박 두 조각, 무 한 조각을 먹었는데, 한 조각이 엄지손가락 한 개 정도 크기였다. 재희는 키가 백칠십 센티를 넘었고 매우 말랐다. 재희가 입은 원피스는 목덜미가 헐렁했는데, 깊게 파인 재희의 쇄골에는 어둠이 깊게 고여 있었다. 흰 원피스는 종이처럼 사각거리는 재질이고, 민소매였지만 품이 넓어서 몸매를 드러내지 않았다. 재희 외의 선원 사람들은 모두 갈색이나 회색, 검정의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고 치마를 입은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흰 원피스만을 입는 재희의 취향은 특별히 존중되었다. 신성한 자가 십대는 패션에 민감하기 마련이며, 원하는 옷을 입는 것이 우울감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앉은 자리에 일주일 전에 선원에 온 뚱뚱한 여성이 합류했다. 그녀는 사십대 초반으로 선원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는 여자였고, 나와 친해지고 싶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당신이 마사지를 해준다고 말했어요.”라고 뚱뚱한 여자가 말했다. “당신이 호텔 스파에서 일하는 마사지사였다고 했어요.”
붉고 굵은 목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는 지나치게 성량이 커서, 주변 사람들이 이쪽을 흘끗거렸다. 내가 마사지를 해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오일 마사지를 받으려면 웃옷을 벗어야 하고, 하의는 엉덩이 골이 보이는 곳까지 내려야 했다. 선원 사람들은 오일 마사지를 외설적이라고 느꼈다. 마사지는 은밀하게, 외딴 방에서, 해가 진 이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뚱뚱한 여자가 그것을 식당이라는 공공장소에서 발설한 것이다. 옆 테이블에 앉은 주아 씨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말을 받았다. 주아 씨는 나와 동갑인 여성으로, 내게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여진 씨는 호텔에서 일할 때 낯선 남자의 벗은 몸을 오일로 어루만졌던 건가요?”
사람들의 시선은 내게 쏠렸고,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선원에서 남녀 간의 접촉은 금기이며, 부부마저도 서로 다른 방을 썼다. 마사지를 받으러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모두 여자였다.
“마사지가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는 동작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에요, 엄지나 팔꿈치로 통증 유발점을 강하게 압박하기도-”
“사사나 스님, 티벳에서 남녀 간의 육체적 접촉을 얼마나 삼가는지 말씀해주세요.”라고 주아 씨는 한숨을 내쉬며 내 말을 끊었다. 사사나 스님이 말했다. “티-벳에서 결혼한 남녀는 한 계절에 한 번씩 성적인 교-합을 갖고, 서른다섯이 넘으면 아예 교-합을 금합니다.” 사사나 스님의 너무 느려서 꼭 끊어질 것 같은 말투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냈다.
거 봐라, 하는 눈빛으로 주아 씨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주아 씨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뺨에서 솟아오른 사마귀에는 새까맣고 심술궂은 털이 나 있었다. 주아 씨는 암환자이고 시한부이다. 이년 후면 저 사마귀와 내게 품은 적의는 그녀와 함께 관에 담겨 땅에 묻힐 것이다. 그러나 주아 씨에게는 터무니없이 짧은 이 년이, 내게는 너무 긴 모멸의 시간인 것이다. 그녀는 예전에도 내가 수행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든가 소설책을 읽는다는 등의 이유로 시비를 걸곤 했는데,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늘 삶거나 찐, 소금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무미한 음식만 먹는 사람들이 주아 씨의 악의라는 자극적인 맛을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재희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재희는 처음에는 조용히 흐느끼다가, 나중에는 억울한 일을 당한 아이처럼 어깨를 떨며 끅끅 울었다. 나를 향한 조롱이 재희의 울음 때문에 멈춘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마사지사로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몸을 만졌다. 뚱뚱한 몸, 마른 몸, 근육질의 몸. 흰 타월로 눈을 덮은 그 몸들은 내게 복수의 몸이 아닌 하나의 몸일 뿐이다. 나의 시선을 끄는 것은 아직 자라고 있는 몸, 아이의 몸이다. “아이가 성장통을 겪어요.” 아이의 엄마가 말한다. 나는 아이의 등과 팔다리를 부드럽게 문지른다. 세상을 향해 면적을 넓혀가는 일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란다.
아이란 무엇인가, 피와 살과 꿈으로 이루어진 아이여. 태어난다면 너는 먼저 아이의 생을 살아야 한다. 아이의 생은 끔찍하게 길고 실제로 영원하다. 왜냐하면 너는 어른이 된다는 걸 믿지 않기 때문이다. 무한하게 팽창하는 집과 동네와 숲에서 너는 작고 작구나.
아이의 마음은 어떻게 자랄까. 너의 마음은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맞을 때마다 움푹 파일 것이다. 주먹과 손바닥, 배드민턴채, 골프채, 펜치. 그가 휘두른 펜치에 너의 광대가 스친다. 펜치가 집기 좋은 형태의 마음이란 어떤 모양일까. 밤에 일어나는 일. 아버지의 붉은 눈이 밤을 물들인다. 누렇고 단단한 이빨이 밤을 갉아 먹는다. 너의 마음은 여기저기가 움푹 파인 채로 누렇고 붉은 기이한 모양으로 자랄 것이다. 너의 마음을 부드럽게 문지르고 싶구나.
“주아 씨는 여진 씨의 젊음과 남은 시간을 부러워하는 겁니다. 모두 그걸 알고 있어요. 언젠가 여진 씨는 현실로 돌아가서 자기 삶을 누리겠죠. 삼십대, 사십대, 오십대, 육십대, 그 이후에도 노년기의 여성으로서 희노애락을 누릴 겁니다.”
점심시간 후의 산책에서 b는 이렇게 말했다. b와 선애 씨, 오중 씨, 재희와 나는 저수지 쪽으로 가는 중이었다. 산책을 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회색 구름은 음울하게 층층이 쌓여 있었다. b는 주아 씨의 악의에 노출되어 닫힌 관처럼 위축된 나의 마음을 환기시키고 싶은 것이다. 재희는 멀찍이 뒤떨어져 걸었고, 오중 씨와 선희 씨는 앞서 가며 대화에 열중했다. 저수지에 가까워지자 물비린내가 났다.
“여진 씨는 사실 수행에 큰 열정을 보이진 않죠. 낮 수행시간에 여진 씨가 어디론가 사라진다는 걸 모두 알고 있어요. 하루종일 보이지 않는 날도 있고요. 주아 씨는, 수행이 그녀의 전부예요. 그녀의 남은 삶은 모두 수행에 바쳐질 겁니다.”
“주아 씨가 시한부인건 내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처지에 있지 않은 것이?”
“그건 부당한 질문이에요. 누구나 그런 처지를 피할 수 있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언젠가 알게 될 겁니다. 나나 여진 씨가 주아 씨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아니 사실은 완전히 같다는 것을요. 그때 여진 씨는 자신이 이 년 안에 죽을 운명의, 저 심술궂은 주아 씨가 아님을 안도했던 지금의 자신을-”
“-그러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쩔 건데요?”
선애 씨의 성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둘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어머니, 빚, 임대 아파트, 노후 같은 단어들이 축축한 회색 공기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들은 이전에도 같은 내용으로 수없이 싸웠다. 임대 아파트는 어머니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둘은 살 곳이 없다. 어머니는 아흔 두 살이다. 선애 씨는 당뇨였고, 오중 씨는 췌장암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둘이 함께 앓는 병은 가난이었다. 결혼에 대한 둘의 입장은 서로 달랐다. 오중 씨는 둘이 하나보다 낫다고 낙관했다. 선애 씨는 결혼이라는 단단한 결합을 통해 가난이라는 악성 종양이 순식간에 둘의 온몸에 퍼질 것이라고, 그 상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일 거라고 믿었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흘러온 가축의 분뇨 냄새가 코를 찔렀다.“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라고 나는 말했다.
b가 대꾸했다.“사라진 여자들이 어디선가 여진 씨처럼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는 위안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했다. 문득 나는 재희를 보았는데, 그녀는 둑에 서서 저수지의 물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재희의 흰 피부는 호수의 회청색 빛깔을 그대로 비출 정도로 투명했고,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재희는 키가 매우 큰 소녀들이 흔히 그러하듯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이거나 부러 당당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재희의 아름다움은 자신을 의식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재희의 슬픔 또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듯 끊임없이 솟아나는 슬픔은 외부에서 동력을 얻는 슬픔이었다.
태어난다면 너는 몸을 너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세계에 대해서도 너의 세계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린 너는 울지 않는다. 세상에 너의 눈물이 닿는 것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너의 발은 5미리 정도 살짝 허공에 떠 있다. 너는 허공에 뜬 채로 머리를 책에 파묻는다. 그러다 너의 팔과 다리, 몸이 전부 책 속에 들어가고, 너는 책 속 문장 사이의 여백으로 된 길을 따라 걷는다. 그곳은 몸을 벗어난 곳, 어떤 몸도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이다.
네가 열여섯이 되었을 때 너의 부모는 이혼한다. 너의 몸에 손을 대는 남자가 사라진다. 책의 세계 너머에 있던 너의 몸은 현실이라 불리는 세계로 돌아온다. 너는 놀란다. 사람들이... 세상이 사람들이 가득한데 모두 마음을 갖고 있다니 이상한 일이다. 누구일까,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한 명 한 명 마음을 달아놓은 이는? 그리고 이 사람들은 모두 죽는단 말이지? 마음을 가진 채로? 너는 죽음을 처음으로 깨닫고 눈물을 흘린다.
너는 깡마르고 아름다운 소녀가 된다. 너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집에서 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음식을 아주 적게 먹는다. 너는 매일‘죽음’이라고 불리는 기이한 사라짐을 애도한다. 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울음을 터뜨린다. 일 년 후 너의 엄마는 너를 깨달은 자가 머무는 선원에 보낼 것이다.
“나는 이쪽으로 갈 테니 여진 씨는 저쪽으로 가는 게 낫겠습니다.”라고 b가 말했다. 갈대숲은 두 갈래 길로 나뉘는데, 하나는 야자 섬유질로 만든 깔개가 깔려 있었고, 다른 쪽은 흙길이다. 나는 휴대전화의 손전등 기능을 켰다.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십 퍼센트 밖에 남지 않았지만, b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야자 섬유질로 만든 길 위에 펼쳐진 부들부들한 푸딩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b는 커다랗고 묵직한 빨간 손전등을 들고 다른 길로 갔다.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b에게 밤의 갈대숲은 평생이 걸려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인지도 모른다고. b에게 필요한 건 그런 장소라고. 사라진 것들을 애도하는 장소, 모든 사라짐이 머무는 장소.
b는 걸을 것이다. 단단한 어둠에 부딪치며 걸을 것이다. 숨을 헐떡이며 걸을 것이다. 어느 순간 갈대들의 키가 이층 빌딩처럼 높아질 것이다. 겹겹의 창살처럼 b를 가둘 것이다. 상관없다. b는 사라져서 사라진 것들과 머물 테니까. 그러나 b는 들을 것이다. 풀벌레 소리와 섞인 흐느낌을. 감옥에서 늙어서 죽은 수인의 유령이 창살 사이로 빠져나오듯, b는 길을 벗어나 갈대 사이로 들어갈 것이다. 뺨과 이마에 스치는 이슬과 맨팔에 닿는 부드러운 갈댓잎. b는 볼 것이다. 갑작스런 손전등 빛에 얼굴을 팔로 가린, 흰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b는 여자아이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 순간 구원받은 사람은 재희가 아니다.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서 나는 재희의 발견 소식을 듣지 못한다. 내가 듣는 것은 여러 종류의 풀벌레가 길거나 짧게 우는 소리, 갈대들이 술렁이는 소리, 어둠이 속삭이는 소리. 나는 우두커니 서 있다. 믿어지지 않게도, 나는 별똥별들이 떨어지는 걸 본다. 갈대 사이로 미끄러지는 무수한 별똥별들. 아, 나도 모르게 손바닥을 내민다. 내 손바닥은 하나의 별도 받아내지 못한다. 나는 중얼거린다. *순간아 멈추어라. 너는 너무 아름답구나.
*괴테 <파우스트>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