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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섬, 소설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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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재연 Oct 20. 2024

유령 룸메이드

육지, 소설

                   


  복도 끝에 룸메이드 유령이 있었어.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일월이었고 우리는 책상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핫초코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호텔 복도를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어. 흰색 치맛단 밑에는 다리가 없고, 앞치마 위에는 얼굴이 없어. 메이드복 안에는 먼지와 공허뿐이었어. 

  그럴 리가.

  언니가 웃었다.

  룸메이드들 사이에서 유령이 어쩌고 하는 얘길 얼핏 들은 거 같았어. 꼭대기 층에선 원래 유령이 나오는 걸까, 그래서 신입인 나를 골탕 먹이려고 복도 청소를 맡겼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

  그럼 도망가야지. 

  이상하지, 희끄무레한 유령에게 친밀감이 들었어. 유령은 나처럼 거대한 청소기를 밀고 있었거든. 무게도 없는 유령이 백오십 키로짜리 공업용 청소기를 끄는 게 얼마나 힘들겠어.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어.

  그래서?

  그쪽에서도 청소기를 끄고 내게 다가오더라.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는데 무서운 느낌은 아니었어. 가까이서 보니까 그냥 하얀 룸메이드복을 입은 뚱뚱한 아줌마였어.

  뭐야.

  엑스엑스라지 메이드복이 두 벌 뿐인데 세탁실에서 실수로 매트리스 커버와 함께 빨아서 하얗게 표백되었다고 했어. 말투는 느릿느릿하고 복도에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성량이 컸어. 다른 룸메이드들에게 말하니까, 새하얀 룸메이드복도 그렇고,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스르륵 사라져서 ‘유령 씨’라고 불린다고 했어.      

  유령 씨는 꼭대기층 담당이었다. 내가 호텔에서 일한지 한 달이 지나서야 유령 씨를 처음 만난 건, 유령 씨가 아침 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삼십분 일찍 일을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왜 일찍 와서 그러냐고 물으니까 유령 씨는 개 유치원 시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나도 아침 조회에 빠지고 싶다고, ‘고객은 언제나 옳다’라는 구호를 외치는 게 싫다고 하니까, 유령 씨는 자기는 입만 벙긋거렸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것도 너무 싫지 않아요?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점심시간에는 왜 안보이냐고 물으니, 유령 씨는 김밥을 싸온다고 말했다.

  나 왕따거든요.

  유령 씨가 웃으며 말했다. 더는 설명을 안해서 농담인가 했다. 그런데 정말이었다. 제일 힘든 스위트룸을 유령 씨 혼자 열다섯 개씩 치워야 했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남색 메이드복을 입은 룸메이드들은 아무도 유령 씨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나는 언니에게 유령 씨에 대해 말했다. 언니는 처음에는 다른 룸메이드들의 따돌림에 분개하다가, 나중에는 따돌림을 신경 쓰지 않는 유령 씨의 대담함에 호감을 느꼈다. 나도 유령 씨의 느릿느릿한 말투와 희미한 미소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쉬는 시간에 유령 씨가 있는 꼭대기층의 객실을 찾아다녔고, 나중에는 아예 유령 씨와 점심을 함께 먹었다. 유령 씨는 팔뚝만한 김밥을 내 것까지 두 줄 싸왔다. 나는 뻔뻔한 구석이 있어서 고맙다는 말만하고 그냥 먹었다. 

  내가 고맙죠. 말동무가 생겨서 좋은 걸요.

  유령 씨는 쉰이 넘었지만 내게 늘 존대말을 했다. 나는 스물아홉이고 룸메이드 중에 막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에서 일하며 늘 이것저것 알바를 병행했지만, 룸메이드 알바는 처음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호텔에서 일하는 것도 몸을 쓰는 것도 좋았다. 몸을 쓰다보면 마음을 덜 쓸 것 같았다. 


  유령 씨와는 어울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침에 탈의실에서 윤 여사가 말했을 때 나는 왜요, 라고 물었다. 

  그 사람은 배신자니까. 

  배신자. 나는 이 단어를 초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 들었다. 6학년 때 그 여자아이는 왜 더는 우리와 놀지 않았을까? 더 인기 많은 무리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단짝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긴 생머리의 예쁘장한, 그래서 같은 무리라는 게 자랑스러웠던 그 여자아이는 어느 날 스스로 혼자가 되는 걸 선택했다. 남아있는 다섯 명의 우리는 그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교실에서 혼자가 되는 것은 죽는 것과 비슷하니까. 우리는 이해하는 대신 미워했다. 그 아이를 배신자라고 불렀다. 공부를 좀 한다는 이유로 다른 아이를 무시한다고, 그래서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헐뜯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에도, 체육시간에도, 소풍 때도 꿋꿋이 혼자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중학생 때 <아더왕 이야기>를 읽다가 그 아이에게 어울리는 형용사를 찾았다. 용감하고 고결한. 내가 그 아이를 선망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누굴 배신했는데요?

  나는 물었다.

  모두를.

  윤 여사의 이야기는 이랬다. 십 년 전의 일이다. 유령 씨는 다른 지역의 같은 체인인 호텔에서 일했고, 그곳의 노조 위원장이었다. 파업이 일어나자 노조와 회사 사이의 긴장이 팽팽했다. 정권이 바뀌면 노조가 유리할 거란 전망이 있었다. 그런데 유령 씨가 사측의 회유를 받아 노조를 떠났다. 몰래 떠난 게 아니라, 천막 농성 중인 노조원들을 다 불러놓고 그 앞에서 발표했다. 이제 노조를 그만둔다고. 사람들이 끝까지 함께 하기로 하지 않았냐고 유령 씨의 가슴을 두드리는데도, 유령 씨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령 씨의 사직을 계기로 노조원들이 하나둘 빠져나갔고 결국 노조는 와해되었다. 나중에 유령 씨가 먼 지역의 다른 호텔에서 정규직으로 채용되었고 뒷돈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유령 씨의 어머니가 직장암에 걸려 수술비가 필요했다는 소문도 덧붙여졌다.

  하지만 십년 전 일이고 다른 호텔에서의 일이잖아요.

  나는 웅얼거리듯 말했다.

  가장 성공적으로 노조활동을 벌이던 지점이었거든. 거기가 무너져서 다른 지점들의 노조도 다 무너진 거야.

  윤 여사는 말했다. 

  유령 씨를 멀리해.     

  언니, 그게 정말 유령 씨 때문일까? 

  빨간색보다 주황색에 가깝고, 양배추와 어묵이 듬뿍 들어간 떡볶이를 먹으며 나는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는 채식주의자이고 언니가 만들어준 음식은 다 맛있다. 우리는 떡볶이에 들어간 떡보다 어묵을, 어묵보다 양배추를 좋아한다. 

  일이 고되고 힘든 거겠지. 그래서 괴롭힐 사람이 필요한 거 아닐까.

  언니가 떡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나는 휴지로 언니의 입가에 묻은 빨간 국물을 닦아주었다. 

  그걸 왜 유령 씨에게 풀어.  

  답이 없으니까. 언젠가 허리나 어깨가 망가질 걸 알면서도 계속 일해야 하고, 몸이 망가져도 산재 처리도 받지 못하고,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고 퇴직금도 받지 못하잖아. 다른 현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은 게 아닐까? 다른 현실이 손닿을 곳에 있었다고, 유령 씨가 아니었으면 가능했을 거라고.

  믿고 싶은 만큼 유령 씨를 미워하는 구나.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음이 든 사이다를 마셨다. 언니는 탄산음료를 마실 때 꼭 얼음을 넣는다. 

  악의란 건, 거대한 수레바퀴 같은 거야.

  언니가 말했다. 

  사람들이랑 누군가에 대해 욕할 때 그게 무의미하고 공허하게 느껴져도 계속 떠들게 되잖아. 내용은 점점 과장되고, 반복되고, 추측과 거짓말도 더해지고. 심지어 험담이 끝나고 혼자가 되었을 때에도 마음은 여전히 부산하지. 

  그런데?

  일단 악의의 수레바퀴가 구르기 시작하면 자체적으로 동력을 얻어. 그리고 길이 아닌 곳으로도 함부로 굴러가는 거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언니는 포크로 양배추를 찍어 야금야금 먹었다. 

  우린 누구를 멀리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수영아.         

  나는 언니랑 있는 게 좋아요. 싫어하는 게 아녜요.

  유령 씨에게 언니 얘기를 하며 나는 변명하듯 이 말을 덧붙였다. 우리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대만 사람들이 룸에 두고 간 쌀과자를 먹고 믹스 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예뻐서 어릴 때부터 내 자랑이었던 언니.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복지관에서 일하다가 일 년 만에 그만두고 방안에 틀어박힌 언니. 그렇게 서른셋이 될 때까지 엄마와 둘이 집에서만 지낸 언니. 나는 엄마에게 화를 냈다. 엄마가 다 해주니까 언니가 아무 것도 못하는 거라고. 다 엄마가 그렇게 만든 거라고. 엄마는 언니는 마음에 병이 있으니 이해하라고 말했다. 엄마가 작년에 암으로 죽은 후로 나와 함께 사는 언니. 

  죽을 때까지 언니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요. 

  내 얘기를 듣더니 유령 씨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를 길러요. 바닷가에서 주워서 이름은 바다예요. 

  유령 씨는 작은 김 조각들이 묻어있는 짭조름한 대만 쌀과자를 먹으며 말했다. 아작아작 씹는 소리가 경쾌했다. 룸메이드 일을 하면서 좋은 점은 손님이 남긴 외국 과자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날이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딱 두 달 되는 날이었어요. 바닷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는데, 웬 갈색 푸들이 와서 내 눈물을 다 핥아 먹더라고요. 내 슬픔을 먹어치우려는 것처럼요. 나는 개가 얼굴을 핥게 내버려 뒀어요. 그러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지더라고요.

  유령 씨는 개 주인을 찾으려고 인터넷에도 올리고 전단지도 붙였지만 찾을 수 없었다. 집에 혼자 두면 끙끙거리고 짖어서 늘 붙어 있어야 했다. 동물 병원 의사는 분리 불안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아마 전 주인이 오래 집 안에 방치했던 거 같다고, 그러다 개가 짖는다고 주위에서 항의를 하니까 버린 거 같다고 했다. 

  마침 집에서 직장으로 가는 길에 애견 유치원이 있었어요. 한 달 이십오 회, 여덟 시부터 여섯 시까지 맡아준다고 했어요. 그런데 가격이 칠십 만원이래요. 

  너무 비싸네요. 

  우리 어머니 치매 요양병원에 머무는 비용이 칠십 만원이었어요.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그 돈은 모으겠구나, 생각했는데 딱 그만치가 또 나가는 거예요. 

  바다는 몇 살이에요?

  네 살. 앞으로 별 탈 없으면 십 년은 더 살겠죠. 아마 나는 누군가를 돌볼 운명인가 봐요.

  유령 씨는 웃으며 말하고는 믹스 커피를 한잔 더 마셨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더라고요. 오십 넘은 여자가 결혼도 안하고 애도 없이 개나 키운다고.  

  유령 씨는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그런데 개 옆에 누워서 개털을 쓰다듬다 보면 다른 세상의 결이 느껴져요. 인간 세상이 전부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개 세상도 있고, 나무 세상도 있고, 어쩌면 외계인 세상도 있겠구나… 

  유령 씨는 눈을 감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인간들 사이에서 사랑받거나 미움 받는 일에만 눈이 팔렸을까.

  유령 씨는 코를 살짝 골며 잠들었다. 


  언니는 저녁으로 양파와 파를 듬뿍 넣은 두부고추장조림을 만들었다. 나는 밥 위에 조림을 얹어 먹으며 유령 씨의 개 이야기를 했다. 언니는 요양병원과 개 유치원의 비용이 같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인간 세상과 개 세상이 그렇게 이어지는구나, 라고 언니는 말했다.  

  언니는 오늘 어땠어?

  아무 기대 없이 물었다. 언니는 만나는 사람도 없고 다니는 곳은 도서관뿐이다. 검은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안경과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 언니는 무슨 책을 읽었는지 말해줬다. 사르트르니 보르헤스니 하는 어려운 이름들. 

  많이 읽었네. 

  재밌어.

  뭔가 아까워. 언니는 이렇게 똑똑한데. 

  도서관에서 책들을 공짜로 읽을 수 있는데 뭐가 아깝니. 읽지 않는 게 아까운 거지. 너도 예전엔 많이 읽었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녹초가 돼. 머리도 멍하고, 손목도 아파. 일기도 쓰지 못하는 걸. 전에는 매일 썼는데.

  누군가는 경제활동을 해야 하니까, 라고 덧붙이려다가 가시가 튀어 나올까봐 말하지 않았다. 언니도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멈춘 것 같았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려다가 하지 않은 말들 때문에 상처받았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언니가 감귤 주스를 두 잔 따랐다. 언니는 오렌지 주스는 싫어하지만 감귤 주스는 좋아한다.

  책 속의 인간관계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으니까 좋아. 독자로만 남을 수 있으니까. 

  언니가 주스를 마시다가 불쑥 말했다. 

  누구나 일인칭 시점으로 자기 삶에 뛰어들어야 해. 

  나는 가시를 없애려고 애쓰며 말했다. 

  티브이에서 스님들의 문무관 수행에 대한 다큐를 봤어. 

  언니가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뭔데?

  자신을 방에 감금시키고 몇 년이고 수행을 하는 거야. 나도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요즘 아침저녁으로 명상을 해. 호흡에 집중해서 하나, 둘, 셋… 열까지 세는 거야.   그리고 다시 하나로 돌아와. 

  나는 역시 밍밍한 감귤주스보다는 새콤한 오렌지 주스가 낫다고 생각했고, 조금 화가 났다. 


  나는 유령 씨에게 언니가 개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이었고 우리는 김밥을 먹었다. 나는 사원 식당에 더는 가지 않았다. 유령 씨와 어울리는 내게 여사님들은 조금 냉랭해졌지만 대놓고 괴롭히진 않았다.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냐고 묻는 룸메이드에게 나는 개 얘기를 한다고 했다. 점심으론 뭘 먹느냐고 물어서 맛있는 김밥을 먹는다고 했다. 유령 씨가 만든 오이와 계란만 들어있는 김밥은 무척 맛있었다. 때로는 오이와 참치만 들어있거나 오이와 햄만 들어있기도 했다. 단순한 맛이지만 오이가 들어있어서 싱그러웠고 마요네즈가 들어있어서 고소했다. 

  개라면 꼬리를 흔들거나 배를 뒤집고 눕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거예요. 왜 식비나 월세를 보태지 않고 하루 종일 노는 걸까, 원망하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 거예요. 언니가 사람이니까 계산을 하게 돼요.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왜 이만큼밖에 안 돌아오나. 

  어릴 때부터 언니가 남달랐나요?

  언니는 공부도 잘하고 예뻐서, 내성적인 성격인데도 인기가 많았어요. 좀 이상한 면은 있었어요. 

  나는 언니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어느 날 집에 왔는데 언니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놀라서 물으니까 언니는 중간고사 성적이 나왔다고 했다. 성적이 떨어졌냐고 물었는데 아니라고, 전교 3등을 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왜 우냐고 물으니 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험을 치는 게 싫어, 왜 어떤 애들은 성적 때문에 상처받고 스스로를 미워해야 하는 걸까? 나는 우리는 모두 다르게 태어났다고 말했다. 우리 집도 아버지가 없듯이 다들 상처가 있고, 누구든 못하는 게 있으면 잘하는 게 있다고. 게다가 전교 3등이면서 공부를 못하는 애들을 위해 우는 것은 우월감에 젖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다음 시험에서 언니는 형편없는 성적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시험을 일부러 망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때 언니가 그 극단적인 성격 때문에 힘든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죠.

  내가 유령 씨에게 언니 얘기를 자주 한 것은 유령 씨가 잘 들어줬기 때문이다. 한 번은 언니와 내가 부루마블을 했던 얘길 듣고 유령 씨가 언니답네요,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언니와 부루마블을 하면 열에 아홉은 내가 이겼다. 언니는 돈을 모으거나 이기는데 관심이 없었고, 새로운 도시에 집을 세우는 것만 좋아했다. 심지어 언니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우주 정거장’에 도착하면 늘 무인도를 골랐다. 무인도에 가게 되면 두 번을 쉬어야 하므로 게임에서 이기려면 피해야 하는 장소였다. 

  왜 무인도에 가는 거야?

  쉬고 싶어서. 야자수 아래에서 파도 소리도 듣고, 밤에는 별도 보고.  

  언니와 나는 옆집 자매와도 부루마블을 했는데, 할 때마다 꼭 우리가 졌다. 나는 씩씩거렸지만 언니는 웃으며 말했다. 

  누가 이기든, 누군가는 이기니까 상관없잖아.

  유령 씨는 이 말을 듣고 언니답다고 한 것이다. 나는 언니 얘기를 하는 척 하며 내 얘기도 많이 했다. 유령 씨는 내가 어떤 얘길 하든지 그건 좋다 나쁘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렇구나하고 들어줄 것 같았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춘기 때의 나는 인간에게 항문이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는 것. 그건 중학생 때 공원에서 노숙자가 엉덩이를 까고 똥을 싸는 장면을 본 다음부터였다.

  중학생 때 아더왕 이야기에 빠져 있었거든요. 잘생기고 진지한 기사들과 아름다운 귀부인이 나오는 옛날이야기요. 저는 기사들에 둘러싸인 귀부인이 된 망상에 젖곤 했어요. 그러다가도 기사들과 귀부인들도 항문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모두 밥을 먹고 배설하지요. 

  유령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을 고결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항문 주름에 의해 상쇄되는 것 같았어요. 상상해 보세요. 아더왕의 항문, 귀네비어의 항문, 란슬롯의 항문… 그들도 공원의 노숙자들처럼 쭈그리고 앉아 똥을 싸겠죠?

  고결한 인간도 추한 부분을 갖고 있다는 게 수영 씨에겐 견딜 수 없는 모순이었군요.

  게다가 언니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더니 갑자기 돈키호테에 빠졌어요. 식사시간에도 돈키호테를 읽어서 엄마한테 혼나곤 했으니까요. 

  그런데요? 

  돈키호테도 기사였어요. 그리고 항문과 어울렸어요. 엉덩이를 까고 똥을 눠도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어요. 그게 제겐 돈키호테가 카멜롯의 기사들보다 진실하다는, 언니가 나보다 더 세상을 정확하게 읽는다는 증거로 느껴졌어요. 

  유령 씨는 개 이야기를 했다. 바다가 요즘 밖에서 똥을 잘 안눈다고. 똥을 누면 집에 곧 돌아간다는 걸 눈치채서 빙빙 돌며 시간을 끈다고 했다. 그래서 개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똥을 누는 모습이 정말 사랑스럽다고 했다. 

  유령 씨는 개와 산책하다가 매번 공원에서 마주치는 할머니 얘기도 했다. 할머니는 배의 조타핸들처럼 생긴 체력 기구를 빙빙 돌리면서, 유령 씨와 마주칠 때마다 개들은 나를 다 좋아해, 라고 말한다. 

  바다는 사람이면 다 좋아하는 개거든요. 그래도 내가 그러네요, 바다가 할머니를 무척 따르네요, 하고 맞장구를 치면 할머니가 그렇지? 하고 무척 흐뭇해해요. 내 사촌동생이 개를 키우거든, 그래서 개들이 나를 좋아하나 봐, 라고 말씀하시는데, 사촌동생이 개를 키우는 게 무슨 상관인지. 

  유령 씨는 웃었다. 

  사촌 동생 분이 종종 개를 데리고 만나서, 할머니한테도 개 냄새가 난다는 뜻 아닐까요?

  어느 날은 할머니가 잔꽃무늬 치마를 입은 다른 할머니랑 같이 벤치에 앉아 있었어요. 그런데 다른 할머니가 나랑 바다를 번갈아 보더니, 정말 그렇네, 개랑 주인이랑 눈이 똑 닮았네, 그러는 거예요. 그 말에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집에 돌아가 나는 이 이야기를 언니에게 들려줬다.

  개 키우고 싶다.

  언니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슨 개가 좋을까? 푸들이나 말티즈?

  내가 물었다. 

  나는 대형견. 골든 리트리버. 

  큰 개면 똥도 클 텐데.

  그래도 좋아. 내가 사랑하는 생명체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컸으면 좋겠어. 

  언니와 나는 마당 있는 집이 좋겠다, 아침저녁으로 꼭 산책을 시키자, 그런 얘기도 했다. 우리는 개를 산책시키는 셈치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밤 아홉시가 넘은 시간이어서 골목길이 어두컴컴했다.  


  오월에 유령 씨의 개가 죽었다. 사흘을 쉬고 나타난 유령 씨의 눈 밑은 퀭하고, 피부는 더 창백해졌다. 교통사고라고 했다. 낮게 나는 제비를 보고 흥분한 바다는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었다. 차에 치어 하반신이 으스러져 고통에 허덕이는 바다를, 동물병원 의사는 안락사 시키자고 했다. 뼛가루는 바다에 뿌렸다고 유령 씨가 담담하게 말했다. 

  바다가 죽었다는 얘길 듣고 언니는 울었다. 서점에 다녀오더니 유령 씨에게 책을 전해달라고 했다. 갈색 푸들이 주인공인, 일본 사람이 그린 수채화풍의 동화책이었다. 유령 씨는책 표지에 그려진 갈색 푸들을 살살 쓰다듬었다. 

  고맙다고, 위로가 됐다고 전해주세요. 

  유령 씨는 오랫동안 동화책을 어루만지더니 뒤쪽을 펼치고 천천히 읽었다. 내가 왜 뒤부터 읽느냐고 물으니까 유령 씨는 결말부터 읽는 게 좋다고 했다. 

  혹시 슬픈 얘기면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도 있고요.  

  다음 날에도 유령 씨는 푸들이 나오는 동화책을 가져왔다. 읽는 것도 아니면서 옆에 두고 침대에 누웠다. 나도 같은 침대에 누워서 언니가 예전에 복지관을 그만둔 이야기를 했다. 언니가 일하는 복지관 근처의 임대 아파트에서 다섯 살짜리 남자애가 죽은 일이 있었다고. 아이의 엄마는 애인과 여행을 갔고, 보름 넘게 방치된 아이는 쓰레기 집에서 굶어죽었다. 아이는 엄마를 따라 복지관에 온 적이 있어서 언니는 그 아이를 기억했다. 엄마가 왜 이번에는 김치를 안주냐고 소리 지를 때, 그 남자아이는 어두운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언니는 그 남자아이가 자주 꿈에 나타난다고 했다. 

  언니는 불면증 때문에 신경과에 갔다가 우울증 진단을 받았어요. 그리고 복지관을 그만뒀어요. 엄마는 언니가 그 아이의 죽음 때문에 우울증에 걸렸다고 말했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언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우울증이었던 것 같아요. 

  어쩌면 언니는 이 세상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바라본 걸지도 몰라요.   

  유령 씨는 천장을 향해 말했다. 

  너무 예민해서 이 세상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았던 거겠죠. 

  우리는 누운 채로 거봉을 먹었다. 유령 씨와 먹으라고 언니가 싸준 것이다. 거봉은 크고 달았다.       

  유월 말에는 고깃집에서 회식이 있었다. 서른 명 남짓한 룸메이드 모두가 참석해야 하는 회식이었다. 관리팀에서 두 명이 참석했고 이날은 유령 씨도 불렀다. 강 부장이 자기 무릎을 툭툭 치며 우리 여사님 중 한 명이 여기 앉아 봐, 할 때까지는 억지스럽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룸메이드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에이 재미없게 왜 이래… 거기 김 여사님. 

  이 대리가 김 여사에게 손짓을 했다. 사십대 초반이라 젊은 편이고 숫기가 없는 김 여사는 아마 그런 자리에서 강부장의 옆에 앉는 역할을 도맡아했던 것 같다. 김 여사는 웃는 건지 체념한 건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명치가 조이고 속이 울렁거렸다. 

  그때 강 부장의 옆옆자리였던 유령 씨가 벌떡 일어나더니, 강 부장의 무릎에 앉았다. 팔십 키로도 넘는 자신의 무게를 모두 실어서. 

  응? 여사님 무겁네. 

  강 부장이 웃으며 말했다. 

  부장님 인기가 하늘을 치솟습니다. 

  이 대리가 농담을 했다. 

  난 아담사이즈 언니가 좋아. 여사님? 저기 이 대리에게 가.

  저도 사양입니다. 

  둘이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유령 씨는 무표정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룸메이드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마주쳤다. 어떤 룸메이드들은 그 눈빛을 정신 차리세요 지금 뭐하나요, 라고 읽었고 또 다른 룸메이드들은 내가 지켜줄게요, 라고 읽었다. 강 부장은 점점 표정이 나빠지더니 나중엔 비키라고 소릴 지르며 유령 씨를 밀쳤다. 강 부장은 벌건 얼굴로 떠났고 회식은 흐지부지 끝났다.

  집에 가자 언니는 내 서성거리는 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언니는 내가 좋아하는 토토로 잔에 담아서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내왔다. 잔 속에서 토토로가 커다란 연잎을 들고 여자애들이 비를 맞지 않게 가려주고 있었다. 

  진하고 맛없어.  

  그래도 마셔.

  책상 겸 식탁에 앉아 우리는 캐모마일 차를 마셨다. 나는 유령 씨와 강 부장 얘기를 했고 전에 내가 했던 얘기도 또 했다. 연극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오늘은 네가 내 짝꿍이야. 

  그 남자는 그렇게 말했고 내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한 쪽 가슴을 주물렀다. 내가 상처받은 것은 그 손길 때문일까 아니면 그 손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하는 극단사람들 때문일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구는 게 팬터마임이라면 있는 걸 없는 것처럼 구는 걸 뭐라고 부르나. 나는 두 번 지워졌다. 나를 만지는 손과 그걸 모른 척 하는 눈들에 의해. 

  연극을 그만둔 후에도 나는 그 원로 배우의 이름을 주기적으로 검색했다. 그는 자신의 극단 배우들과 함께 양로원과 고아원에서 무료로 연극을 보여줬고, 노숙자들에게 연극을 가르쳐서 <갈매기의 꿈>을 공연했다. 어느 노숙자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엔 우리를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들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고, 심지어는 종이박스로 만든 집에서 하룻밤을 자기도 했어요. 선생님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었죠.

  나는 진정성이라는 단어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는 분명 진심일 것이다. 진심으로 노숙자, 고아, 노인을 걱정할 것이다.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입에 담을 것이다. 나한테 잘 보이면 여러모로 유리할 거야.

  수영아, 그 일은 이미 지난 일이야.

  언니는 말했다.

  나는 울면서 내가 미워했던 것은 무엇보다 나 자신의 연약함이라고 말했다. 나는 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을까. 처음에 무릎을 어루만지던 손이 허벅지로 올라가기 전에 그는 내 반응을 살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왜냐면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유령 씨는, 분위기를 깨는 걸, 혼자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어.

  나는 울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수영아, 그 일은 네 잘못이 아니야. 이미 지난 일이야.

  언니는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전기 주전자를 기울여 끓는 물을 캐모마일 티백 위에 부었다. 두 번째로 우린 차는 은은하고 맛있었다. 


  강 부장이 어디 변할 사람이야? 유령 씨는 왜 유난이야.

  다음날 아침 탈의실에서 그렇게 말한 룸메이드는 윤 여사였다. 

  그래도 통쾌하긴 했어요.

  누군가 중얼거렸다. 

  어깨가 너무 아파.

  옷을 갈아입느라 팔을 들다가 이렇게 외치며 주저앉은 룸메이드는 육십 대 중반의 김 여사였다. 김 여사는 병원에 가야겠다며 퇴근했다. 아침 조회 시간에 관리팀의 이 대리는 전날 회식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앞으로 휴식시간에 손님의 빈 객실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호텔 사장의 딸이 지나가다 룸메이드가 침대에 누워 쉬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사장의 딸은 지배인을 불러 호텔의 품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럼 어디서 쉬나요?

  윤 여사가 물었다.

  탕비실에서 쉬세요.

  이 대리는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룸메이드들은 웅성거리고 언짢아했지만 휴식시간엔 모두 탕비실로 갔다. 탕비실은 모든 쾌적함과 편안함, 품위를 호텔방에 남김없이 빼앗긴 장소였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시멘트벽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고, 창문도 없었다. 귀퉁이에는 하얀 변기가 어떤 차단막도 없이 솟아 있었다. 여름엔 더웠고 겨울엔 추웠다. 비품들 때문에 늘 먼지가 날렸다. 룸메이드들은 일회용 샴푸, 비누, 칫솔과 함께 상자 안에 담기거나 아니면 베갯잇, 이불, 매트리스 커버와 함께 차곡차곡 접혀 있는 수밖에 없었다. 탕비실은 그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 물건이 되는 것을 요구했다.     

  우리는 물건이 아니니까.

  시월의 어느 아침에 탈의실에서 윤 여사가 말했다.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쳤다. 탕비실에 에어컨과 히터를 설치해달라는 요구는 묵살되었다. 김 여사는 어깨의 석회제거 수술을 받았고, 이십년 동안 일한 호텔을 그만뒀지만 산재 처리는커녕 퇴직금도 못 받았다. 호텔은 추가시급을 줘야하는 잔업을 없애려고 룸메이드들을 더 많이 고용했고 무급 휴가를 남용했다.  

  우리는 뭔가를 해야 돼.

  윤 여사가 다시 말했다.

  뭘?

  누군가 물었다. 

  대항을.

  어떻게?

  노조를 만들어야 해. 

  룸메이드들은 웅성거렸다.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고 동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누가 우리를 이끌어야 할까? 누가 노조 위원장이 되어야 할까? 호텔에 오래 일한 룸메이드들이 말했다. 그 사람이지. 그 사람밖에 없지. 

  하지만 그 사람은 배신자잖아요.

  내가 말했다. 

  룸메이드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한 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군가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인내심 있는 어조로 말했다.

  너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나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세상을 상대로 얻는 쪽에 속해본 적이 없는 이 중년 여자들은 그 사람이 무엇을 이루었냐가 아니라 무엇을 잃었는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 상실을 어떻게 다루는지도 보았다. 

  하지 말아요. 왕따 시킬 때는 언제고… 

  김밥을 먹으며 나는 심통이 나서 유령 씨에게 말했다. 유령 씨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도대체 왜 험한 길로 가냐고 물었다. 

  내가 할 일이니까요.

  유령 씨는 싱긋 웃었다. 

  그렇게 말했을 거야.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니까.  

  유령 씨가 노조 위원장이 되었다는 얘기를 전하자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내가 어릴 때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 해소된 것 같아.

  그게 뭔데? 

  사람들이 어떻게 항문을 가진 채로 전설이 되는가.      

  유령 씨는 아침에 탈의실에 나타나 룸메이드들에게 노조 가입서를 돌렸다. 룸메이드들의 절반은 그 자리에서 가입을 했고 나머지도 집에 가서 생각해보겠다며 종이를 챙겼다. 나도 한 장 챙겼지만 그 주에 호텔을 그만뒀다. 손목이 너무 시큰거려서 병원에 갔더니 힘줄에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어쩌면 유령 씨가 실패하는 모습을 보는 게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작은 관광호텔의 프론트 일자리를 얻었다. 월급은 적었지만 근무 시간에 책을 읽거나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릴 수도 있었다. 룸메이드를 그만둔 후에는 유령 씨와 만나지 않았다. 

  언니도 서점 알바를 시작했다. 테이블이 세 개 놓여 있어서 커피도 마실 수 있는, 북 카페를 겸한 곳이었다. 책과 가까운 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활비를 보태겠다고 언니가 말했을 때 나는 감격했다. 언니는 말했다.  

  무아경을 읽는데 이런 구절이 있었어. 보살은 모든 것이 고통인줄 알면서도 삶에 뛰어든다. 유령 씨가 생각나더라. 

  언니는 서점에서 일한지 한 달도 안돼서 사장으로부터 그만두라는 말을 들었다. 손님이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테이블 아래서 먼지가 풀풀 날리게 빗자루 질을 한다며, 눈치가 없다고 했다. 언니는 보름 정도 울적해하다가 태국 요리점에 취업했다. 태국 전통 의상을 입고 서빙을 하는 곳이다. 언니는 그곳에서 반 년 가까이 일했다. 내게 팟타이와 똠양꿍도 만들어줬다. ‘쏙’이라는 태국 여자와 친해져서 태국어를 공부하더니, 쏙이 고향인 치앙마이로 돌아간 후에는 그녀를 방문하러 혼자 태국에 갔다. 

  카톡으로 보내준 사진 속에서 언니는 커다란 냄비 앞에서 팟타이를 볶고 있었다. 쏙의 집에서 팟타이 가게를 해서, 언니도 하루 네 시간씩 돕는다고 했다. 석 달 후에 보낸 사진에서 언니는 위아래가 하얀 옷을 입고 미얀마의 명상센터에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스님이 될 거야〕

  언니가 보낸 카톡을 읽고 나는 토끼가 엄지를 들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나는 흰 셔츠를 입고 관광호텔의 데스크에 앉아있었다.  

  〔좋은 생각이야〕   

  〔너는 뭐가 하고 싶어?〕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어떤 글을 쓰고 싶어?〕

  〔사람들에게 내가 해석하고 편집하고 상상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 그래서 사람들을 자신이 아닌 타인들과 세상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게 하고 싶어〕 

  〔너는 그걸 잘하잖아〕 

  언니는 잘하잖아, 라고 했다. 잘할 거야, 가 아니라. 그때 운동복을 입은 젊은 흑인이 회전문을 통해 들어왔다. 국제 마라톤 기간이라 손님 중에 외국인이 많았다. 나는 컴퓨터로 예약을 확인하고 그에게 카드키를 내줬다. 마이클은 땡큐, 하고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희곡을 쓰고 싶어. 그런데 그 전에 써야할 글이 있어〕

  〔뭔데?〕

  〔그 원로배우에 대한 폭로글을 트위터에 올릴 거야〕  

  〔네가 힘들지 않을까?〕

  〔내가 할 일이니까〕 

  언니는 복숭아가 양팔을 벌리고 환호하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언니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며칠 전에 역 근처에서 나는 우연히 유령 씨를 만났다. 나는 서점에 들렀다 나오는 길이었다. 유령 씨는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십이월이라서 둘 다 패딩 차림이었고 말할 때마다 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유령 씨는 일 년 만에 만난 사람이 아니라 마치 며칠 전 만났던 사람처럼 내게 물었다. 

  시간 되면 점심 같이 할까요? 메로 지리가 맛있는 횟집이 근처에 있어요. 

  나는 그래요 그럼, 하고 유령 씨를 따라갔다. 횟집은 대나무 장식이 많아서 좋았다. 플라스틱인줄 알았는데 진짜 대나무라고 했다. 손님은 어떤 아저씨 한명 뿐이었는데 매운탕을 안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메로 지리는 금방 나왔다. 뚝배기 속에 흰 국물이 펄펄 끓었고 생선과 미나리가 들어 있었다. 생선살이 적다고 생각하는데 유령 씨가 말했다.

  이 정도면 많이 들어간 거예요.

  아. 

  메로가 비싸거든요.

  메로는 처음이에요.

  이름은 예쁘고 생긴 건 못생긴 생선이에요. 

  유령 씨는 자신의 뚝배기에서 생선 한 덩이를 떠서 내 뚝배기에 넣었다. 나는 미안하다든가 사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메로 살은 부드럽고 미나리는 향긋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나는 손가락으로 유령 씨의 캐리어를 가리켰다. 

  다른 지역의 호텔이요. 거기서도 노조가 만들어지려고 해요. 

  유령 씨는 미역 초무침에 젓가락을 내밀었다. 밑반찬이 괜찮았다. 지우개 크기의 두부조림과 달콤한 계란말이도 있었다. 

  언니는 잘 지내요?

  나는 언니가 해외로 나간 얘기를 했는데 유령 씨는 놀라지 않았다.

  언니가 세상으로 나간 덕분에 나도 노조 위원장을 맡을 수 있었죠. 

  시간 순서를 헷갈리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다. 

  헷갈린 게 아녜요. 언젠가 수영 씨의 언니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용기에 기댔어요. 마치 글을 쓰는 사람이 언젠가 책장을 넘길 독자의 손길을 상상하며 힘을 얻는 것처럼요. 

  유령 씨의 낮고 상냥한 목소리를 듣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트위터에 그 원로배우에 대한 글을 올려야겠다고. 그래도 된다고. 나는 말했다.  

  날도 추운데 뜨끈한 게 배에 들어가니 참 좋네요. 

  그래요. 참 좋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금방 또 만날 사람처럼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나는 유령 씨와 역 앞에서 만나 메로 지리를 먹은 이야기를 아껴놨다가 언젠가 들려줄 것이다. 머리를 파릇하게 깎은 언니에게. 어느 절의 만개한 벚꽃 나무 아래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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