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미워하게 해줘서, 고마워
-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 "봄이나 가을이 좋아. 여름과 겨울 중 굳이 골라야 한다면... 여름."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만큼이나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를 서로는 궁금해한다. 봄과 가을이 좋은 이유는 하루의 시작점과 마침표 사이가 어떤 멈춤도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까닭이다. 겨울보다 여름이 나은 건, 티셔츠와 등 사이에 맺혀 흐르는 땀방울은 허락해도, 서늘한 공기 속에서는 하염없이 그 자리에 멈춰 선 눈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내게 계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저 살만한가 아닌가라는 사실 뿐이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 안 더운 것 같아."
하루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몰랐다. 방전 된 에어컨 리모컨을 들고 극한의 공포를 느끼게 될 줄은.
건전지를 찾아 낯선 서랍을 여닫으며 완전한 여름이 오고야 말았다며 헉헉거렸다.
'띠리링'
에어켠 전원이 켜지는 경쾌한 소리는 마치, "여름에 온 걸 환영해."라고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베개가 다 젖도록 울던 밤이 떠올랐다. 루푸스 신염과 간경화를 동시에 진단받았던 한 겨울. 이 겨울이 끝나지 않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왔다. 여름이.
물로 가득 찬 배로 헐렁한 원피스만 입던 내가, 이젠 무슨 색 반바지를 입을지 고민하며 옷장 앞을 서성인다. 엑스라지 사이즈의 하늘색 고무줄 반바지는 눈부셨다.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여름을 좋아할 만한 이유에 대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어 젖히고 네모나게 썰린 수박 한 조각을 베어무는 순간.
저녁 7시가 되어도 어떤 조급함도 들지 않는 다정한 낮의 오후를 선물받는 순간.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낮잠을 자는 순간.
창문을 열고 손을 뻗으면 잎에 파묻힐 듯, 초록나무들이 가득한 도로를 내달리는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대화하는 계절이라서. 좋아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나는 끄덕였다.
"배가 왜이렇게 많이 나왔어!"
복수로 볼록해진 배를 숨기고 싶은 마음도 모른 채, 용이는 원피스 자락 위를 동네 북마냥 두들겨댔다.
"뱃살 아니라고..." 억울함과 얄미움이 뒤엉킨 마음으로 부풀어오른 배를 두 팔로 가려 안았다.
6개월이라는 시간.
용이를 미워하는 시간으로 보냈기에 겨울을 지나올 수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었다. '뱃살 아니냐고, 밥 많이 먹어서 그런거 아니냐'는 장난스런 핀잔이 가득했던 까닭에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 했던 시간들은 온통 용이를 미워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장난스런 말에 웃고, 화내고, 토라지며 나는 긴 겨울을 살아냈다. 이제 배가 많이 들어갔다며, 누구보다 기뻐해주는 용이의 미소를 보자, 나는 눈물이 났다. '잘 이겨낼 거라고 믿었어, 수고했어.' 라고 말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으니까.
수박 그만 먹으라는 잔소리가 방 안에서 울려퍼질 때마다 우리의 여름 추억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여름을 좋아하게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