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진 않아도, 단단한 하루
삼 개월 전.
암과 면역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삼 주간 입원을 했다. 대학병원과는 달리 식사시간이 기다려지곤 했다. 아침 식판엔 두유나 고구마와 같은 간식거리도 나왔고, 항상 숭늉이 국그릇과 나란히 놓여있었다. 입맛이 없는 날에는 맹숭맹숭 뜨거운 숭늉 한 수저를 삼키면, 어느샌가 그릇이 비워졌다. 사라져 버린 누룽지가 아쉬운 날엔 밥을 두 숟갈 떠서 말아먹곤 했다.
무료한 시간에는 카카오 톡딜을 들어간다. 당장 필요한 건 없어도 어떤 할인 상품이 있는지 둘러본다. 그러다 '누룽지 1+1, 9,900원'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그때, 참 맛있었는데... 집에서 해 먹어 볼까?"
부담 없는 가격에 망설임 없는 손으로 결제 버튼을 눌렀다.
이틀 뒤, 도착한 커다란 지퍼비닐팩.
투명한 표지 뒤로 조각조각난 누룽지가 보였다. 냄비에 물 두 컵을 붓고선, 으스러진 누룽지를 한 움큼 집어넣었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노란색 누룽지가 하얗게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십 분간 끓였더니 마치 흰 죽처럼 변했다. 작은 밥공기에 옮기고선,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뜨거움이 입안에서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편안했다.
늦잠을 자서 약 복용 시간이 지나버렸을 때는 빠르게 무언가로 속을 채워야 한다. 그때, 누룽지는 내게 치트키가 됐다. 야금야금 열리던 지퍼백 두 봉지는 어느샌가 한 줌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이젠 없어서는 안 될 반찬이 된 누룽지를 다시 주문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카카오 톡딜을 눌렀다가, 초록색 바탕에 N이 새겨진 어플로 손을 옮겼다.
"누룽지 파는 곳이 엄청 많네."
고품종 쌀... 두 번 구운 누룽지... 가마솥 누룽지...
"한 봉지에 2만 원...? 누룽지일 뿐이잖아!"
주식처럼 먹는 누룽지인 만큼 실망하더라도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피어올랐다. 네 배가 넘는 가격에 한참을 고민하다 누룽지로써 대상을 받았다는 왕관 쓴 누룽지를 주문했다. 특별한 기대보단 별다를 것 없는 맛에 실망하지 말자는 다짐을 가진 채로.
이틀 뒤 도착한 택배박스.
노란 빛깔과 갈색빛깔이 어우러진 누룽지는 두 번 구워진 내 모습을 보라고 말을 거는 듯했다. 부서진 조각은 한 줌정도뿐이었다. 네모나고 단단한 누룽지가 겹쳐져 있었다. 가지런함을 보자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겨났다. 냄비에 물을 붓고 커다란 누룽지를 뚝뚝 부러뜨려 넣었다. 빨리 먹어보고 싶은 마음에 국자를 들고 누룽지를 꾹꾹 눌러 한 알 한 알 떨어뜨려 놓았다. 갈색빛이 하얀빛으로 변하는 순간, 불을 껐다. 냄비 손잡이를 잡아 들고선, 작은 그릇에 부어 넣었다.
수저에 한가득 퍼서는 입에 넣었다. 오래 끓이지 않아 쌀이 다 부풀지 않았음에도 식감이 부드러웠다. 처음 함께했던 누룽지는 죽처럼 퍼지거나, 딱딱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왕관 누룽지는 달랐다. 마치 돌솥밥을 먹고 난 후, 숭늉을 만들어먹었을 때 그 맛이었다. 부엌의 공기를 휘감았던 구운 냄새가 입안으로도 찾아왔다.
"안 샀으면 어쩔뻔했어! 너무 다르잖아!"
화려한 음식은 복잡한 요리과정을 거쳐 식탁에 오른다. 큰돈을 지불하고 대단한 맛을 기대한다.
단순한 음식에는 큰 비용을 내기에는 돈이 아깝고,
별다른 과정이나 특별한 재료가 없을 거라 여기고,
맛도 거기서 거기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하기에 복잡해지고 까다로워진다.
너무 단순해서 그 하나가 전부가 된다.
인생도 그렇다. 단순하고, 반복되는 일상들.
매일 먹는 밥상 위에 좋아하는 그릇을 올리는 것.
매일 마시는 커피를 좋아하는 텀블러에 담는 것.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다정함을 보내는 것.
단순함과 평범함 속에 나의 취향 그리고 진심을 곁들이면 화려하진 않아도, 단단한 하루가 된다.
며칠 되지 않는 특별한 날을 위해서만 나의 재료를 쓰지 말자.
"오늘 저녁엔, 민트색 스트라이프 밥공기에 누룽지를 담아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