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꽃이 피지 않는 나무

피지 않아도, 나무는 나무니까

by 이루고


아파트 단지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한 나무만 빼고.


모두들 이미 봄이라는 무대에 오른 뒤, 초록 녹음의 피날레를 걷고 있는데, 혼자만 여전히 무대 뒤에 서있다. 겨울 모습 그대로, 앙상한 나뭇가지만 덩그러니 남긴 채. 그 나무를 어제도 봤고, 그제도 봤는데 오늘은 문득 바라보다 눈물이 흘렀다.


봄이 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저마다 벚꽃을 피우고,

벚꽃 잎을 바람에 흩날리며 떨어뜨리고,

초록 새순을 틔워내고 있는데,

혼자서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듯.

이젠 나무로써의 삶을 다한 듯.

지쳐 보였고 외로워 보였다.




꼭 나 같았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홀로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 제 역할을 다해가고 있는 내 간과 신장처럼

그 나무도 제 몫을 다한 듯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지쳐가는 그 나무가

나를 닮아 있었다.




알고 보니, 작년 겨울 가지치기를 당했단다.

벚나무는 겨울이 되면 다음 해에 피울 꽃눈을 미리 만들어 놓는데 꽃눈이 있는 가지까지 모두 잘라낸 탓에 꽃을 피우지 못한 거였다.


나무가 '나는 죽어버렸구나' 하고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지, 올해 꽃을 피우지 못했을 뿐. 다음 해에는 꽃을 피우게 될 거란 걸 말해주고 싶다.


"조금 늦을 뿐이야. 넌 다시 피어날 거야."

"지금은 긴 겨울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야."

"다른 나무보다 조금 늦게, 조금 다른 순서로 계절을 맞이하고 있을 뿐이야."




네 잘못이 아니야.

지금 모든 일이 너 때문이 아니야.

그저 그런 계절을 지나고 있는 것뿐이야.


누구보다 잘 버티고 있어.

누구보다 애쓰고 있다는 거 알아.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마.


살아있어 줘서 고마워.

그거면 충분해.



'너의 봄은 반드시 찾아올 거야, 아주 예쁜 꽃을 피우며.'



keyword
월, 수, 금 연재
이전 02화별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