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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Dec 30. 2019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몸집을 부풀릴 필요없는데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강하다. 손절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1순위는 내로남불이고 2순위는 속물근성이다. 자기 기준 없이 주변 눈치 보면서 '우리 나이는 이 정도는 해야 된다'라는 말도 싫어한다. 하지만 이 말의 속 뜻은 '이렇게 해야 다른 사람들이 무시하지 않는다'가 아닐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어떠한 사회적 그룹에서 무시받지 않는 일은 중요하다. 어릴 때 무시받지 않으려면 공부를 해야 했다. 크면서는 돈이 필요했다. 남들 못지 않은 집과 차와 백과 옷이 필요하다.

손절 1순위였던 속물근성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그동안 고고하게 잘난척한 점이 부끄러워졌다.


"받아요. 20대는 돈이 없잖아요. 그런데도 사회초년생들이 왜 무리해서 명품백을 사는지 알아요? 가진게 많을땐 감춰야하고, 가진게 없을땐 과시해야 되거든요. 엘리는 직급도 경험도 아무것도 가진게 없잖아요. 그럴땐 몸집을 부풀려야 하는거에요. 나도 이런 세상이 아니었음 좋겠는데 세상이 그래요. 투쟁할 수 없으면 타협해요. 그리고 이런세상 만드는데 내가 어른으로써 가담한것 같아 미안해요."


드라마의 명대사다. 명대사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앵무새도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몸집부풀리기이다. 작은 몸에 바람을 빵빵하게 넣어서 최대한 커보이게 만든다. 여기서 좀 더 화가 나면 날개를 펼친다. 날개를 펼쳐 자신을 크게 보이게해서 상대를 위협한다.


정글이 따로 없는 사회생활에서도 몸집을 부풀려야 살아남을 수 있다. 속물근성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면서부터 속으로 셈을 하기 시작했다. '네가 이 정도해줬으니 나도 이 정도만 할게'라며 속삭였다. 그에 맞지 않으면 눈치를 주고 따돌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그러고 있었다. 행복해하는 그 사람보다 내 팍팍한 지갑사정이 먼저였다. 나는 그렇게 얄밉게 굴었는데, 그 사람이 아무 계산 없이 나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볼 때 쥐구멍으로 들어가고싶었다.


어제는 마트에 가서 딱 내가 필요한 것만 샀다. 이거 사서 가면 그 사람이 좋아할텐데라고 생각했지만 모른척해버렸다. 근데 그 사람은 낮에 마트에 갔다가 내가 좋아하는 과자가 보여서 사왔다고 내밀었다. 따뜻하게도 해주고 안아줬다. 괜히 미안해서 툴툴거리기만 했다.


아직도 학생인 나와 연애하면서 힘들만도 한데, 군대 뒷바라지하는 기분이 이런 기분일 것 같다라며 묵묵하게 해준다. 나는 공부하느라 연락도 많이 못하고, 알바해서 쓰느라 기념일도 제대로 못 챙긴다. 그러면서 그 사람이 해주는 거는 잘 받아먹는다. 도시락도 싸주고 선물도 해준다.


그러면서 내가 취업을 하게 되면 벌어질 그와 나의 격차에 대해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나보다 나이도 있고, 수입도 내가 앞지르겠네. 우리가 언제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못된 생각도 한다. '부족한 부분 없는 이 사람이 아직 부족한 거 많은 나를 왜 만날까'라고 생각해서 쓸데없이 추궁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넉넉한 품으로 안아준다. 내가 한 못된 생각을 고백해도 '괜찮다. 내가 더 노력할게'라는 이상한 말을 한다. 못된 생각을 한 내가 잘못했는데 자기가 사과를 한다. 넉넉한 품에 안겨있다보면 못된 생각이 사라진다. 이 사람 옆에 있으면 잔뜩 부풀렸던 털을 내려 본래 모습으로 돌아와 펑퍼짐하게 앉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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