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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Dec 29. 2018

1.27살에 다시 공부하신다고요?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습니다 #1

초등학교 때부터 하고싶은 일이 많았다. 어제는 호텔리어, 오늘은 변호사, 내일은 선생님처럼 매일 꿈이 바뀌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생활기록부를 보면 꿈이 무려 10번이나 바뀐 것을 볼 수 있다. 꿈이 바뀌는 이유는 다양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결정하기도 했고, 주변 사람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 중 바뀌지 않는 건 한 가지가 있다면 글이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 글을 쓰는 일은 오랜 습관이었다. 그거 하나 믿고 국문과에 진학했다. 고3의 꿈은 광고인이다. <광고천재 이제석>이라는 책에 감명받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이제석이 있는 서울로 대학을 갔다. 이제석 연구소는 홍대에 있었는데,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덕분에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에 유행했던 것은 ‘열정’이었다.


대외활동과 공모전을 통해 구글에 들어간 김태원의 책이 베스트셀러였다. 구글러는 대학생들의 롤모델이었다. 열정을 다해 대외활동과 공모전을 했다. 밤을 얼마나 샜는지 모른다. 열정을 다하는 삶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해지는 삶이었다.


대외활동을 통해 느낀 한 가지는 광고에 재능이 없다는 점이었다. 글로 다시 돌아가게 됐다. 아르바이트로 하던 기자에 인연이 닿았다.


세상에는 좋아하는 일보다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라는 명언이 있다.


글을 택했다. 글은 꾸준하게 좋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고싶은 일만 한다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정신없이 삶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전화를 몸에서 떼어내지 못했고, 평일과 공휴일의 경계도 사라졌다. 새벽 1시에나 겨우 친구들을 볼 수 있었고, 일주일 동안 잠을 안 자 본 적도 있었다. 밥,잠 모두 일에 밀려서 거르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나면, 내 손에 남는 건 120만원이었다.


기사를 하루에 여러 건 쓰려면 동서남북으로 취재를 빠르게 해야 한다. 월급에서 열정을 위한 택시비를 빼고, 인터뷰 사진을 위한 소품을 사고 나면 정말 손에 남는 게 없었다. 물론 회사에서 교통비와 소품비가 지원이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집에 오면 남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에 밀려 친구도 점점 멀어져가고,
연인도 사라져갔다.


초반에는 경력을 위해 달렸다. 더 좋은 기사들을 포트폴리오로 만들어서 이직해야지. 근데 그렇게 떠난 선배들은 육아가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특종과 ‘좋아요’를 많이 만들어내는 에이스 기자라도 결혼에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 결혼을 안했더라도, 3,40대가 되면 젊은 후배들에게 밀렸다.



기자들은 어느 정도의 연차가 되면 기사보다는 영업이 실적이 된다. 능글맞게 술자리에 가서 광고를 따와야하는데, 기사만 잘 쓰는 여자 선배들은 데스크가 되면 영업을 못해서 금방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여자 선배들을 보면서 내 삶을 생각해봤다.


40대가 되었는데 주변에 가족도, 돈도, 일도 없는 삶은 어떤 느낌일까?


열정은 행복을 책임져주지 않는다

서울에 있을 때 자취방이 5평이었다. 열심히 일을 해서 투룸으로 가고싶다는 생각을 일이 힘들 때마다 했다. 투룸의 꿈을 가지고 방문한 서울 부동산은 충격적이었다. 내 월급으로는 평생을 벌어도 투룸을 갈 수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일은 힘들고, 사람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거라면 돈이라도 수중에 남았으면 했다.


같은 지옥에 있어도
카누를 마시는 지옥보다는
스벅커피를 마시는 지옥에 가고싶었다.



그 마음이 27살에 대학을 다시 가게 만들었다.   


평생 일할 수 있는 전문직으로 찾은 직업이 간호사였다. 적성에 안 맞는다는 문제가 있지만지인이 적성에 안 맞는 간호사일을 돈과 생존이라는 가치로 극복했기때문에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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