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생망 Feb 04. 2019

매일 조금씩 뛰는 일에 대해서

 

달리기에 대한 환상을 가지기 시작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고 나서부터다. 달리기와 소설을 쓰는 일이 곧 인생이 된다고 말하는 에세이를 보면서 환상이 생겼다. 나도 몇십년 동안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고 싶어졌다.      


오래 전부터 성실함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공무원 가족인 우리 집안의 특성상 기계같고 치밀한 성실함이 요구되는데, 나는 치밀한 성실함이 부족한 편이다. 예를 들면, 아빠는 시계가 필요 없다. 아침 운동과 밥을 먹는 시간, 취침 시간까지 일정한 시간을 지켜 평생을 하시기 때문이다. 아빠가 점심을 먹을 때 시계를 보면 매순간 12시 정각이다. 이러한 성실함을 바탕으로 회사에도 무려 1시간씩이나 일찍 평생을 출근해서 퇴직할 때 공로상을 받으셨다. 그런 치밀한 성실함을 보면 무서워진다. 그런 아빠에게 10분 전에도 겨우 출근하는 딸은 골칫덩이다.      


아빠는 아침마다 잔소리를 하지만, 회사에 헌신해봤자 헌신짝이 된다는 사상을 가진 딸래미에게는 잔소리가 통하지 않는다. (딸래미는 일찍 도착해도 근처에서 놀다가 출근시간 10분 전에 딱 맞춰서 들어간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빠의 치밀한 성실함이 부럽다. 나는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싫증을 잘 낸다. 빨리 몰입하고 빨리 싫증낸다. 그런 내게 제일 힘든 일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단편소설은 써도 장편소설은 쓸 수 없다. 이런 콤플렉스를 마음에 두고 있던 가운데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게 됐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은 마라톤과 같다는 에세이를 보고 달리는 일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하루키는 하루에 10km씩 주6일을 뛰지만, 나는 내 특성에 맞춰 매일 조금씩 뛴다. 1분, 5분, 버스 한 정거장 등이다. 노래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뛰면 밤바람이 기분 좋게 얼굴에 다가온다. 헬스장에서 뛰는 것보다는 별이 내리쬐는 강둑을 뛰는 일을 좋아한다. 뛰다 보면 중요한 고민거리였던 일들도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다. 지금 중요한 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현재라는 생각이 들어 즐거워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더 쓰고싶다고 생각할 때 과감하게 펜을 놓았다.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루키도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달리기를 할 때는 더 뛰고싶을 때 그만둔다. 더 뛰고싶다고 해서 하루에 7km를 뛰어버리면, 일주일동안 달리기를 할 수 없었다.      


마라톤도 거북이레이스, 컬러런, 5km, 10km로 시작했다. 물론 이마저도 싫증을 내서 안 할 때가 있다. 25살부터 뛰기 시작했지만 일 년에 세 달만 운동할 때도 있다. 뛰는 간격이 넓어질 때도 있지만 28살까지 삼 년 내내 달리는 일을 꾸준히 가지고 가서 뿌듯하다.         


달리기의 훌륭한 점은 정직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꾸준히 달릴수록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오랜만에 달리기를 시작하면 오래달릴 수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앞에서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달리다보면, 혼자 뒤처진 것 같아서 무서울 때가 있는데 끝에 가면 모두 만날 수 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불안해하지 않는 일도 달리기에서 비롯됐다. 100세 시대라는 인생 마라톤 앞에서 시작이 조금 늦은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꾸준히 뛰는 일이 중요하다. 또 마라톤 코스를 가다 보면 중간에 다양한 샛길을 볼 수 있다. 레이스대로 남들을 따라가지 않는 별난 사람은 어디든 있기 마련인데, 그렇게 샛길로 빠져도 도착점을 잘 찾아오는 걸 보며 용기가 생겼다.             


2018년 여름에 하프를 뛰기로 결심해서 2019년 삼일절에 하프레이스를 신청해놨다. 하프를 뛰려면 적어도 일주일에 50km를 뛰어야한다는 훈련법을 읽고, 하루에 7km씩 뛰고 있었다. 근데 웬수같은 오빠가 삼일절 오후 12시에 상견례를 잡아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연하게 마라톤을 취소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때 달리는 일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이 됐는지 깨달았다. 결국 22km를 10km로 마무리하고, 상견례에 가기로 했지만 아직도 분한 건 어쩔 수 없다.  

작가의 이전글 사람보다 조건을 따지게 되는 일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