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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생망 Jan 27. 2019

사람보다 조건을 따지게 되는 일에 대해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말들이 소름끼치게 싫었다. 사람은 양가부모가 있어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된다는 말이 특히 그랬다. 엄마는 내게 양가부모가 없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데, 그 말을 뱉은 사람이 우리 엄마라는 사실이 무서워지곤 했다.     


요즘 오랜 친구들 입에서 잊고 살았던 그 말이 나온다. 결혼상대를 고를 때 집안을 봐야한다고 말이다. 집안에는 양가부모와 안정적인 가정환경이 포함된다. 이유를 물어봤다. 부모님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핍이 존재한단다. 성격이 꼬이고, 열등감이 내재되어있단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결핍이 있다며 말하는 내게 친구들은 철이 없다고 말했다.      


‘부모님’이라는 단어가 폭력적이란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아동센터 봉사를 가서 아이들에게 ‘부모님’이라는 말을 무심코 썼다. 아이들은 부모님이라는 말에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쌤, 저는 엄마밖에 없어요.’ ‘저는 아빠랑 사는데요.’ 이런 아이들에게 그동안 학교에서 날아가는 모든 통지서에 적힌 ‘부모님’이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이었을까.      


어느 날은 아이들과 놀러갔을 때였다. 여섯 명의 아이들 옷을 내가 정신없이 챙겨야했다. 아이 한 명이 다가와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고아처럼 보겠어요. 나는 고아 아닌데!’ 양가부모님이 없는 아이들에게 있다는 결핍은 이런 것들일 테다. 여러 어른들이 무심결에 한 말에서 시작한 피해의식과 트라우마들이 쌓이고 쌓였을 것이다.     


나만 해도 결혼적령기에 대학을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말에 시달리곤 한다. 당당해지려고 할수록 더 구차해지는 느낌이다. 자기소개를 할 때도 자연스럽게 변명을 말하게 된다. 집에 돈이 있으니 대학을 두 번 갔다는 단정과 인생을 낭비해서 가족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라는 색안경은 그냥 넘기려고 해도 가슴 안에 상처로 박히곤 한다.      


상처는 자기소개에 대한 트라우마로 변하고, 피해의식은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에게 화를 내면서 나타난다. 나의 결핍은 이것인데 아마 점점 커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핍이 있는 사람과 친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내게 더 치명적이다. 내가 결핍이 있어서 성격이 꼬였을 거라는 이유로 나를 알아가지도 않으려고 한다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양가부모가 없는 사람만 결핍이 있는 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핍은 공부, 재산 등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가부모가 없는 사람은 결핍 때문에 만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결핍이 있고, 결핍은 시기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는 법이다. 사랑이나 우정이라는 감정이 결핍에 잘 어울리는 건 그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의 <잃어버린 여행가방>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처음 소개받을 때 그 사람의 학벌이나 지위, 재산 정도 따위보다도 그 사람의 귀여운 버릇이나 소탈한 일화같은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이해하고 호감을 갖는 데 믿을 만한 구실을 할 때가 많다“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뺏길 때 중요했던 것은 그 사람의 귀여움이었다. 친구와 연인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뺏겨야 감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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