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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ㅊ

추억

1.

  기억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추억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본다면 두 단어 사이의 의미 차이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우린 뉘앙스나 용례로 둘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지만, 하필 드물게 한가한 이 시간에 떠오르는 바람에 둘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 짓고픈 욕심이 샘솟는 것이다.


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단어 모두 한자어다. 군 시절 휴가를 위해 하릴없이 딴 한자 자격증은 이럴 때 활용해 보자. 비교적 관대한 문자인 한글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세상 엄격한 한자로 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기억의 앞 글자인 기록할 기(記)는 당신도 익히 아는 그 한자다. 내가 매주 블로그에 적는 일기(日記)부터, 크게 보면 삼국사기 같은 몇백 년 단위의 기록들에 붙는 한자다. 이처럼 기억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보단 '박제'에 더 가까운, 다소 정적이고 인지적인 영역의 단어다. 반면 추억의 머리인 따를 추(追)는 언덕(阜)을 향해 가는(辶) 모양에서 파생된 보다 동적인 의미의 단어로, 추격이나 추종 등에 쓰이는 한자다.


이런 섬세한 한 자의 차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왜, 추억은 그럴 때 쓰는 말이잖아' 라는 논리의 시작점이다.



2.

  내가 그렇듯, 아마도 당신은 추억보다는 기억을 더 큰 단위로 볼 것이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추억은 기억의 부분집합이다. 기억 중에서도 어떤 애틋함을 가져 단순히 기록되는 것을 넘어, 이따금씩 기억들 사이를 헤집어 따라가게(追) 되는 기억만이 '추억'이라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기억이 추억으로 거듭나기 위한 선행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사건' 과 '상실' 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당신은 20세 청년이고, 당신의 가족이 평생 시켜 먹던 '통통치킨'이란 동네 치킨집이 있다. 아마 살면서 질리도록 통통치킨을 먹었을 것이다. 몇십, 아니 몇백 번 있었을 아버지의 월급날, 세 남매의 평생 귀 빠진 날과 한가한 주말 저녁을 합쳐 양계장 하나 만큼은 먹었을 것이다. 이 경우 통통치킨은 그저 기억의 일부다.


다만 그 닭튀김을 입소 당일의 훈련소 문 앞에서 먹었다면 그건 추억이 된다. 특정한 이벤트와 엮인 기억은 추억이 되기 쉽다. 늘 먹던 치킨이지만 단골을 생각하며 새벽부터 튀겨주신 사장님의 정성 때문인지, 아니면 챙겨주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그날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눅눅했고 차게 식었지만, 훈련소를 퇴소하며 차 안에서 먹은 와퍼와 함께 '박치원의 인생음식-고난편' 2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 흔한 기억임에도 그것을 더 이상 쌓을 수가 없다면 그전의 기억들 중 일부(혹은 전체)는 추억이 된다. 전역 후 집으로 가던 길, 늘 똑같지만 정감 있던 통통치킨의 간판이 '대구통닭'으로 바뀌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마 내가 지금처럼 통통치킨을 깊게 회고할 수 있는 것도, 입대와 훈련소 앞이라는 이벤트적 요소와 동시에 작용하는 '이젠 만날 수 없는' 이란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추억이 되는 순간 우리의 세포들이 하는 일이 아닐까?


3.

  사실, 추억을 구성하는 한자에서 가장 낭만적인 것은 '생각할 억(憶)'이다. 보통 생각과 관련된 한자들엔 생각할 사(思)생각할 념(念)생각할 상(想)과 같이 꼭 마음 심(心)이 들어간다. 다만 생각할 억은 여타 '생각할 O' 시리즈와는 달리 이미 마음 심자가 들어간 뜻 의(意) 옆에 마음 심(心)자를 한 번 더 붙여 만들어진 한자다. 결국 추억이라 함은 마음을 한 꺼풀 더 벗겨낸, 구태여 쫓아야만 보이는 깊은 곳에 위치한 생각인가 보다.


기대수명으로 보든, 내 욕심을 고려하든 앞으로 살 날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는 지금껏 쌓아온 추억보단 앞으로 만들 추억이 더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이기적인 욕심쟁이가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추억이 만들어지는 두 기제 중에서 한 가지만 작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상실감으로 만들어지는 추억은 지금까지도 너무 충분해서, 같은 전형으로 들어올 신입 티오는 0명임을 엄정하게 공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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