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1.
기억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추억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이나 일' 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본다면 두 단어 사이의 의미 차이는 거의 없는 수준이다. 우린 뉘앙스나 용례로 둘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지만, 하필 드물게 한가한 이 시간에 떠오르는 바람에 둘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 짓고픈 욕심이 샘솟는 것이다.
자, 불행인지 다행인지 두 단어 모두 한자어다. 군 시절 휴가를 위해 하릴없이 딴 한자 자격증은 이럴 때 활용해 보자. 비교적 관대한 문자인 한글로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세상 엄격한 한자로 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
기억의 앞 글자인 기록할 기(記)는 당신도 익히 아는 그 한자다. 내가 매주 블로그에 적는 일기(日記)부터, 크게 보면 삼국사기 같은 몇백 년 단위의 기록들에 붙는 한자다. 이처럼 기억은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보단 '박제'에 더 가까운, 다소 정적이고 인지적인 영역의 단어다. 반면 추억의 머리인 따를 추(追)는 언덕(阜)을 향해 가는(辶) 모양에서 파생된 보다 동적인 의미의 단어로, 추격이나 추종 등에 쓰이는 한자다.
이런 섬세한 한 자의 차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왜, 추억은 그럴 때 쓰는 말이잖아' 라는 논리의 시작점이다.
2.
내가 그렇듯, 아마도 당신은 추억보다는 기억을 더 큰 단위로 볼 것이다. 보다 쉽게 설명하자면 추억은 기억의 부분집합이다. 기억 중에서도 어떤 애틋함을 가져 단순히 기록되는 것을 넘어, 이따금씩 기억들 사이를 헤집어 따라가게(追) 되는 기억만이 '추억'이라 분류될 수 있다. 그리고 기억이 추억으로 거듭나기 위한 선행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사건' 과 '상실' 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당신은 20세 청년이고, 당신의 가족이 평생 시켜 먹던 '통통치킨'이란 동네 치킨집이 있다. 아마 살면서 질리도록 통통치킨을 먹었을 것이다. 몇십, 아니 몇백 번 있었을 아버지의 월급날, 세 남매의 평생 귀 빠진 날과 한가한 주말 저녁을 합쳐 양계장 하나 만큼은 먹었을 것이다. 이 경우 통통치킨은 그저 기억의 일부다.
다만 그 닭튀김을 입소 당일의 훈련소 문 앞에서 먹었다면 그건 추억이 된다. 특정한 이벤트와 엮인 기억은 추억이 되기 쉽다. 늘 먹던 치킨이지만 단골을 생각하며 새벽부터 튀겨주신 사장님의 정성 때문인지, 아니면 챙겨주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그날의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눅눅했고 차게 식었지만, 훈련소를 퇴소하며 차 안에서 먹은 와퍼와 함께 '박치원의 인생음식-고난편' 2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
또, 흔한 기억임에도 그것을 더 이상 쌓을 수가 없다면 그전의 기억들 중 일부(혹은 전체)는 추억이 된다. 전역 후 집으로 가던 길, 늘 똑같지만 정감 있던 통통치킨의 간판이 '대구통닭'으로 바뀌었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마 내가 지금처럼 통통치킨을 깊게 회고할 수 있는 것도, 입대와 훈련소 앞이라는 이벤트적 요소와 동시에 작용하는 '이젠 만날 수 없는' 이란 상실감 때문일 것이다.
3.
사실, 추억을 구성하는 한자에서 가장 낭만적인 것은 '생각할 억(憶)'이다. 보통 생각과 관련된 한자들엔 생각할 사(思), 생각할 념(念), 생각할 상(想)과 같이 꼭 마음 심(心)이 들어간다. 다만 생각할 억은 여타 '생각할 O' 시리즈와는 달리 이미 마음 심자가 들어간 뜻 의(意) 옆에 마음 심(心)자를 한 번 더 붙여 만들어진 한자다. 결국 추억이라 함은 마음을 한 꺼풀 더 벗겨낸, 구태여 쫓아야만 보이는 깊은 곳에 위치한 생각인가 보다.
기대수명으로 보든, 내 욕심을 고려하든 앞으로 살 날이 너무 많이 남았다. 이는 지금껏 쌓아온 추억보단 앞으로 만들 추억이 더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다만 이기적인 욕심쟁이가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추억이 만들어지는 두 기제 중에서 한 가지만 작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상실감으로 만들어지는 추억은 지금까지도 너무 충분해서, 같은 전형으로 들어올 신입 티오는 0명임을 엄정하게 공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