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독스
1.
“…그래서, 맥루한의 이런 생각은 한편으로는 굉장히 오소독스한…” 바쁘게 움직이던 손이 멈칫, 귀에 들어오던 소리도 동시에 멈춘다. '오소... 뭐?' 아, 우리 교수님 똑똑한 거 다 아는데 또 어려운 말 쓰시네. 방금 스쳐간 단어는 무슨 의미일까. 모르는 단어의 존재에 극도로 민감한 이 복학생은 머릿속을 흐리는 의문에 휩쓸리다가도, 뜻은 나중에 찾아보자고ㅡ지금은 컨텍스트로 짚어만 두자고ㅡ다짐하며 다시 귀를 열고 손을 움직인다.
수업이 끝난 뒤, 그는 과방 소파에 널브러져 20년째 똑같은 천장재의 물결무늬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아까의 다짐을 잊었다. 그러던 중 불현듯 수업에서 겪은 언어적 패배가 사무쳐, 사파리를 켜고 녹색 창을 띄웠다. 그런데, 단어가 뭐였더라? 오로 시작했던 거 같은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 머릿속에 남지도 않았네.
결국 노트가 든 가방까지 세 걸음을 걸어갈지, 아니면 단기기억의 기적 같은 부활을 믿어볼지 각축을 벌여본다. 하지만 이내 귀찮음을 떨쳐내고 가방과 필기를 뒤지다, 특유의 둥글한 글씨로 눌러둔 의문을 자판에 옮긴다. 오소... 독스. 아, 이런 뜻이야?
2.
흔히 '정통(正統)' 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오소독스(orthodox)의 가장 쉽고 포괄적인 해석은, '주류(主流)' 라고 생각한다. 비주류와 비교했을 때 수적으로 우세해 중심에 자리한 개념, 스포츠에서는 흔히 '오른손잡이'를 칭하는 말이다.
다만 오소독스보다는 그 반의어가 우리에게 더욱 친숙한 편인데, 그 대척점은 당신이 생각하는 단어 '사우스포(Southpaw)가 맞다. 야구에서는 비교적 희소한 왼손 투수에 대한 수식언으로, 복싱에서는 왼손으로 잽을 날리는 선수를 지칭하는 용어다. 그렇다면, 정통과 주류라는 정의와는 딴판으로 우린 왜 비주류인 사우스포에 더 익숙한 것일까?
개인적인 견해가 있는데, '희소성에서 오는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왼손잡이는 차별이나 강제적인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희소하다. 당신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이를 보며 '와, 오른손잡이네?' 라며 신기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왼손으로 밥을 먹는 짝을 보고는 "너 왼손잡이야?" 라며 툭 던지듯 물어보거나, 혹은 따옴표를 하나씩 떼고서 마음속으로나마 궁금해했을 것이다.
주류라는 것은 결국 도처에 널려있다는 말이며, 그런 주류는 결코 흥미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만약 주류가 그 대상이 된다면, 그건 '오른손' 이라는 타고난 속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대단히 크고 억센' 오른손과 같은 부차적인 요소가 원인일 확률이 아주 높다. 마치 왼손 투수에게는 아무리 그의 커리어가 밋밋하더라도 '사우스포', '레프티'와 같은 고유한 표현을 붙이지만, 오른손 투수는 대단한 업적이 있지 않은 이상 '정통파'라고만 불리는 것처럼 말이다.
3.
그래서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어릴 적부터 사우스포가 되고 싶었다. 아니, 내가 사우스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편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머리가 좀 굵어지던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다. 다들 경영학과를 위시한 주류에 몸을 맡기려 들 때, 300명이 조금 안 되는 문과 중 단 두 사람만이 진학한 신문방송학과로 진학했다. 학문을 도야하고 취업을 준비하면서도 언론 고시나 당시 인기가 하늘을 찔렀던 공기업을 준비하는 것보단, 문이 좁아터졌지만 재능이 있다고 굳게 믿던 홍보 쪽으로 나가겠다며 어려운 길만 골라서 디뎠다.
스물일곱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내가 왼손잡이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다 취업 준비가 길어지고,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난 왼손으로는 콩자반 한 알조차 옮길 수 없는, 누구보다도 평범한 오른손잡이이자 흔하디 흔한 오소독스라는 사실을.
어떤 특정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자연스럽게 오른손은 꺼내고, 왼손은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뿐이었다. 그렇게 인정하고 포기를 선언한 순간에도, 눈물은커녕 분노도 차오르지 않았다. 그러기엔 나이를 포함한 주변 상황도 녹록지 못했고, 오랜만에 써보는 오른손의 컨디션이 꽤 괜찮았다.
그렇게 길길이 날뛰기 보다는 오히려 무섭도록 냉정해진, 수승화강 그 자체로 준비한 다음 시즌. 우리 세대에서 문과생이 갈 수 있는 가장 '오소독스한 앞길'인 공노비가 되는 일에는 어찌어찌 성공했던 것이다.
4.
어느새 일을 시작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반추해 보자면, 오소독스 그 자체인 나에게 큰 불만이 없다. 뚝딱이던 업무도 손에 꽤나 익었고, 불만이래봤자 여기저기서 너무 많이 뜯어가 너절한 월급이나 인수인계 없이 혼자 헤쳐나가야 할 새로운 업무에 대한 두려움 정도다. 오소독스한 길답게 사람을 안주시키고 길들이는 요소가 많아서인지, 더 이상은 일적인 측면에서 사우스포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이 남아있지가 않다.
다만, 그동안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왼손을 다른 방식으로 써보고 있다. 9시부터 18시까지 숫자나 문서와 씨름하던 오른손이 퇴근을 하면, 18시부터 9시까지는 왼손의 시간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 미간을 찌푸려가며 탈고하고 있는 이 글도 왼손으로 쓰는 중인 셈이다.
나름대로 잘 써오던 왼손답게 가능성도 활짝 열어두고 있다. 지금은 그저 글쓰기지만 하반기에는 낚시가 될 수도 있겠고, 조금 더 여유가 생긴다면 악기나 배드민턴, 혹은 생각지도 못했던 무언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다 보면 콩자반 하나는 물론, 나아가 먼지도 한방에 집어 드는 어엿한 왼잡이가 되어있지 않을까? 라는 망상을 왼손으로 쓰는 지금 든 생각인데,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양손잡이 쯤은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