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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ㅅ

1.

  "7600원입니다. 봉투 50원인데 필요하세요?" 보라색 조끼를 입은 앳된 점원에게 카드를 건네며 남자가 대답한다. "아니요, 괜찮아요." 작은 기계가 그보다 더 자그마한 네모에 담긴 무언가를 부지런히 읽어내는 동안, 남자는 저녁으로 무엇을 먹을지 느긋하게 고민한다. "결제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고민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떨어진 퇴장 선언에 익숙한 듯 맥주 두 캔을 한 손에 쥐고, 최근 들어 가장 치열했던 취사선택의 결과물인 바나나킥은 옆구리에 끼고 문을 나선다.


남자는 최근 들어 가장 까다로웠던 기업의 지원서류를 꽤나 만족스럽게 제출한 모양이다. 휘파람이라도 불 요량인지 입술을 동그랗게 모은 남자는 '하루쯤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생각하며 '깐풍기? 탕수육? 뭐든 영화 보면서 같이 마시면 되겠다.' 라며 여유로운 저녁을 그려본다.


허나 자취방으로 가는 내리막길 초입에서 했던 이 실행되지 않은 여유는 마치 먼지처럼 가볍고 하찮아서, 30초 남짓 지났을 현관 앞에선 그새 사라지고는 "아니다, 할 것도 많은데 무슨" 이란 구체적인 한숨을 내쉬며 비밀번호를 신경질적으로 눌러버리고 마는 것이다.



2.

  냉장고 문을 발가락으로 능숙하게 열어 젖히는 그는 작년 이맘때부터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첫해 나름의 유의미한 결과를 얻고 올해를 맞이했지만, 마침 전염병이 돌아서인지ㅡ혹은 준비가 부족했던 탓인지ㅡ그의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그런 남자에게는 올해 들어 늘어난 것이 참 많다. 외적으로는 몸 구석구석 살이 붙고 내적으로는 한숨과 자기 연민이 하늘을 찌르며, 무엇보다도 혼자 마시는 이 퍽 늘었다.


아마도 남자는 원래 구상했던, 사라진 여유 속의 내용대로 맥주를 즐기지 못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들어오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활자들과 씨름하며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새벽 2시쯤 익숙한 듯한 손으로 캔을 딴 뒤, 곧 찾아올 아침에 대한 걱정과 함께 벌컥벌컥 넘길 예정이다.


요즘 들어 자주 하는 '그 걱정'도 함께 할 것이다. 아마 한두 모금쯤을 남겨두고, '자기 전에 술 마시면 알콜 중독이라던데.' 라는 생각에 잠기며, 혹 본인이 그런 인간 군상 중 하나일까 하는 진지한 고민이다.


하지만 이내 '내일부터 안 먹으면 그만이지!' 라는 생각과 함께 시원하게 캔을 비운 뒤, 적당히 좋은 기분과 조금 많은 스트레스를 베개솜 사이마다 꽉 채우고 오지 않는 잠을 향해 “상-위-복-”을 외치며 애가 끓을 것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집 주인이 주말마다 101호에서 내놓던 수많은 맥주캔과 조금의 위스키 병, 그리고 그 사이 어디쯤 되는 수량의 소주 병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은 그로부터 딱 반년 후의 일이다. 그 자리엔 손때를 가득 탄 두꺼운 수험서와 펴보아도 무슨 말인지 모를 같은 디자인의 스프링 노트들이 탑처럼 쌓여있다.



3.

  술의 기능이라 함은 '돋보기'와도 같아서, 그것을 들이켜는 사용자의 감정을 확대시킨다. 오랜 준비 끝에 무언가를 성취하고 마시는 술은 미뤄둔 기쁨을 더욱 크게 만들어주고, 연인과 헤어진 후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까내리는 벗들과 마시는 술은 슬픔을 더욱 깊어지게 한다.


위의 남자, 그러니까 나 같은 경우는 1년 내내 자리 잡았던 모종의 패배감이 확대되어서, 자기 위해 홀짝이던 술이 쌓여 종국에는 걱정과 불안에 잠이 쏟아지지 못하게 막는 꽤 높은 수위의 댐이 된 경우였다. 자고 싶어서 마셨던 술이 외려 잠을 쫓아버린, 전형적인 알콜중독형 불면증환자의 모습이다.


다만 이 소소했던 불면증 및 알콜중독증의 치료는 허무하고도 깔끔하게 끝났다. 도망치듯 떠난 청송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씻은 듯이 자취를 감췄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건강한 세 끼를 먹고, 잠을 자지 않고는 못 배길 강도의 농업 활동을 평일 저녁과 주말마다 반복하니 자연스레 사라져버렸다.


물론 술은 산골에서도 자주 먹었지만, 표적이 달랐다. 일하는 중간마다 넘긴 소주나 막걸리는 머리가 찾은 술이 아니라, 호미질을 한 번이라도 더 하기 위해 육체가 원한 술이었다.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농촌에서 알음으로 통용되는, 술보다는 일종의 에너지 음료에 가까운 액체였던 셈이다.



4.

  다만 돋보기는 기존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았던 무언가도 동등하게 확대한다. 술은 당신이 맨정신이라면 찾지 못했을 것들을 보다 가시적인 크기로 만들어버리곤 하는데, 사람마다 술 버릇은 다르겠지만 입이 문제인 사람들은 꼭 조심하도록 하자.


특히 그 당부의 대상 중 하나인 나는 주량을 넘으면 속에 자리 잡은 온갖 진솔한 말을 쏟아내는 버릇이 있어, 술독에 빠질 걱정이 큰 자리에 가기 전 '블랙리스트'들과 연락이 오갈 수 있는 경로를 온갖 방법을 통해 제거하곤 한다. 덕분에 올해 들어 입이 방정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알콜중독 경험자에겐 참으로 유의미하고도 뿌듯한 결과다.


아무튼, 도구는 쥐고 있는 사람의 역량을 따라가는 것이다. 마시는 돋보기에 휘둘리기보다는 그것이 가진 긍정적인 기능만 취할 수 있는, 이 글을 읽은 당신과 나는 진정한 호모 하빌리스가 되도록 하자. 아니, 적어도 개는 되지 말자 우리. 그럼 난 바나나킥 먹으러 이만.


염가로 사람을 더욱 기쁘거나 슬프게 만드는, 가장 대중적인 돋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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