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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ㅁ

목소리

1.

  "대신 받았습니다. 계획운영과 일병 박치원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 받는 일이 꽤 익은 스물한 살은 전화기에 뜬 번호를 보며 뱉는다. 어, 끝 두 자리가 00번이다.


"어, 나 XX전대장인데." 아, 이럴 줄 알았지. "네 필승." 평소보단 좀 더 다부진 목소리. "계획과장 자리에 없나?" 우리 과장님은 꼭 이럴 때만 이발하러 가시더라. "예! 금일 15시 이발 예약이라 현재 자리에 없습니다. 메모 남겨 놓겠습니다."


깔끔하다. 오늘 하루만 보내면 휴가니까, 남은 3시간도 이렇게만 버티자. "어, 근데 병사야." 하여간 김칫국이 문제야. "일병 박치원." 수화기를 쥔 손이 촉촉해진다. "넌 항상 목소리에 히마리가 없다. 집에 안 좋은 일 있냐?" 무슨 소리. 내일 휴가인 군인보다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아닙니다." 수화기 건너 대령에겐 보일 리 없는 미간을 한껏 좁히며 대답한다. "그럼 좀 고쳐. 듣기에 영 안 좋다. 과장 자리에 오면 전화 좀 달라고 해." 다한증 환자의 손에 이윽고 장마가 찾아온다. "네, 알겠습니다. 필승."


덜컥하고 내려앉는 수화기 소리와 이어지는 뚜-뚜-소리. 손자국이 선명한 전화기를 보며 20초쯤 골똘히 생각하다가, "김주사님, 혹시 제 목소리 이상합니까?" 하며 나란히 앉은 아버지뻘 군무원에게 묻는다. "목소리? 아니, 왜." 이유를 설명하자 돌아오는 경북 말씨. "아~ 좀 무뚝뚝해서 그카시는가? 아직 1년도 더 남았는데 함 바꿔봐라."


그렇게 2014년 타의 100%로 단행한 일종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는 꽤나 성공적이었는지, 스물아홉의 내가 하고 있는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행정처 박치원입니다!"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정성스럽기 짝이 없다. 수화기를 통해 들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그럴 것이다.



2.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가짜 목소리, 진짜 목소리 위에 덧씌우는 일종의 페르소나(Persona)가 다들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총 세 가지 정도 간추릴 수 있는데, '노래용 목소리' 와 '일상용 목소리', 그리고 위에서 서술한 '민원용 목소리' 다.


이 목소리는 보통 친하지 않은 타인을 대할 때 쓰는, 가장 나중에 얻었으나 활용도는 외려 가장 높은 목소리다. 묘사를 하자면 얇고 높은 '발랄한 간신배'의 목소리인데, 21세 박치원은 아마 이런 목소리를 친절함의 청각화로 여겼나 보다.


그렇게 업무성 전화를 걸고 받을 때나 영수증은 괜찮다고 말할 때, 발표를 할 때나 무언가를 청하는 등 비교적 공적인 상황에 출현하는 이 목소리는 간신배라는 이미지를 띠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고쳐지지가 않는다. 따로 컴플레인이 들어온 적이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10년 가까이 썼더니 '이제는 이게 내 목소리인가?' 싶기도 하고.



3.

  삶의 만족도를 측정할 수 있는 여러 지표가 있겠으나, 가장 공신력 있는 지표는 '목소리의 사용 빈도(혹은 비율)'라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9시부터 18시까지 민원용 목소리만 주야장천 내다가, 퇴근 후 다른 목소리는 한 번도 못 내보고 다시 아침을 맞이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탓이다. 퇴근하고 노래방이라도 간 날, 혹은 친구를 만나 입을 놀이며 낸 비일상의 목소리들은 하나같이 너무나도 달다.


행복의 지표가 변하며 삶의 디테일도 같이 변했다. 우선, 예전보다 '주말'에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는 중이다. 졸업 후 인간관계 다이어트와 취업 후 유배지 발령으로 인해 청정수가 흐르던 간에 주말만큼은 다시 진득한 담즙이 돌고 있는 것이다.


약속 없는 주말이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매주 꽉꽉 채우는 덕에, 매주 월요일마다 아직까지 붕 떠있는 마음과 달리 몸은 항상 무겁기만 하다.


동시에, 전화에 굉장히 관대해졌다. 상대방이 연인이나 절친한 누군가가 아니라면 최대한 텍스트로 해결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짧은 내용이더라도 '비방용 목소리' 사용에 대한 니즈 때문인지 전화부터 걸고 본다.


그렇게 민원용 목소리가 아닌 원래 목소리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면, 퍽 가벼워지고 상쾌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는 게 근래의 나다.


10시간 뒤의 박주임은 또 얼마나 정성스러울까, 내일도 퇴근하고 노래방이나 갈까? 하며 하릴없는 걱정이나 하는 일요일 밤.


그렇게 하면 널 도와줄 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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