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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ㄹ

라면

1.

  "아니, 그걸 거기 왜?” 여느 주말 낮에 아들이 묻는다. "우리 어릴 땐 이렇게 먹었다." 평소보다 늦은 점심 준비에 한창인 엄마는 특유의 안동 말씨로 덧붙인다. "옛날에 입은 많고 먹을 건 없으니까, 이렇게 라면에 국수(소면)까지 섞어야지 한 젓가락씩 다 돌아갔다."


안동댐ㅡ혹은 임하댐ㅡ이 만들어지며 수몰되기 전, TV까지 있던 집안의 딸인 엄마의 입에서 나오기엔 다소 어색한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라면에 찾아온 변화는 필시 청송 골짜기 출신인 아빠의 몫이리라. 이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빠가 입을 연다. "그게 보기엔 그래도 먹으면 희한해."


아니, 희한한 건 끓고 있는 라면의 생김새다. 소면에서 번진 전분기 때문에 꾸덕하게 끓고 있는 모양새가 영 탐탁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한 입 먹어보니 푹 퍼지고 싱거운 것이 내 입맛에는 안 맞다. 배고프다던 막내가 깨작거리는 사이 어른들은 어느새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옛날 그 맛은 안 나네." 찬물을 들이키며 하는 경상도 남자의 짧은 품평.


음, 그렇구나. 이 요상한 라면은 맛으로 먹는 음식이 아니구나. 아빠는 이 라면국수에서 그 시절의 TPO를 찾는 중이구나. 그 뒤로 묵묵하게 한 그릇 비운 아들은 방에 들어가며 조용히 생각한다. '아, 그래도 갱시기죽에 비하면 이게 낫네.'


우습게도 나는 이 한가했던 주말 오후를 그리워하곤 해서, 요즘 내 손으로 직접 저 라면국수를 끓여먹고 있다. 사람 일은 참 모를 일이다.



2.

  라면은 세상 그 어떤 음식보다 5W 1H에 민감한 음식이다. 제품 뒷면에 표기된 방법대로(How) 똑같이 끓여도, 4W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건 다른 라면이다. 그냥 끓인 제품(What)이 똑같았을 뿐이다.


눈을 감고 상상해 보자. 여기 총 세 봉지의 진라면이 있다. 물론 빨간색이다. 첫 봉지는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빈집에서 괜히 출출해 끓여 먹었다. 두 번째 봉지는 성수기 펜션에서 친구들과 부어라 마셔라 달린 다음날 아침, 당신의 벗 중 가장 부지런한 아무개가 만든 것을 먹었다. 마지막 봉지는 하필 자기 전 보려고 튼 영상에서 김준현의 기가 막힌 면치기를 보는 바람에 홀린 듯 뜯어버렸다.


이러한 경우ㅡ물론 세 봉지 모두 엄격한 감독하에 같은 조리법을 고수했다ㅡ라면의 맛은 모두 같았을까? 매번 똑같은 최상의 맛을 위해 노력을 거듭했을 연구원들이 무안해질 만큼, 각각의 맛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을 거다.


모든 음식이 TPO에 민감한 것은 지당한 사실이나, 특히 이 간편하고도 자극적인 음식은 하늘 아래 같은 라면이라고는 없도록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3.

  덧붙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공연히 하는 '대체 이걸 처음 먹었을 때의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라는 생각. 매번 생각해도 답이 쉬이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드물게 답이 나오는 음식은 스무 살쯤 처음으로 먹어본 우니(성게알), 베트남에서 처음 먹어본 공심채.


그리고 이 질문에서 으뜸인 비엔나소시지 아래 버금으로 자리하는 것이 바로 라면이다. 폭력적인 나트륨과 유탕면이 더운 물속에서 춤 한 판 땡긴 결과물인 이 음식은 참기름처럼 가장 마법에 가장 가까운 음식이다. 어디에 들어가도 잘 어울리고, 무언가 애매할 때 선택하기도 가장 편리하다. 심지어 참기름은 몸값이라도 높지, 이 녀석은 접근성조차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거짓말 같은 음식을 가장 처음 먹었을 때는 대체 어느 찰나였을까? 기억이 안 나는 것을 보니 찰나가 맞을 듯한데, 아무리 고심해 보아도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직접 끓인 첫 라면이 언제의 어떤 것인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처음으로 먹은 맛이 떠오를 리가 없다.


고심 끝에 결국 다른 길로 샌다. 다음날 처음으로 얼굴에 보름달이 떴겠네, 어릴 때였으면 아마 안성탕면이었을라나? 언제부터 꼬들한 면을 좋아했을까, 역시 타고난 입맛이겠지. 아, 양은 냄비 사야 한다는 생각은 매일 해놓고 또 안 샀네.


음, 지금 라면 먹을까?


위에서 말한 '갱시기' 사진. 저정도면 천상의 비주얼이란 게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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