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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ㄷ

다리

1.

  평론가 이동진은 「터널을 지날 때」 라는 짧은 글에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라고 했다.


다리가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표현인데, 여기서 더 나아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터부시하는 '터널을 지날 때 뒤를 돌아보지 말 것'이라는 원형과 엮어 '지나간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미련을 덜어내는 통과의례' 로 터널을 설명하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풀어낸다.


이 짧은 수작이 무려 21년 전, 그러니까 2002년 월드컵이 채 열리기도 전에 쓰인 글이라는 것에 놀랐다.



2.

  그가 중심적으로 서술한 터널과 다리를 중심으로로 한 번 반추해 보자. 다리와 터널은 출발지 A에서 목적지 B로 가는 통로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다만 위의 글에서 언급한 양+과 음-의 차이점처럼, 두 구조물 사이에는 '대안의 유무' 라는 꽤나 다른 점이 있다.


터널은 같은 매개체를 통해 목적지로 갈 수 있는 '우회로'라는 선택지의 대안 혹은 대체를 위해 제시되는 방법이다. 보통 그러한 결정은 효율이라는 기치 아래 내려지게 되는데, 터널을 뚫는 과정에서 기존 구성요소(흙과 바위, 넓게 보면 공사의 대상이 된 구조물 모두)가 탈락된다. 평론가는 이런 요소들을 삶의 단계를 지나며 털어낼 과거의 퇴층 혹은 덜어내야 할 것들이라 표현했다.


아마 나의 경우는, 기존의 무언가를 없애면서 터널을 뚫기보다는 조금 수고롭고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우회로를 달리는 사람이다. 그의 말대로 터널은 감정 등 '지나버린 무언가'를 덜어내야만 뚫리는, 혹은 누군가 강제로 뚫어버리는 과정이 동반되어야만 성립되는 건축물이다.


다만 타고난 천성이든 후천적으로 형성되었든 무언가를 버리는 것에는 소질이 아예 없는지라, 늘 많은 것을 짊어지고 먼 길을 돌아가는 형국이 나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다.


또, 입구부터 출구까지 사방이 개방된 다리와 24/7 같은 조명만이 가득한 터널은 외부환경에 대한 반영의 정도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터널은 평론가가 말한 대로 무언가 '덮어두고 떠나는 것'에 대해 여러모로 알맞은 표현인 것이다.



3.

  그래서 나는 터널보다는 다리를 더 많이 놓는 인간 군상 중 하나다. 터널과 다르게, 다리는 주로 기존에 갈 방법이 없던 섬이나 강 건너를 새로이 잇는 방법이다. 우회가 가능한 길도 존재하지 않고ㅡ물론 강의 경우 상류까지 거슬러 오르면 되겠으나, 현실적인 대안이 아닌 경우가 많다ㅡ연결되거나 혹은 그대로 두거나, 둘 중 하나다.


이 경우엔 나는 고민할 필요 없이, 아니 생각 정도는 하고 무조건 가서 닿는 편이었다. 기존에 품고 있던 것을 덜어내는 일과는 다르게, 새로운 무언가를 형성하는 일에는 오히려 선천적인 소질이 있었나 보다.


그런 연유로 '나'라는 섬을 저 멀리 인공위성에서 조망한다면, 아마도 뚫린 곳 하나 없는 산이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섬 주변으로 가지가 빽빽하게 뻗은 모양일 것이다.



4.

  다만 그렇다 보니 모든 가지들을 관리한다는 일이 쉽지가 않다. 결국 모든 구조물이란 적절한 유지보수가 동반되어야 오래가기 마련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너지는, 혹은 균열이 생긴 걸 인지했음에도 외면하다 종래에는 끊어져버리는 다리가 종종 생긴다.


그럴 때마다 노심초사하며 어떻게 다시 다리를 이을지, 혹 이번에는 좀 더 튼튼한 현수교로 지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엉성한 돌다리라도 두어 여지는 남겨야만 하는 건지 고민하던 이전의 나는 자못 피곤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에 얼마나 더 많은 다리가 놓일지, 혹은 처음으로 몇 개의 터널을 뚫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동시에 어떤 다리와 터널이 무너질지도 전혀 알 길이 없다.


그걸 안다면 무너질 다리나 터널은 애초에 만들지도 않을 것이기에, 과연 모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당진-영덕 간 고속도로 어디쯤. 나는 역시 터널이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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