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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ㄴ

노래

1.

  "박주임은 무슨 노래 들어요?"라는 말을 듣고 잠깐 멈칫, 여기서는 대답을 잘 해야 한다. 일터에서 하는 첫 회식이니까 최대한 평범해 보이게끔 대답할까? 아니, 내가 듣는 노래가 부끄러울 일인가? 음, 그럼 이렇게 말하면 되겠다. "아-" 소리를 내며 생각을 끝내는 시간 3초, 내적 심호흡까지 한 나는 이윽고 말한다.


"아, 저는 아이유 좋아합니다." 일단 평범한 거 하나 던졌고, "그리고 검정치마라는 밴드를 제일 좋아하는데, 혹시 인디밴드 좋아하세요?" 맞은편에서 애매한 표정을 빚는 얼굴 위 말풍선의 내용은 듣지 않아도 들은 것만 같다. 이후엔 자연스레 다른 주제로 왔다 갔다, 그에 맞춰 젓가락도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 자리가 파한 후 돌아온 방에서 어떤 노래를 틀고 씻을지 고민하다가, 오늘따라 괜스레 눈에 밟히는 검정치마 노래 중 하나로 틀어본다.


좋기만 한데, 왜 인지도가 낮을까? 아니다, 더 유명해지는 것보다 나은가? 차라리 잔나비나 혁오 얘기를 할 걸 그랬나? 그래도 모르는 건 매한가지였을라나? 새소년이나 보수동쿨러, 문없는집이나 리도어 얘기 안 했으니까 됐지. 공연히 그 순간을 복기하며 물이나 맞다가 노래 한 곡이 어느새 끝났다.



2.

  사람 간에 발생하는 접점 중 '노래 취향이 같다'라는 것만큼 와닿는 일이 없다. 반대의 경우는 "아 그렇구나" 하고 나면 끝이지만, 나만 듣는 줄 알던 그 소리를 남의 스피커를 통해 만난다는 일은 자못 반가운 상황인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그림이다. 그다지 친하지 않지만 집 가는 방향이 같아 얻어 탄 A의 차, 혹은 첫 동아리 MT에서 B의 핸드폰을 연결한 스피커가 익숙한 도입부를 흘려 보내는 상황. 혹은 교류 없이 안부만 묻고 지내던 C의 프로필 뮤직이 굉장히 낯익은 때. 이런 장면들에서 나는 구체적인 상황을 차치하고 그 대상과 꽤나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그 누구도 그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상황임에도 그렇다.



굳이 비유하자면 노래하던 가수와 세션이 우퍼를 뚫고 나와 서로 악수 한 번 하라고 요청하고 있는 광경이다. 이전까지 접점이라고는 없던 이 사람이 어느새 접함을 넘어 어느 정도의 교집합을 생성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물론 나 혼자서. 그것도 대부분 마음속으로만.




3.

  위와 비슷한 갈래로, 친밀한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를 보는 일 또한 굉장히 즐거워하는 일 중 하나다. 죽고 못 사는 n년지기 친구일지라도 그 사람의 플레이스트는 오늘 처음 만난 이름 모를 아무개 마냥 낯선 게 대부분이었는데, 해당 과정에서 당황스러움보다는 모종의 즐거움을 느끼는 탓에 그렇다.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인지는 익히 알고 있다. 최근에 콘서트를 다녀왔다는 자랑도 했고, 평소에 워낙 요란하게 '덕질'을 하니까. 하지만 타인의 플레이리스트에서 오는 재미는 그런 예상 가능한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입 밖으로는 절대 내지 않는, '숨어서 듣는 노래'에서 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나의 경우, 감성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이는 ESTJ의 플레이리스트 한중간에서 가을방학의 노래를 발견하거나, 한없이 밝고 긍정적인 친구의 플레이리스트 구석에서 <우울한 편지>와 넬의 수록곡을 발견하는 그런 재미다.


다만 나도 이러한 '커밍아웃'을 자처해본 사람인지라, 남의 것을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이다. 플레이리스트는 어떤 프라이버시보다도 꽤 높은 수준의 보안 단계를 요구하는 영역이다.


만약 당신이 처음으로 남에게 플레이리스트를 보여준다면 무슨 말인지 바로 알 것이다. 사람이 벌거벗겨지는 기분은 결코 신체에 걸친 옷가지에서만 비롯되는 게 아니더라.


이게 벌써 10년 전 영화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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