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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ㅂ

버릇

들어가기 전에, 이게 프롬프터라는 물건입니다.

1.

  "음-" 비슷한 또래 셋을 앞에 두고 앉은 청년이 다물었던 입을 연다. "안녕하십니까, SK에너지 홍보 직무 지원자 박치원입니다. 저는-" 머릿속 프롬프터에 뜨는 내용을 바쁘게 잡아채던 중, "어, 잠시만요." 맞은편 사람의 입이 열리며 내 입은 닫힌다. "치원씨, 안 좋은 버릇이 있으셔서, 혹시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다. 난생 처음으로 면접 스터디에 온 이유가 이런 피드백 때문이니까. 뭔지 알 것 같지만 고견을 청해본다.


"치원씨, 항상 말 시작하실 때 '음-'이라고 하면서 시작하시는 것 같아요. 아까 저희 인사 나누고 얘기할 때도 들리던데, 자기소개하실 때도 그러시네요?" 확신에 찬 음성이다. 딱 봐도 면접 경험이 많아 보이는 이 듬직한 모임장의 말이 맞다. 나는 '음-' 중독자다. 어릴 때부터 말을 뱉기 전에 한 번쯤은 더 생각해 보자는 의식에서 파생된, 빨리 고쳐야하는데 잘 안 되는 습관이다. 통상적으로 보자면 아마 버릇에 가깝기는 할 것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는데요." 하나 더? 이건 진짜 모르겠는데. "멘트 생각하는 타이밍에 항상 눈을 위로 올려 뜨시네요. 자기소개는 외운 티가 안 나야 좋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누가 봐도 외운 사람 같아요." 이 작은 눈에서 그게 보일 정도면 얼마나 눈동자를 굴려댔을까. 남에게는 안 보일 줄만 알았던 프롬프터의 정체를 들킨 인간의 귀는 빨갛게 익어간다.


"그래도, 자기소개만 아니면 괜찮아요. 다른 질문들에는 오히려 즉석에서 잘 대답한 것 같을 테니까. 약점을 강점처럼, 뭔지 아시죠?" 역시 참전용사의 펩톡(pep-talk)은 다르다. 눈 앞의 캡틴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홍당무. "그럼 자기소개 계속 들어볼게요."


좋아. 귀 온도 내리고, 다시 나와라 프롬프터. 아니, 나 그래도 1차 면접은 뚫은 인재야. 그것도 한 명 뽑는 홍보 직무! "안녕하십니까-" 그렇게 첫 문장을 끝내기도 전에 친절한 베테랑의 얼굴에 뜨는 물음표. '너.. 눈.. 또?' 아, 이런. 망했다.


그렇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스터디를 끝내고, 대감집 노비를 꿈꾸며 찾아간 최종면접에서 나는 패배했다. 80%만 고쳐진 버릇 때문이었는지, 6시간을 대기하며 내려앉은 머리가 문제였을지, 아니면 옆 사람의 명문사학 졸업장에 비하면 수수하기만 했던 내 졸업장 때문이었는지. 혹은 내가 떠올리지조차 못하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겠지.


그 해 겨울, 그러니까 2019년 12월은 가능한 많은 핑계를 도자기로 빚어 구워낸 다음 몽땅 망치로 두들기며 자기 합리화나 하던 정말 추운 겨울이었다.



2.

  타인이 가진 흥미로운 버릇을 발견할 때가 있다. 손톱 주변을 피가 날 때까지 뜯는 꽤 흔한 버릇부터 집중할 때 미간을 한껏 찌푸리는 따위의 것들. 당신도 분명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ㅡ무려 지금도 하고 있는ㅡ뭔가 끊어지는듯한 소리를 내고, 어떤 일에 집중하기 전 나름의 개선 의식으로 목을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는 버릇이 있다.


보통 이런 요소를 타인이 포착하게 되면 "왜 그래? 하지 마!"라며 소위 '고나리' 스킬의 대상으로 나를 겨누게 된다. 나는 이런 말을 굳이 건네지 않는 편인데, 우선 나 또한 그런 버릇 하나ㅡ방금 또 해버린 손가락 꺾기라든가ㅡ쯤은 가진 사람이라 조언을 할 깜냥이 못 된다.


또, 상대방도 그것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할 수 있었다면 분명 내 손가락도 지금보다 훨씬 예뻤을 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버릇이라는 단어가 가진 어감 자체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다.



3.

  도벽이나 결벽 등에 붙는 한자, 버릇 벽(癖)을 뜯어보면 흔히 질병이나 우환에 붙는 병질엄(疒)을 부수로 쓴다. 이는 오래전부터 '버릇'은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로, 배우고 익혀서 익숙해진 것이라는 뜻의 '습관(習慣)'은 그에 반하는 긍정적인 의미(적어도 중립)로 써온 사례다.


그런데, 버릇과 습관의 긍부정은 대체 누가 판단하는 것이며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평가의 대상일까? 당신이 생각하듯, 인간 행동양식을 가늠하는 모든 기준은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는 교화의 대상인 나쁜 버릇이 다른 어떤 이에게는 꼭 갖춰야 할 좋은 습관이 될 때도 있다.


일례를 통해 살펴보자.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매사 사소한 모든 것까지 확인을 거쳐야만 하는, 디테일의 화신 A가 있다. 그가 몸담은 부서가 숫자와 지독하게 얽힌 곳일 경우, 이 행동양식은 타의 귀감이 되는 습관이다. 반면 그가 신속하고 유연한 일처리를 요구하는 부서의 장이라면, 그의 부하직원인 B는 신규 입사자 C에게 "우리 부장님은 이런 버릇이 있으셔서"라는 말로 장황한 인수인계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4.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모든 버릇에 대한 부정적인 색안경을 벗고 습관으로 통일하자. 라는 폭력적인 무엇이 아니다. 외려 버릇과 습관이라는 두 단어 사이에 꼭 긍·부라는 도장을 찍어야만 할까? 라는 개인적인 아쉬움에 가깝다.


다만 내가 원하는 '개념 통일(혹은 재정립)'이 당장 오지 않을 일이라면, 누군가 나의 반복된 행동을 나쁜 버릇이 아닌 특이한 습관으로 봐주기를 청하고 싶다. 다소 이기적이지만, 나 또한 불특정한 당신에게 언제나 그럴 예정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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