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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달 Apr 29. 2022

기역부터 히읗까지: ㅌ

통깨

1.

  "아빠!" 아래로 스무 걸음쯤 떨어진 마늘밭에 있을 농사꾼을 찾는 초보 농부. "어!" 한 글자임에도 다분히 사투리인 답장이 온다. "한 구멍에 하나씩만 넣으면 되나!" 아침밥으로 얻은 열량을 다 쓸 기세로 내지른 질문이지만 응답은 함흥차사다. 우선 하나씩 넣어볼까? 라며 생각하던 중 직접 올라온 아버지, 아니 숙련된 조교.


"통깨는 한 구멍에 세 개씩은 넣어야지." 음, 오늘도 하나 배워가는 신묘한 농사의 세계. 이유를 물으니 발아율이 그렇게 높지는 않단다. 세 개를 심어도 하나도 안 올라오는 경우도 허다하다니,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한다.


그렇게 운동장 우레탄 알갱이만한 씨앗 세 개를 눈 감고도 잡을 수 있을 때쯤, 주어진 할당량ㅡ할당량이라 쓰지만 결국 통깨 밭 전부다ㅡ의 절반을 채운다. 앞으로 세 고랑만 더 하면 끝이다. 두 시간만 하면 끝나겠네. 조금만 쉬다가 할까?


"치원아! 밥 안 먹나!" 특유의 높은 안동 말씨가 둘을 부른다. 음, 벌써 밥 먹을 시간인가? 코팅장갑을 입으로 자연스레 벗겨 내고 시계를 본다. 12시? 벌써? 그제서야 장화에 가득한 습기와 아파오는 허리, 따가운 목덜미와 이 시간쯤 예외 없이 늘어져 있는 반려견의 모습을 인지한다.


반복 노동의 위험성과 빠르기만 한 시간을 야속해하며 장화를 털고 손을 씻는다. 그리곤 능청스럽게 묻는 나. "엄마 오늘 점심 뭔데! 맛있나!" 이게 딱 일 년 전쯤의 일이다. 그립지는 않고, 이따금 생각은 난다. 점심상엔 두릅이 올라왔다.



2.

  취업 준비 터널의 한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던 때, 여러 이유로 청송으로 가게 된 나는 온갖 자연물에 감정이입을 하곤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통깨, 혹은 참깨에 내 정성을 듬뿍 들였는데, 파종부터 싹이 트고 내 키만큼 자라는 과정을 다 본 유일한 작물이다. 마치 자식을 키우는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기의 나를 닮아 눈에 자꾸 밟혔다.


설명대로 참깨, 아니 통깨는 발아율이 꽤 낮은 편이다. 우선 씨앗 자체도 우리가 먹는 작디작은 '깨 한 톨'이다. 때문에 파종이나 발아 과정에서 매우 약해서, 겉에 파란색 코팅을 입힌다. 그렇게 5cm 흙 아래 들어간 비비탄만한 씨앗의 운명은 2주 안에 결정된다. 둘 중 하나다. 코팅을 깨고 싹이 돋거나, 그대로 시퍼렇게 죽거나. 멀쩡하게 자라 참기름이 되고 볶아질 수 있는 깨는 얼마나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 만물을 취업 준비와 엮던 그때의 나는, '아, 이거 나네?' 라며 생각하곤 했다. 내가 낸 서류 중에 몇 개나 통과할까. 시험은 몇 번이나 칠 수 있을까, 올해 면접은 갈 수 있을까. 아, 너무 쉽게 봤나? 이 시기 나는 한숨을 쉬어도 땅이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귀납적으로 증명했다. 씨를 한 번 내려놓을 때마다 한숨을 열 번, 총 1000번은 내려놨을 텐데 아직까지 청송은 무사하다.



아마 대부분 본 적 없을 참깨의 꽃. 시골살이는 이런 낭만이라도 있어야 버틴다.


3.

  아무튼, 그야말로 애지중지하며 깨를 돌봤다. '금이야 옥이야'란 말도 딱 맞겠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이 개 밥을 챙기고ㅡ그러는 김에 열심히 쓰다듬고ㅡ, 오늘 안개는 얼마나 심한가 스윽 둘러본 뒤 새싹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새싹이 터질 때쯤 몇 군데 필기시험을 보러 갔고, 키가 초등학생만큼 자랐을 땐 면접을 보러 갔다. 꽃이 필 때는 지금 직장에서 인턴을 시작했고, 깨를 베고 말릴 때쯤엔 제대로 된 업무분장을 받은 사회인이 되었다.


깨와 나를 동일시하던 메타포의 끝을 맺자면, 싹이 아예 나오지 않은 구멍도 있었다. 아니 꽤 많이, 적잖이 보였다. 당시엔 가물었던 날씨 탓이나 오지도 않았을 고라니 탓도 해보고, 한숨 쉴 시간에 신경 좀 쓸 걸 하는 내·외부 환경 탓만 하고는 했다. 그래서 한동안 깨밭 주변에는 가지도 않고 개밥도 주는 둥 마는 둥 하는 날도 퍽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새싹이 하나 둘 고개를 든 구멍이 더 많았고, 그 '싹수'가 보이는 것들에 집중했더니 나름대로 고소한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지금은 소주병과 페트병에 담겨 나와 가족의 윤택한 삶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4.

  올해부터 통깨는 온전한 아버지의 몫이다. 아마 내가 다음으로 파종할 시기는 쉬어가며 떨어진 지력도 회복하고, 퇴비와 유박을 뿌려 기름진 흙을 만든 뒤일 것 같다. 당장 파종하기엔 봄도 채 오지 않은 것 같으니 말이다.


아, 이왕 심는다면 다음엔 통깨 말고 다른 걸 심자. 이왕이면 좀 크고 화려한 상품작물로. 배 아니면 수박 어떨까? 두리안은 너무 간 것 같고, 샤인머스캣? 아무튼 통깨는 탈출하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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