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화. 오래된 물건의 기억: 덧없음과 지속성 -
제16화. 오래된 물건의 기억: 덧없음과 지속성
먼지 쌓인 궤짝, 그 속에서 흘러나온 시간
다용도실 구석, 이사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끌고 다녔던 낡은 나무 궤짝 하나를 열었습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린 뚜껑 사이로 맵싸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잊고 지냈던 ‘시간의 냄새’가 훅 끼쳐옵니다. 그 안에는 어머님이 생전에 쓰시던 낡은 주판과 아버님이 남기신 빛바랜 볼펜 한 자루가 누워 있었습니다. 손때 묻은 물건들은 주인을 잃었어도 여전히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온기를 품고 저를 응시하는 듯했습니다.
만물상회의 주판알 소리와 사라진 기와집 (지식 참조: 귀인의 필적)
주판을 손에 쥐니 내가 태어나기 전, 경남 하동 악양골의 만물상회 풍경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13살 소년이었던 제게 세상의 전부였던 아버님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셨을 때, 우리 집의 기둥이었던 웅장한 기와집은 덧없이 허물어져 갔습니다. 아버님이 남기신 것은 유산이 아니라 ‘상실’이라는 거대한 구멍이었지요. 하지만 어머님은 그 구멍을 원망으로 채우지 않으셨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어머님이 밤새 튕기시던 주판알 소리는 제게 ‘생존의 리듬’이었습니다. 9년 전, 100세의 연세로 어머님이 소천하셨을 때 저는 그 주판을 차마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남편을 잃고 가문을 일으키려 했던 한 여성의 치열한 필적(筆蹟)이었기 때문입니다. 12년 동안 IT 사업을 하며 화려한 숫자를 다루었지만, 제 마음속 가장 고귀한 숫자는 늘 어머님의 주판알 속에 있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박제된 아날로그의 영혼 (미래의 희망)
이제 저는 AI와 글쓰기를 통해 이 낡은 물건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주판알은 데이터가 되고, 아버님의 볼펜은 키보드가 되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의 농도는 변하지 않습니다. 물건은 낡고 사라지지만, 그 물건에 깃든 정신은 기록을 통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중년의 기록이란 결국 ‘나를 만든 것들’에 대한 예의입니다. 제가 쓰는 한 줄의 문장은 아버님의 기와집을 재건하는 일이며, 어머님의 주판알 소리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입니다. 미래의 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곁의 낡은 물건들이 건네는 오래된 지혜를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있습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건다.”- 결말
“사라지는 것은 형태일 뿐, 사랑은 물건의 결을 타고 영원히 흐른단다.”
마흔 이후,~ 연재 에세이는 내일 목요일에 이어집니다.
다시 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