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수록된 <작품 해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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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소설 뒤에 <작품해설>이 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작품해설>을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작품해설>의 ‘존재’를 좋아한다. 헛기침 크게 한 번 해주고 ‘존재론적 측면’으로 말할 때 나는 <작품해설>의 ‘존재’를 넘어서 <각주>의 ‘존재’, <색인>의 ‘존재’, <참고문헌>의 ‘존재’를 모두 환영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내가 읽을 분량이 줄어드니까.
<이방인>을 읽을 때는 소설 분량에 버금가는 작품 해설에 쾌재를 불렀고, <기호의 제국>에서 굴비 엮듯이 줄줄이 이어지는 각주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으며 <일반기호학이론>에 첨부된 엄청난 분량의 참고문헌과 색인을 보며 이런 바람직한 책이 있음에 기뻐해 마지 않았다.
이 모든 존재들의 환영은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덜 읽으려고 꼼수를 찾는 얄팍한 속내일 뿐이다. 작품해설을 위해 희생된 나무들과 작품 해설에 대해 지불된 원고료와 해설자의 노고,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한 출판업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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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작품해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품해설>이 문제집 뒤에 있는 “정답지”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는데 반드시 백 점짜리 독서를 할 필요는 없다. 그 작품을 반드시 백 퍼센트 이해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어떤 책 읽기에도 백 점짜리는 없으며 정답이란 더더욱 없다. 누구든 자신의 눈높이만큼 읽고 그만큼만 받아들이면 된다. 저자의 의도를 간파해내야 하지도 않고 본래의 의도와 다르게 이해해도 좋다. 다른 사람이 읽어낸 깊이만큼 나도 그 깊이대로 읽어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소설이 길든 짧든, 쉽든 어렵든 간에.
우리는 학창 시절에 하나하나 꼭꼭 씹어주는 시 수업을 받았고, 소설을 읽을 때는 몇 인칭 소설인지, 어느 부분에서 기승전결로 나눌 것인지, 이 장면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이런 정답 표를 선생님으로부터 받았다. 어른이 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참조용으로 삽입된 <작품해설>을 읽고서 소설을 제대로 읽었는지, 저자의 의도를 올바르게 이해했는지 강요당하는 기분을 맛보고 싶지는 않다.
또 하나. <작품해설>은 재독의 즐거움을 반감시킬 수 있다. 같은 소설을 읽더라도 읽을 때마다 인상적인 점, 눈에 들어오는 것과 느끼는 것이 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읽을 때마다 빈킨을 채우듯 새록새록 다른 느낌들을 마음 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재독의 묘미이다. 그런데 만약 작품해설을 읽고 그 소설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다면 그런 재미를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그 소설과 다음 번 만남을 위해서라도 나는 <작품해설>을 잠시 쉬어가고 싶다.
그렇다고 <작품해설>이 절대적으로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도 <작품해설>을 그리워한 적이 있다. 미야자와 겐지의 소설을 읽고 난 후 <작품해설>이 없어 무척이나 아쉬웠다. 심오하고 철학적인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들을 읽으며 나는 답을 알고 싶었다. 누군가 그것은 이런 의미라고 콕 집어 말해주었으면 싶었다. 그가 쓴 동화가 어떤 은유를 숨기고 있는지를 지독히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논문을 찾아 읽는 수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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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은 있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없으면 아쉬워지는 존재일지 모른다. 그것이 어떤 존재이든 <작품해설>을 읽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참조용이며 독자의 선택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독자는 책을 제멋대로 읽을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