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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니엘 Mar 21. 2024

엄마, 난 20대의 효도 다 했어요

엄마와 함께 한 해외여행이란


후회 없는 효도란 무엇일까?


나이가 들수록 본인보다 자식이 잘되는 게 부모의 기를 든든하게 세워준댔다. 뭐, 일설로 5살까지 아이가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효도는 끝났다고 하던데, 그만큼 자식 키우는 건 어렵다는 의미일 듯하다. 여러 의미에서 크게 반항 없이 말 잘 듣고 공부도 운동도 잘했던 나는 일상이 효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지원(input)과 자식의 성적(output)이 맞아떨어지는 선순환이다.


'10대의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 '20대의 많은 세상 경험을 하고 좋은 직장 가기'처럼 나의 목표가 곧 엄마의 목표였다. 같은 목표였으니 내 꿈만 이루면 되기에 효도란 건 자연스럽고 쉬웠다.


그렇다면 20대에는 어떤 효도를 해야 할까. 자식에게 올인하신 20년간의 시간, 그 듬뿍 어린 지원에 나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나를 키워주신 시간에 나도 '시간'으로 보답하기로 했다. 뭐 거창한 건 아니다. 마음속에 차곡차곡 남을 "함께 하는 추억"에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수다 끝에 나오는 엄마들 사이의 자랑, '우리 애가 해외 같이 가재~!' 그 뿌듯함을 채워드리고자 했다.




대학교 2학년 21살, 엄마와 태국을 함께 다녀왔다.


대학교에서 100만 원 정도 장학금을 받았고,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의미 있게 돈을 쓰고 싶어서 고민하던 차에 엄마와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어 여쭤보았다.


"엄마, 어디 가고 싶은 나라 있어요?"

"어디든 좋지~♡"


엄마와 같이 가기엔 자유 여행은 조금 어렵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서 패키지여행을 알아보았다. 마침 태국이 가성비 좋게 나의 레이더 망에 들어왔고, 3박 5일로 방콕 파타야를 다녀오게 되었다.


엄마의 첫 해외여행!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을 담아 짐을 열심히 쌌다. 동남아는 처음이었고, 엄마는 제주도 신혼여행 이후 20년 만에 첫 비행기 여행이 신나 설레고 계셨다.


"엄마, 수영복 챙겼지? 모자는 뭐 가지고 갈 거야? 김치는 가져가지 말자. 현지 음식 맛있을 거야."

순간순간을 웃으며 찬찬히 잘 알려드리면 더 좋았을련만, 그 당시의 나는 표현을 잘 못해 틱틱 거리 철없는 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태국으로 떠났고, 처음 맞이한 동남아의 열기 속에서 여행을 실컷 즐겼다. 태국 택시는 강렬한 핑크빛이었고, 파타야라는 도시는 한국인들이 참 많았다. 패키지의 과일 바구니를 받고 밤에 호텔에 앉아 엄마와 각종 동남아 과일을 냠냠 먹었다. 현지 수프 똠양꿍을 맛보며 향신료 가득한 맛에 취해보았고, 전갈 벌레 꼬치를 처음 보고 기겁을 했다.


빈틈없이 짜인 패키지 계획표 에서 최대한 순간을 즐기고자 했다. 20대의 젊은 딸과 함께 온 50대의 신나는 엄마. 둘의 조합은 같이 다녔던 다른 일행들의 부러움을 샀다. 정말 대놓고 부러워하셨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딸과의 첫 해외여행을 너무도 좋아하셨고, 딸 키운 보람이 있다며 행복해하셨다. 일부러 자랑한 건 아니셨겠지만, 어느 순간 나는 동네의 효녀 딸, 부러운 딸이 되어있었다. (지금이야 많이 다니지만 10여 년 전에는 흔치 않았던 일이다. 동네에서 모녀 여행은 선구자였다. 그리고 그 노하우를 팍팍 전수해 주었다.)


뿌듯했다. 엄마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은 최고의 투자였다.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드는 것- 내가 추구했던 삶의 목표와 같았다. 금씩 여행의 세부 일정이 희미해져 갔지만 함께 다녔다는 사실은 벅차오르는 감정으로 마음에 남았다.


여행을 다니며 나와 동일시되어 20년간 그림자처럼 뒷바라지를 하던 엄마가 아니라 나와 다르게 생각하고 움직이던 50대의 여인을 보았다. 여행지에서 엄마는 호기심 많은 50대의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엄마는 해외 땅이 궁금하셨댔다. 그래서 그런지 지나치는 꽃 한 송이, 기차역의 모습, 건물의 형태 등등 모든 자극을 눈으로 담으려고 노력하셨다. 날것 그대로의 기쁜 감정을 표현하는 엄마는 여행지에서 참 행복해 보였다.


엄마, 봐요. 하트 구름이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엄마는 엄마 또래에 비해 정말 잘 걸어 다니시는구나. 호기심이 많으시구나. 체력이 좋으시네. 내가 그런 점은 엄마 닮았나 보다.' 엄마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아니, 함께 여행 다니는 친구였다.




엄마는 그동안 나의 그림자다. 분신이었다. 내가 웃으면 엄마도 웃었고, 불안해하면 같이 불안해했다. 내가 울면 같이 속상해했다. 내가 힘이 들어하면 해결하려고 나고, 내 건강을 나보다 더 챙기셨다.


그게 분리되지 않은 관계란걸 알게 된 건 30살이 훌쩍 넘은 이제서이다. 엄마 시대엔 하고 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없는 시대. 소중한 딸이 본인 대신 꿈을 이루어 주는 모습은 참 뿌듯하지 않았을까 싶다. 엄마는 나를 보며 꿈을 꾸고 이루고 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쩌랴.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린 엄마였다. 시대의 아픔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도 엄마는 그 시간이 후회가 없으시다고 한다.)


그 당시의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나중에 과거를 되돌아보며 함께 시간을 보낼걸, 웃으며 얼굴 한번 더 볼걸, 다리 아파서 못 다니는데 아쉽네...이라는 후회를 하기 싫어서 더 열심히 다녔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기분은 참 좋다. 그게 내 곁의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때 그 시절 50대의 엄마를 마음 한 구석에 간직해 본다.


그렇게 엄마는 딸과 함께 조금씩 해외를 향해 나아갔다. 일본, 대만, 홍콩, 베트남... 딸과의 추억을 쌓여갔고, 요즘 같이 해외여행이 더욱 보편화된 시대에 아빠나 다른 친구분들과도 유럽 등등을 다녀오셨다. 이젠 처음만큼의 열정과 체력은 줄어들으다. 다리 떨리기 전에 원 없이 여행해야 된다는 내 소망처럼 엄마는 이제 후회가 없으신 듯하다.




나는 뭐든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30대가 되어 다닐 만큼 다닌 여행이 시들해진 지금은 어떤 효도를 생각하고 있냐면- "건강"이다. 자꾸만 몸 어딘가 하나씩 아프시다고 하시니 신경이 쓰인다. 함께 하는 시간을 예전처럼 여행으로 채우진 않지만 '주기적으로 사우나 같이 가기, 등산 가기'처럼 건강하게 채워보려고 노력한다.


이제부터는 내가 엄마 챙길게.


그런 의미에서~

엄마, 난 20대의 효도 다 했어요~! .



* 노래 한 구절 추천드린다.

꿈 많던 엄마의 눈부신 젊은 날은
너란 꽃을 피게 했단다
너란 꿈을 품게 됐단다
- 토이 6집, <딸에게 보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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