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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니엘 Mar 14. 2024

독일 생활, 공부쟁이는 어떻게 멈춰 섰는가

머무름의 미학, 독일의 뒷골목에서 생각하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묵직한 책이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걸 보면, 좋은 책이라 한 번쯤은 추천드리고 싶다.


무수히 많은 애벌레들이 기둥을 만들어 위로 끝없이 끝없이 올라가려고 하는 가운데, 그 사회에 의문을 품은 한 애벌레의 여정을 그린 책이다. 경쟁 사회 속 어디까지 올라가야 하는가, 언제까지 올라갈 건데? 근데 올라가면 그 끝엔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건 맞는 거야?




요즘은 내 주변에 학생이 없어서 다들 어떻게 공부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아이 엄마인 친구들이 아 때부터 문화센터, 유치원, 학원 등등 신경 쓰는 걸 보면 우리 때와 크게 달라졌을 거 같진 않다.


내가 학창 시절 다닐 때는(으악 라떼는 말이야~ 으로 느끼진 않으시길..) 분기마다 12과목의 시험이 있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그리고 중간마다 수행평가가 끝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6년을 한방에 결정지을 수능. 10대 내내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달렸다. 그 압박감에 나 스스로 여유를 더 잃었을 수도 있다. 여하튼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 틈틈이 공부 계획을 하고 졸면서도 연필을 놓지 않는 시간이 계속되었다.


과정이 마냥 부담스럽지만은 않았다. 끝은 있었고, 모두가 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정해진 트랙을 달리는 건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새로운  배우는 걸 좋아했기에, 다양한 과목이 있는 학교 공부는 재미있을 때도 많았다. 일명 '대학 가면 다 해결돼!'라는 말도 안 되는 감언이설. 그렇게 20대가 되었다. '좋은 대학교 가기' 만이 10대 때 삶의 목표였기에 20대부터는 어디로 달려야 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학점 토익 자격증 등등 달릴만한 트랙은 있었다. 이것저것 도전해 보다가 '독일에서 살아보기'라는 맛을 보게 되었다. 해외 인턴이라는 스펙을 채우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지내는 삶이랑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여행이랑은 다른 생소한 느낌이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pixabay.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꿈만 같았다.


외국인 비율이 정말 많은 국제 도시, 우리나라 기업 간판들이 광장 한복판에 있어 왠지 뿌듯한 국뽕이 차오르는 도시, 새로운 경험들이 가득 찬 도시. 그러면서도 조금만 걸어 나가면 들판이 펼쳐지는 아기자기한 프랑크푸르트. 그 속의 작은 들판을 나는 참 좋아했다. 10년 전의 내게 주어진 축복 중 하나.


@pixabay. 눈 감고도 골목이 기억날 만큼 이곳을 많이 걸었다. 10년 전엔 저 건물이 공사 중이었다.


한국에서 한강을 뛰는 것과 비슷한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람 사는 데는 비슷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가졌던 '끝이 없는 목표'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산책을 하며 처음으로 '여유' '쉼'이라는 단어를 마음속 깊이 느껴보았다. 폐부 가득 느껴지는 상쾌한 공기, 절로 가벼워지는 발걸음. 뒤돌아보니 푸른 들판이 펼쳐져있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시원한 들판이 나온다.) 한가운데서 나 혼자 덩그러니 서있었다. "나..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나? 어디로 뛰어야 하지? 이제껏 나 왜 뛴 거지? 조금은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길바닥 작은 것들이 보였다. 길가에 핀 꽃, 새들이 짹짹 거리는 소리, 투박하게 펼쳐진 흙길, 저 멀리 가끔씩 지나가는 전철,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독일 집들, 그 속의 나까지 조용하게 풍경이 되어 있었다. 마음 한구석이 후련해졌다. 마치 자연의 일부분인 기분.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판을 거니는데 그 순간이 너무도 행복한 거다. 자유로운 나의 시간.


실속 위주의 딱딱하고 삭막한 우리나라 도시에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여유를 독일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소소한 행복이던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엔 '해야 할 것 리스트'가 있었다. 그런 것에서 일순간 자유로워진 순간은 신비한 경험이었다. 세상이 아름다웠다. 그 느낌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독일에 있던 6개월 동안, 정말 많이 걸었다. 내게 자유를 선사하는 이 느낌이 좋아서. 아니 이유를 붙일 수 없다. 그냥 너무 좋아서.




그리고 짧은 쉼을 지나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취업을 위해 뛰어야만 했다. 자본주의 하에서 어쩔 수 없는 경쟁 사회. 특히 인적 자원이 무기인 우리나라는 더 심하다. 우리는 평생을 뛰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잠깐 멈춰서 풍경을 바라보며 숨 한번 쉬고- 길가의 작은 풀을 바라보고- 전철에서 펼쳐지는 창밖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의 작지만 시원한 웃음. 그 재미를 알게 되었다.


독일 날씨는 생각보다 흐린 날들이 정말 많다. 흐리고 스산한 날이거나 어두침침한 새벽에 흐르는 공기 내음을 맡으면 독일에서의 시간이 생각나 기분이 좋다. 맑고 쨍한 날씨와 흐린 날씨 모두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pixabay. 축축하지만 설레는 느낌이 좋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은 '1등 만능주의'를 위해 달리지는 않는다. 뒤쳐지는 걸까 두려움이 앞설 때도 있지만, 그럴 능력도 없고 필요성도 덜하다. 내게 주어진 '찰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그날 하루를 잘 살았다는 기준이 된다면 사치일까. 작은 행복을 찾아 누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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