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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18. 2022

아홉수와 상실

언제부터 시작이었지.

4월부터 매주 금요일에 와 일요일이면 사라지던 k가 더이상 오지 않았다. 여섯 시간 이상은 자지 못하던 L은 k가 오고부터 차츰 자는 시간이 늘더니 일요일에는 10시간을 자고 시계를 보고 놀라곤 했다. 점점 그의 영혼이 땅을 딛고 섰다. k가 사라진 주말, L은 적게 자고 일어나 멍한 얼굴로 달리러 나갔다. 달리고 와서 집을 쓸고 닦아도 9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어느 날, 처음 보는 택배가 왔다. L은 상자에서 조심스레 축구화를 꺼내 들고 감탄했다. 발을 넣고 엉성하게 매듭을 묶더니 비장한 얼굴로 가방에 넣고 문을 나섰다. 돌아온 밤에는 가시지 않은 활기가 가득했다. 주말에 눈을 뜨면 이른 시간을 보고 절망하는 표정이 사라졌다. 일어나자마자 고양이 세수를 하고 운동복에 발을 꿰고 ‘FC 00’라고 쓰인 가방을 들고 나섰다. 돌아올 때는 아쉽거나 들뜬 얼굴이었고, 잔잔하게 만족감이 깔려 있었다.


어느 날, L이 들뜬 얼굴로 돌아와 집을 뒤엎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버리고 또 버렸다. 한참 그릇 칸을 비우다 전화를 걸었다. 침착한 척을 하려고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 채로 “오랜만이야.”라고 말했다. 얼굴에는 울음이 묻어 있었는데 “나 방콕 간다?”라고 할 때는 설레 보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버리는 일이 미처 끝나지 못한 마음을 잇는 용기를 주었나.


어느 날, L은 왼 다리를 절뚝거리며 돌아왔다. 표정에는 낭패감이 가득했다. 거실에서 화장실로 가는 얕은 경사를 디딜 때조차 고통스러워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더니 한참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온 어깨에 목발이 끼워져 있었다. 무슨 일이 크게 잘못된 얼굴이었다.


주말을 종일 누워 지내는 건 L답지 않았지만, 그는 주말 내내 매트리스에 있거나 힘겹게 내 위로 올라와 기대있었다. 월요일 아침에 집을 나설 때는 아무것도 마시거나 먹지 않았다. 몇 시간 뒤 칫솔, 치약, 팬티 몇 벌, 빵 몇 개를 꺼내 간 L은 일주일간 집을 비웠다. 비우다 만 집은 버려야 할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 이도 저도 아닌 것들이 온통 밖으로 나와 혼란한 상태로 멈추었다. 가득 찬 쓰레기봉투가 엉성하게 묶인 채로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음식물 쓰레기는 버리고 나간 게 다행이었다.


일주일 만에 L은 누군가와 함께 돌아왔다. 목발을 짚은 채 현관을 넘은 L의 가방을 내린 그는 거대한 현관을 차지하고 있던 쓰레기봉투와 함께 사라졌다. 헬쓱해진 L은 어지러진 집을 훑어보더니 에어컨을 틀고 정리를 시작했다. 목발을 짚고도 잘 걸었다. 다만 전보다 많은 시간이 들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는 밀릴까봐 어딘가를 붙잡아야 했다. 마음이 급하면 오른 다리로 겅중 겅중 뛰기도 했다. 냉장고에 빨래를 모조리 넣고, 한 손에는 청소포를 붙인 밀대를 잡고 한 손에는 목발을 낀 채로 먼지를 쓸었다. 평소면 20분도 걸리지 않을 청소에 두시간이 걸렸지만 다 끝내고 배달로 주문한 아이스 라떼를 먹는 L의 얼굴이 개운했다.


돌아온 그는 버리다 만 것들을 다시 버렸다. 짐을 버리는 내내 사람들이 오갔다. K를 제외하고는 손님을 잘 부르지 않는 편이었는데, 다리를 다치고 나서부터는 방법이 없는 듯했다. 집에 온 사람들은 토끼 장식함이며 한 번도 안 쓴 블루투스 마이크를 가져가기도 하고, 금세 차는 50L 쓰레기봉투를 버렸다. 그런 손님 중에는 K도 있었다. L은 그날 유독 집을 더 쓸고 닦았다. K는 문을 열자마자 어쩔 수 없이 마주한 L의 목발을 보고 말을 잃었다. L은 목발에 점점 익숙해져 못하는 일이 없었지만 그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익숙한 손님인 K는 배달 음식을 받고 설거지를 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청소포를 끼워 이미 깨끗한 집을 닦고 쓰레기를 몇 번이나 버리러 내려갔다. 오랜만에 내 위로 앉아 편안함을 만끽하다가 눈물을 쏟았다. K가 “안 가면 안돼?” “가지마”라는 말을 할 때마다 L은 울었으나 ‘그럴게’라는 말은 끝까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L은 통화를 하다가 소리를 질렀다. 몇몇 단어가 들렸는데 ‘전쟁터’, ‘죽으러 가는 것’, ‘어쩌자고’, ‘그래야 마음이 풀리겠냐’ 등이었다. 하루 전에는 장문의 문자와 각종 기사가 L의 화면 위로 쉴 틈 없이 도착했다. L은 악을 지르며 울었다. 잠자리에 누웠지만 뒤척였다. 이럴 때면 언제나 그렇듯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발목을 잡는”, “내 아킬레스 건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언제까지 내가 엄마의 불안을 떠안아야 해?” 등의 말을 했다. 통화 끝에 그는 “더는 못 하겠어”라고 했다. 그건 말이라기보다는 포기였다. L은 그날 밤, 부모에 대한 기대, 평생을 구걸하던 진짜 애정 같은 것을 마음에서 끊어냈다.



L은 연이은 상실의 이유를 찾으려다 어느날 ‘아홉 수’를 검색했다. 사주에서는 나이를 만으로 센다는 설명을 읽고 “아!”하는 단말마를 내질렀다. 이유를 알았다고 달라지는 건 아닐 텐데, 이유 있는 고통은 덜 아프다는 듯이.


유소년기의 성장통은 신체적인 통증으로 닥친다. 십 년에 한 번, 나이의 앞자리 수를 바꾸는 해에 찾아오는 불운은 상실이 성장의 조건이라는 의미일까. K를 잃고 전방 십자 인대를 잃고 오래 마음을 들여 꾸몄던 집을 잃고 부모를 향한 기대를 끊고 매일 휴식하던 나를 동생에게 보냈다. 자신이 품을 들였던 많은 것들을 버리고 잃고 상실했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하게 축구를 하고 마음의 문을 열고 자유를 얻고 부모로부터 놓여나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상실은 L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버릴 것을 고르는 건 오롯이 L의 일이었다. 버릴 핑계를 오래 기다려온 사람처럼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버리는 표정에는 개운함이 있었다. 나는 한 인간이 스스로 제 생의 일부를 부수는 일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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