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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Apr 25. 2022

이별 2주차: 요가로는 눈물 붓기가 안 빠진다.

밋밋한 눈꺼풀에 힘을 준 끝에 한 줄의 쌍꺼풀을 살린 채로 출근. 구구남친에게 차인 7년 전, 동생은 사람이 너무 울어서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단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다. 지난 한 달간 울다가 잠든 시간은 열흘도 안된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별을 보내고 있다. 잘.

이별을 잘 보낸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별했다는 소식에 A는 당장 “식욕과 수면욕을 잃어서는 안돼.”라고 명령했다. 명령이 통했는지 매끼를 잘 먹다 못해 다이어트를 할 지경이며 마그네슘과 운동의 영향으로 일곱 시간씩 잔다.


달라진 건 좀 있다.

걔를 끌어안고 있으면 자도 자도 졸리던 주말이 부지런해졌다. 연인의 몸 냄새가 수면 호르몬을 어쩌구 저쩐다던데, 내 호르몬으로는 일곱 시간이 한계인가보다.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자기 전과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수면과 식사를 공유하던 상대가 사라졌다.

갑자기 금토일이 생겼다. 2년 8개월동안 한 주는 월화수목요일과 금요일 낮까지가 한 세트, 금요일 저녁부터 걔가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일요일 낮까지가 한 세트였다. 앞 세트는 일과 운동과 사회적 자아가 이끌어갔으며 금요일부터는 산책과 스킨십과 어리광으로 뭉쳐있다. 내가 얼마나 무능한 인간인지를 알았다. 걔가 하라고 하지 않으면 씻는 것도 귀찮았다. 씻으라고 호들갑을 떠는 말투와 끌어안아서 욕실 앞으로 데려다주는 손길이 좋았다. 동생이 태어난 이후로는 엄마 앞에서도 어른스러웠는데 금요일 저녁, 걔가 우리 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난 아무것도 아닌 게 됐다.


걔는 잠과 어리광과 집과 따뜻함의 다른 말이었다. 가정을 꾸리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는데 자꾸 생각이 났다. 요리가 싫지 않았다. 난 뭘 썰고 넌 뭘 볶고, 함께 차린 식사가 제일 맛있었다. 설거지하는 걔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등에 기대 있으면 진짜 집다웠다.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말을 마구 던지는 곳이 아니고 혼자서 회사 일로 심란하지 않고 친구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어쩔 줄 모르는 곳이 아니라. 먼저 일어나 얼굴의 눈썹뼈를 슬슬 쓸다가 잠이 묻어있는 걔의 손길에 다시 침대로 들어가는 곳. 혼자서 못 보던 스릴러물도 보고 식사하는 내내 이 음식은 어떻고 뭐가 좋은지를 이야기하는 곳. 떨어지지 못한 눈물을 마구 쏟을 수 있는 품이 있는.


다시 사회적 자아와 일과 운동이 시간을 차지했다. 헤어졌다는 말에 연락 온 친구들에게 괜찮다고 했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냥, 그냥, 좀, 세상이 조용해졌다. 동창의 남자친구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너는 언제쯤 자리를 잡을지를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보면 눈에 안 좋다던데 이젠 안 본다. 축구 수업 주말반을 등록했다. 진지한 영화도 맘껏 보고 주말 약속도 잡을 수 있다. 맛집을 찾으면 바로 링크를 보낼 상대가 사라졌지만,


이별에 적응 중이다. 우리는 나쁘게 헤어지지 않았다고 위로하면서 이별을 손 위에 놓고 굴려본다. 눈물이 많이 나는 밤에는 이사를 고민한다. 이 집에는 온통 설거지하는, 칼각으로 빨래를 개는, 섬유유연제를 듬뿍 넣는, 까치집을 한, 네가 있어서


이별 4주 차,

아직은 눈이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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