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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x Aug 11. 2020

그의 몸에는 나의 피가 흐른다

아들의 버저비터

버저비터의 순간. 슛을 성공한 11번이 큰 아들.

나는 운동을 좋아하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어릴 적부터 운동 신경이 좋았다. 초등학교 때는 학교 대표 육상선수로 선발되어 100m, 200m, 400m 계주 선수로 뛰었고, 중학교 때는 반 대표로 뽑혀서 교내 축구대회 우승의 주역이 되었으며, 이어지는 학창 시절에도 축구, 야구, 농구를 즐겨했다.(중고등학교 때는 반대항 콜라 값 내기 혹은 몇천 원 내기 축구, 야구 경기를 하곤 했고, 승리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친구들과 떡볶이와 아이스크림 등을 사 먹곤 했다. 몇몇 친구들은 그런 나를 가리켜 스포츠 재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버지는 축구 명문고의 후원을 하며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어린 나를 데리고 효창운동장으로 응원을 가기도 했다. 아버지가 후원하던 선수 중 한 명은 종친이었는데, 축구 명문인 대학교로 진학했고, 우리나라에 프로축구가 태동하기 전 세미프로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인 '할렐루야' 선수였으며, 국가대표 화랑팀에서 뛰기도 했다.(신문선, 정해원, 이장수, 장외룡 등이 같은 대학 선수였다. 그리고, 당시엔 국가대표 팀으로 화랑과 충무가 있었는데, 화랑이 실질적인 국가대표 팀이었고 충무는 2진급이었다) 나중에야 들은 이야기인데 아버지는 내가 축구 선수가 되기를 은근히 기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예상외로 내가 공부에 두각을 나타나는 바람에 그 꿈을 포기하셨다고 한다.(그 공부에 대한 두각은 몇 년 후 사그라들었으며, 그리고 정작 나는 야구 선수가 되고 싶었다)


대학 때도 체육대회가 열리면, 나는 축구, 농구, 족구, 배구 등의 과 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입에 단내 나도록 뛰었는데, 이상하게도 네트가 있는 탁구, 테니스 등의 종목은 취약했다.(족구는 축구의 범주여서인지 예외. 배구는 선수 부족으로 선발됨) 사회생활을 하면서 조기축구에 입문하게 됐는데, 새벽이슬 맞고 나가서 몇 게임하고는 점심때부터 주야장천 술을 퍼마시고 곤죽이 되어 또다시 새벽이슬을 맞고 귀가하는 바람에 와이프에게 심한 질타를 받기했다. 그리고 야구부가 있던 고등학교 출신이라, 졸업생 동문야구단에 가입을 하게 되어 드디어 사회인 야구에 입문하게 됐는데, 단지 기수가 높다는 이유로 선수로는 별로 뛰지 못하고 배팅오더, 투수진 운영, 타격과 수비, 주루 코치를 전담하는 감독을 하게 되었다.(감독 시절, 한 때 '야신'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야구판이라고 축구와 다를 게 있으랴. 경기가 끝나면, 경기 분석, 다음 경기 준비 등을 핑계로 부어라 마셔라로 주말을 통째로 날리는 통에 와이프의 원성을 또다시 들어야 했다. 그리고는 은퇴.(자랑할만한 것은 한 리그에서 몸에 맞는 볼(hit by pitched ball) 1위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 ㅎㅎ)


그런 연유로 나는 친구를 평가하는 기준이 축구, 더 나아가 운동을 잘하냐 못하냐였다. 어려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라면 축구는 기본적으로 조금 해야 하는 운동이고 설사 못하더라도 조금 신경 쓰고 잘하고자 하면 잘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이러던 내가 급작스럽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 사건이 생기고 만다. 나와 달리 와이프는 운동신경이 좋지 않았는데, 초등학생이던 큰 아들이 엄마들, 친구들과 볼링장을 가게 됐다고 한다. 아들은 친구들과 달리 아빠 엄마와 볼링을 쳐본 적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가 친구들보다 우월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정반대. 속이 상한 아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엄마 앞에서 통곡을 하며 외쳤다고 한다.

"난 엄마를 닮아 운동 신경이 나빠. 운동은 신경은 아빠를 닮았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아들에게 같이 캐치볼도 하고 축구도 하면서 여러 가지 기본적인 기술과 노하우를 알려주곤 했다. 시간이 날 때면 야구장과 축구장을 데리고 가 구경을 하면서 게임의 룰과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달리기를 할 때, 스타트하는 방법, 달릴 때 무릎을 높이고 적당한 각도로 팔을 흔들어야 하는 법, 계주를 할 때 바통을 주고받는 법 등도 가르쳐 주었다. 아들은 서툴긴 했지만, 열심히 듣고 따라 하곤 했다. 나는 계속해서 칭찬을 하며 다독여주고 운동에 관심을 갖도록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던 중, 와이프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엄마들과 의기투합하여 여러 아이들과 함께 농구 수업을 받게 되었고, 결국엔 그 아이들만의 팀을 결성하게 되었다. 아들은 주말이면 농구 수업을 받으러 갔고, 나는 농구 유니폼을 입은 아들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아이들 팀과 다른 팀 간의 토너먼트 경기가 있다고 해서 구경 겸 응원을 가게 되었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모계 혈통의 부족한 운동 신경이 우성인자로 주어진 아들임을 알기에, 그저 열심히 뛰며 팀 플레이하는 모습을 기대했었다.


경기 시작, 상대편에 기민하게 움직이는 선수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중학교 때까지 농구선수 생활을 한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팀에는 한기범, 김유택에 버금가는 더블 포스트가 있어 그나마 근근이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추격하면 도망가고 추격하면 도망하고, 선수 출신 아이의 움직임은 역시 남달랐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점수는 2점 차. '그래, 2점이라도 넣고 연장으로 가자'하는 순간, 아들이 공을 잡았고 3점 라인 밖에서 던진 슛이 림을 갈랐다. 그리고, 부족한 운동 신경을 선물한 아들 모친의 함성이 코트에 울려 퍼졌다.


-이 자리를 빌려, 축구 못한다고 엔트리에 넣어주지 않아 경기에서 뛰지 못하고, 떡볶이도 안사준 친구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합니다.


-그러게 내 아들로 태어나지 그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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