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ed by 비끗
손을 씻으러 회사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 옆 팀 직원이 세면대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간단한 목례 인사를 한 후 손에 비누칠을 했다. 수돗물 흐르는 소리만 가득한 와중에 그가 내게 점심 식사를 했느냐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활짝 웃으며 식사를 했다고 답하곤 그에게도 같은 질문을 되물었다. 그도 상냥한 표정으로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정적. 그가 입을 헹구며 내 립스틱이 어느 회사 제품인지를 물어왔다. “OO 건데 로드샵 제품이라 가격도 저렴해요. 이거 좋아요.” 내가 알려준 제품명을 따라 외며 그가 작게 감탄했다. 양치질을 마치며 뒷정리를 하는 그는 편안해 보였다. 얼마든지 또 다른 화제를 꺼낼 수도, 내 쪽에서 대화의 공을 던져온다면 기꺼이 받아줄 수도 있을 것 같은 긴장감 없는 표정. 그의 무방비한 얼굴로 자꾸만 슬쩍슬쩍 눈길이 갔다. 웬만해선 꼼짝하지 않는 중세시대 성문 같은 마음의 문이 나도 몰래 끼익- 열리고 있었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혹시 양치질을 마친 그도 곧이어 화장실을 나와 다시 마주치는 상황이 생길까 봐 걸음이 빨라졌다. 복도를 지나 자리로 돌아오는 길, 열린 마음의 문 틈으로 서늘한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신은 만약 퇴근길 몇 년 전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 있는 직장상사와 엘레베이터를 타게 된다면 어떤 행동을 보이는가? 혹은 방금처럼 얼굴만 아는 정도인 옆 부서 직원과 화장실 세면대 앞에 나란히 서게 된다면? 친밀한 사이도, 모르는 사이도 아닌 사람과 단 둘이 있는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만약의 만약에,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그 직장상사에 대해 회사에 몇 안 되는 괜찮은 리더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화장실에서 만난 옆 팀 직원의 상냥함에 반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열려버렸다면? 그렇다면 부러 말을 붙이고 친밀함을 표현하겠는가? 잘 지내냐는 안부나 하다못해 오늘의 날씨, 점심 메뉴 이야기, 나아가 언제 함께 밥 한 번 먹자는 제안이라도 해보겠는가? “당연하지, 그게 뭐 어렵나?”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이 무척 부럽고 신기하다. 당신은 능력 있는 탁구선수처럼 당신이 품은 마음을 상대방과 핑-퐁-핑-퐁 할 줄 아는 건강한 사람이다.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 알고, 상대방이 전해오는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는다. 이유 없이 고개를 돌리지 않고 설명 없이 자리를 뜨지 않는다.
반면 나의 가장 깊은 곳, 그늘지고 축축한 골짜기에 살고 있는 그 작은 개구리는 수줍음이 지나치다. 개구리가 견딜 수 없어하는 상황은 싫어하는 사람과의 독대가 아니라 오히려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칠 때이다. 부끄러움이 불러오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옥수수가 팝콘이 되는 순간처럼 튕겨져 나가는 것이다. 언젠가 개구리에게 따져 물은 적이 있다. 좋으면 가까워지고 싶고 싫으면 멀어지고 싶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왜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앞에 서는 것을 거부하느냐고. 개구리는 씩씩거리는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의 양 볼이 슬그머니 분홍빛으로 물들더니, 잠시 후 내 어깨를 도움닫기 삼아 등 뒤로 팔-짝 사라져 버렸다.
일상적으로 처음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사실 우리가 서로 안 친하다는 것을 들키는 것이다. 불편한 사이일수록 감쪽같은 얼굴로 과장되게 친한 척을 해야 점차 ‘척’이 사라지고 실제로 친한 사이가 된다. 부자연스러운 연기가 드라마를 망치듯 우리 사이의 어색한 속마음이 드러날 때 그 관계는 영영 어색해지고 만다. 하지만 나의 개구리는 정극 연기에 영 소질이 없다. 도대체 어떻게 오르막을 웃으며 오르고 내리막을 애쓰며 내려갈 수 있느냐는 듯 낯선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순리를 거스르지 못한다. 아직 어렵고 불편한 상대와 어렵고 불편한 시간을 보내며 딱딱한 마음이 말랑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수줍음이 무던해지기까지 일정한 기간 동안 관계의 어려움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와 사람들 사이에는 매듭이 걸리지 않고 자꾸 미끄러진다. 상대방이 거리감을 좁히려고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무렵에 나는 그가 썩 괜찮다고 느낄수록 표정이 굳고 말을 잃어버린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적극적으로 답하기, 활짝 웃기라 리액션에 최선을 다하지만 내 쪽에서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끝내 내지 못한다. 내가 가진 에너지의 총량이 낯선 사람에게 낯을 가리는 순리를 거스르는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부족한 것이다. 나름대로 힘을 내보려 수면 아래로 발을 구르고, 마음의 불에 부채질을 해보지만 몸은 점점 가라앉고 불씨는 꺼져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상대방이 혼자만의 노력에 지쳐 저 사람은 나와 친해지고 싶지 않구나, 나를 불편해하는 구나라는 오해를 품게 될 무렵, 그제서야 내 마음속 나무에 아주 작은 꽃망울이 맺힌다. 꽃망울은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보일만큼 아직 작은데 이미 내게 할 만큼 한 사람들은 나를 들여다봐 줄 마음이 이제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꽃망울을 볼 수가 없다. 저기 잠시만요, 조금만 있으면 꽃이 피어요.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또 한 사람을 떠나보낸다. 만개한 꽃나무 아래에는 이번에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다. 이제야 겨우 꽃을 피워냈는데, 나 이제 우리가 될 준비가 됐는데.
퇴근 시간, 가방을 메고 회사를 나선다. 아까 같이 부담스러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안에 아무도 없기를 바라면서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땡!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문득, 내게도 버튼 같은 것이 있고 버튼을 누르면 이런 소리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뜸 들이기가 시작되었습니다.”
Feat. 늘 짝사랑, 혼자만의 술래잡기, 서랍 속엔 부치지 못한 편지들이 한가득
혹시 누군가 세상에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고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고 느낀다면 당신 자신의 그 판단을 너무 믿지 마시길. 당신에게 한 번도 말을 붙여본 적 없고, 거리에서 당신을 마주치면 반대방향으로 피해 돌아가는 내가 한 박자 뒤에 기둥 뒤에서 당신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