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ed by 비끗
자려고 누웠는데 딸꾹질이 시작됐다. 허리를 숙인 채 물을 마시고 숨을 참아보아도 멈추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딸꾹질을 한 남자는 1분에 40번 딸꾹질을 하며 68년을 살았다고 한다. 나의 딸꾹질은 오래지 않아 멈출 거란 걸 알지만 딸꾹질을 하는 동안에는 왠지 이 통제불가능함이 68년만큼 지속될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 든다. 고요하고 어두운 새벽, 침대에 앉아 딸꾹질이 멈추길 기다린다. 멈출 듯 멈추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다 보면 대체 언제 멈춰줄 셈인가, 하는 질문이 절로 든다. 의지의 영역 바깥에 있는, 단지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 순간 나는 을이다. 기다리고 있는 무언가가(또는 순간이) 나타날 때까지 스스로의 무방비함과 나약함을 실감하며 계속, 기다린다. 이쯤이면 멈췄으려나 싶어 마음을 놓으면 딸꾹, 이제야말로 진짜 멈췄겠지 하면 딸꾹. 또 방심했다가 또 놀란다. 방심하지 않고 놀라지 않기 위해서 예민하게 몸의 반응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고요하고 어두운 새벽 침대에 앉아 딸꾹질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딸꾹질이 멈췄는지 확인하려다가 어느새 다음번 딸꾹,을 기다리는 데 더 몰두하게 되어버린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딸꾹질은 바로 그때 멈춘다.
사실 이건 모두 개구리 한 마리 때문이다. 나의 가장 깊은 곳, 그늘지고 축축한 골짜기에 살고 있는 작은 개구리 한 마리가 이번엔 딸꾹을 기다리는 내 마음을 읽어내고는 다시 내 뜻과 반대로 딸꾹질을 멈춰버린 것이다. 작은 개구리는 딸꾹질에 있어서만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개구리는 나의 본체이다. 겉으로 보이는 내 몸은 다만 숙주에 불과할 뿐 내 머리로 생각하고 팔다리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모든 결정과 실행은 사실 개구리의 뜻에 따른 순순한 움직임이다. 무엇이든 개구리가 결정하는 대로 나는 도리없이 따라야 한다.
나와 대치한 개구리가 내 배꼽 언저리를 보고 있다. 내 눈을 마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나의 안위 따위엔 관심도 없고 개구리 자신의 의중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이다. 오랜 대치 상황에 맥이 풀리려는 찰나 개구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팔-짝 튀어 오른다. 반 박자 뒤에 나는 발을 삐끗하며 개구리를 쫓기 시작한다. 속을 알 수 없는 개구리 한 마리가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아무런 맥락도 목적도 없이 튀어 오르면 나는 팔을 쭉 뻗은 채 부지런히 그를 따라 뛰어다닌다. 잡힐 듯 잡힐 리가 없는 개구리. 멈출 듯 멈추지 않는 딸꾹질처럼. 개구리의 난데없는 결정에 따른 결과를 감당하는 것은 모두 내 몫이다. 그 팔짝팔짝 때문에 내 일상은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엇박자로 흘러간다.
어제 저녁에도 나는 개구리를 쫓아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의 반대방향 행 지하철을 타는 바람에 지각을 했다. 오늘 아침엔 긴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갑자기 개구리가 돌변해서 아무도 밀지 않았는데 혼자서 계단을 주르륵 미끄러졌다. 작은 개구리는 내 일상을 배배 꼬고 미끄러지게 한다. 개구리를 쫒는 상황에선 익숙한 길도 멀리 돌아가고, 늘 도를 아십니까 묻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길목을 지나게 된다. 저기 친구가 있다는 개구리의 싸인에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다가가보면 알고보니 모르는 사람이라 이상한 눈초리를 받고, 좀 지나가줬으면 하는 누군가의 곤란한 질문은 남몰래 개구리를 떨치려는 나의 수선스러움이 눈에 띄어 늘 내가 당첨이다. 그 때마다 당황해하는 나를 쓱 한 번 돌아보고는 다시 제 갈 길을 가버리는 나의 개구리를 나는 말릴 수가 없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돌변한 개구리의 뒤를 정신없이 쫓고 있는 내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면 사진 속 나는 마냥 울상을 짓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 삐끗하고 빗겨가고 미끄러지고 어긋나는 상황들을 맞닥뜨렸을 때 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나, 그 마음을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스스로가 우스워 킥킥거리고 있는 손톱만 한 나를 볼 수 있다. 나의 곤경에 내가 웃는다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이긴 하지만, 일상의 크고 작은 일들을 미끄러지지 않고 해내는 사람들 속에서 아랑곳없이 냅다 넘어져버린 내 모습을 보며 (그게 비롯 내 스스로에 대한 곤경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넘어짐에 어떤 거대한 문제의식이나 세상을 향한 반항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자의적 선택이 아니라 나는 정말로 남들처럼 가뿐하게 잘해보려 했던 상황에서 일어나는 어긋남이기 때문에 이건 순전히 매번 새로운 방식으로 상황을 망치는 개구리의 창의성의 산물이다.
비가 오는 날 멀리 딸꾹 딸꾹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진창에 주저앉아 비를 맞고 있다. 어제 새로 산 아이보리색 트위드 자켓에 더러운 빗물이 물들고 있다. 축 가라앉은 머리카락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진다. 언제 멈춰 줄 셈인가, 하는 질문이 절로 들었다가 서서히 이제와서 어쩌겠는가, 하는 질문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신발주머니를 신나게 휘두르며 일부러 빗물이 고여있는 웅덩이만 골라 첨벙청범 뛰어다녔던 것처럼 이제 나는 비를 피해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얼마든지 비를 맞는 사람이다. 오늘도 곤경에 빠졌지만, 곤경에서 벗어나는 일은 꽤 고되고 번거롭겠지만, 개구리와 함께 팔짝팔짝 뛰다 보면 그렇다고 벗어나지 못했던 곤경도 없었다는 걸 안다. 그렇다. 이건 모두 개구리 한 마리 때문이다.
이제부터의 이야기들은 나의 작은 개구리의 자서전이 되겠다. 개구리가 나를 어떻게 배신했고, 그래서 내가 어떻게 난처했는지, 그 곤란한 일들이 끝내 수습이 되었든 되지 않았든 내가 남몰래 손톱만 한 마음으로 그 곤경을 어떻게 즐겼는지 소개할 참이다. 어쩌면 새빨간 펜으로 한 획 한 획 바를 정자를 새기는 배신의 기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싹트는 배신 사이에서 우리의 관계는 무지막지하게 원만해질 것이다. 개구리 덕분에 나는 오늘도 길을 멀리 돌아간다. 팔짝 튀어 오르는 뒷다리를 쫓아 한 번도 가본 적 없던 길을 헐레벌떡 뛰어가다가 올해 첫 벚꽃도 보았다. 그럼에도 미화하고 싶지 않다. 애써 개구리에게 서사를 붙여주지도 않을 것이다. 이건 그냥, 지독한 개구리 한 마리와 그의 숙주가 미끄러지는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