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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킨좀비 Jul 27. 2024

좌초, 시작은 자초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초조의 미끄러짐 첫 번째 이야기

시작은 ‘자초’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저는 불행을 얼마간 자초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약속 시간을 앞두고 책을 펼쳐드는 것, 다음 날 피곤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새벽 4시까지 잠에 들지 않는 것과 같이 불행으로 귀결될 일들을 스스로 끌어들이는 것이지요.

인간을 학습하는 동물이라고 하던가요?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종은 저에겐 좀 버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그로 인한 불행을 자초해 왔으니까요.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자초’의 ‘자’가 스스로 자(自)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티셔츠가 흠뻑 젖을 만큼 뛰면서 늦게 출발한 것을 후회하는 경험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후회가 돌아보는 것은 살아온 인생 그 자체입니다. 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다음 날에도 같은 시각에 뛰고 있습니다. 불가항력입니다. 매일 아침 신도 찾아보고 악마도 찾아보고, 내 안의 무의식에 호소했다가 이성에 돌팔매질을 하기도 합니다. 소용없습니다. 오늘 울어도 내일 또 지각입니다. 거기에는 학습 능력은 물론 저 자신의 의지란 일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좌초’되어 가는 중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주 쓰는 근육이 발달하기 마련이고, 발달된 근육이 있으면 그 근육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 마련입니다. 그 오랜 시간 불행을 자초하면서 제게는 어떤 근육이 발달되었던 걸까요? 아마도 실수를 저질러놓고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근육, 그런 것들 아니었을까요. 그런 근육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으니 인생에는 실수와 그로 인한 불행이 만연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연속 3일 간 지각을 했다면, 그날 밤 자기 직전에 어떤 일을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1. 늦게 출발하지 않기 위해 루틴을 손 본다. (30분 일찍 일어나기, 씻는 시간 단축하기, 옷 미리 골라놓기, 준비 세션별로 알람 맞춰놓기 등.)

2. 늦게 출발했을 때 써먹을 수 있는 비장의 수를 생각해 낸다. (환승역까지 돌아가지 않고 택시 타고 지하철 노선 가로지르기, 휴대용 킥보드로 환승역 갈아타는 구간 주파하기, 지하철-버스-자전거-지하철 연동으로 최단거리 루트 밟기 등.)


제 경우 1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출발 전에 여유 시간이 생기면 여지없이 불행을 자초하는 습관이 새로운 사건을 만들어냅니다. 앞머리를 자르고 싶어지거나, 재미있는 아침 방송을 발견하거나, 이 시간대에는 구름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또 늦게 출발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2안입니다. 2안은 늦게 출발한 제게 지각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대부분 면하게 해 줍니다(단, 초기 시행착오 기간 필요). 1안의 실패와 2안의 성공,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면 무의식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사실 늦게 출발해도 괜찮은 거 아닐까? 늦게 출발하는 것과 지각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긴 하는 걸까? 지각이라는 결과는 오로지 2안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 결국 지각을 피하기 위해 1안을 선택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유효한 것은 2안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어느새 사고 체계는 자연스럽게 두 가지 선택지만을 떠올립니다.   


1. 지각을 할 것인가.
2. 고통과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지각을 피할 것인가.


지각을 할 수는 없으니(저는 지각을 죄악이라 생각합니다), 고통과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지각을 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매일 아침마다 티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뛰고, 교통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면서 최적의 루트를 체크하며 노심초사하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감내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늦게 출발하는 것을 자초하다 보니 그것을 만회하기 위한 대안을 발달시키게 되고, 대안에 대한 의존은 늦게 출발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이성적・경험적 절차를 밟아 영구히 배제시켜 버립니다. 그 결과 매일 지각과 사투를 벌이며, 고통과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살아가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 자초한 일이지만 이 굴레에는 더 이상 스스로 자(自)가 없습니다. 불행을 자초하는 습관에 좌초되어 가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행동해도 결과적으로 괜찮다는 것을 학습한 것 아닐까? 그러니 어쨌든 너는 학습하는 동물이되 잘못 학습한 동물이다.’라는 피드백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학습이란 것은 의식적인 일인데, 제 경우에는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고 있으니 길들여진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길들임은 상벌에 의해 이뤄지고, 상은 해당 행동을 촉구하고 벌은 해당 행동을 억제시킵니다. 그렇다면 고통과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불행을 자초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압도적인 도파민, 그게 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늦게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각을 하지 않았을 때의 성취감, 모든 계산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이론적으로만 가능했던 일을 실현시켰을 때의 전율, 그 ‘해냈다’는 감각을 매일 아침 맛보는 것은 특별한 경험입니다.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스스로의 업적에 흡족해하며 이 좌초된 생활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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