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추억 여행기
86. 인간에 대한 존엄, 1985
봉제공장 다니다 운이 좋아 4년제 대학을 들어갔다.
대학 캠퍼스는 별천지였다.
새내기 대학생의 봄은 단체로 구입한
노란색 학과 티셔츠만큼이나 화사했다.
하지만 돌아서면 세상은 독재에 신음하는
회색이었다.
yellow와 gray의 부조화.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준비된 '학보사 기자'였다.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들어가면
대학신문사 만화 기자가 되리라 다짐했었다.
드디어 85년 4월, 학보사 수습기자가 되었다.
80년대 대학신문은 어느 대학을 막론하고
인기가 좋아 경쟁률이 제법 셌다.
학보사도 운동권과 비운동권으로 나뉘었지만
당시만 해도 노선투쟁이 심하지 않았고
민주화 대의에 모두 공감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열심히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데 집중했다.
더구나 제도권 언론은 모두 재갈이 물려
대안언론으로도 각광받았다.
스스로는 가장 재미있고 보람된 하루하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년기 나는 존재감 없는
단지 가끔씩 우울하거나 책에 빠져 사는
평범한 문학소년이었는데,
이곳에서 나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만화 또는 성실함 뭐 그런 것으로...
열정과 힘이 솟아났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 그때 많이 바뀌었다.
어느 날 사회부 수습이던 내게
2학년 혈기왕성한 선배가
서울로 기획 취재를 가자고 했다.
아마도 노동자의 날인 5월 1일
청계천 피복노조와
전태일 기념사업회를 취재하려 했던 것 같다.
어리바리 나는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4월 말 서울로 향했다.
제일 먼저 평화시장 인근 노조 사무실을 찾았다.
당연히 사무실은 전경들 차지였고
당연하게도 우리는 입구에서 쫓겨났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동대문 어디메쯤 언덕 중간에 있던
기와집 한옥에 자리한 '평화의 집'을 찾았다.
노동자들의 쉼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금지된 노동자의 날 기념식을
예서 개최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행사 준비로 바쁜 와중에 우리가 인사를 했더니
키가 작고 얼굴이 동안인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두 손을 맞잡고 우리를 맞아 주셨다.
취재를 위해 번잡한 바깥 대신 사랑방으로
우리를 데려가셨다.
여사님은 우리들에게 밥부터 먹였다.
잡곡밥에 단무지가 전부였지만
어떻게 해서든 끼니를 챙겨주시고 싶으셨나 보다.
지금 내가 당시 그 분과 같은 나이대다.
되짚어 생각해보니
막내아들 같고
지방에서 취재하겠다고 온
갓 20살 넘은 우리가 대견하셨나 보다.
2시간 동안 진지하게 인터뷰를 했고
마지막에 귀한 사진이며 자료를 많이 주셨다.
여사님과 선배는 분명히 밖에서 진을 치고 있는
사복형사들에게 자료를 모두 뺏길 걸 예상했다.
지금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고육지책으로
선배 가방에는 뺏겨도 괜찮은 유인물을 넣고
귀한 사진은 내 점퍼 옷깃에 말아 넣었다.
다행히 기념식 전야제라서 그런가
골목 경비가 삼엄하지 않아 무사히 빠져나왔다.
고향 집이 멀지 않아 자료들을 무사히 백업! 하고
다음날 다시 평화의 집을 찾았다.
채 20평도 되지 않을 그 ㅁ자로 된 집 마당에
수십 명이 꽉 들어찼다.
언론은 우리와 외신기자,
그리고 동아일보뿐이었다.
문익환 목사님도
이런저런 유명인사도 참석했다.
결국 호기롭게 취재했던 그 탐방기사는
배포중지 당했고
우리들의 글과 사진은 매장되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리고...평화의 집에서의
그 긴장되고 떠들썩한 장면이
어느새 하얗게 변색된 채
수십 년이 흘렀다.
먹고 산다는 핑계로
민주화됐다는 연유로
나는 딸과 밀리오레는 갔어도
평화시장과 청계피복과
이소선 여사님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우연히 전태일 홈페이지를 들어갔다가
돌아가신 여사님을 보고
부채의식 같은 것이 올라왔다.
적어도 인간의 존엄성만큼은
온전히 부여잡고 사셨던 노동자의 어머니.
영면하소서.
평생 아들을 품었던 어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