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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헌 Sep 19. 2021

여로(旅路)

소소한 추억 여행기

34. 추석 큰집 가는 길, 1977


중부지방 산이 많은 동네

추석이면 날씨가 선선함을 넘어

약간 춥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추석이라 새 옷 새양말을 신고

가족 모두 일찍부터 서두른다.

엄마는 어제 큰집 음식 장만하고

밤늦게 오셨는데

또 새벽에 일어나서

집안일에 바쁘시다.


버스도 없으니 여섯 식구 모두

걸어 2Km 떨어진

시내 큰집을 간다.

사촌형제가 많아 차례상을 물리고 큰어머니가 왜 그렇게 과자와 사탕 나누기에 인색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아이 셋을 태우고 가끔

시내에 등교시켜 주던 씨름선수 출신

아버지라 하더라도

당신 짐 자전차에

여섯 식구 모두를 싣고 갈 수는 없다.

종종걸음으로 마을을 나서는데

아버지는 시내 갈 동안

아는 사람과 인사하느라 뒤쳐지고

나와 엄마는 먼저 몇백 미터는 앞섰다.


팔당상수원이라 내 고향은

늘 안개가 많은데

그래도 오늘은 잠이 확 깰 만큼 상쾌하다.


술막다리 건너자마자 군수 집이 있고

바로 그 옆이 큰댁이다.

아주 옛날 선술집이

개울가에 늘어서있었다 하여 술막다리고

군수네 친척집인지 구멍가게는

군수 집으로 불렸다.

명절 날 술막다리에서 아버지 4형제가 찍은 사진. 1978년

큰집은 목공소를 겸하고 있어서

각목 합판이 점령한 틈새로 들어가야 했고

집 전체에서 기분 좋은 나무 냄새가 났다.


집은 기와집이었는데

가게에 딸린 살림집이라

방 두 개 부엌 화장실 하나 단출했다.


안방은 크지 않아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림잡아 여섯 평 정도였던 것 같다.

장손 큰 형 방은 화장실 가는 길에

서너 평 되는 햇살 들기 어려운 어두운 방이었고

그나마 화장실엔 당시에 귀하다는

신문지가 반듯하게 오려져 놓여있었다.


안방에는 미소가 인상적인

사모관대 쪽두리 부부 인형도 있었고

부잣집 필수템 전축도 있었다.


평소 갈 때마다 늘 큰아버지는

정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이라는

LP판을 주로 많이 틀어 놓으셨다.

목공소를 운영했던 큰아버지.

“바다가 육지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배 떠난 부두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을.”

아직도 그 높은 음정과

처연한 가사, 구슬픈 분위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목공 일을 했던 청년 큰아버지가

감정이입을 했는지도 모를 일.


추석에 아버지 사형제 가족이 모이면

40명 남짓했다.

좁은 방에서 차례를 지내려면

군대 칼잠 자듯 몸을 밀착시켜야 했다.


상을 물리면 큰엄마가

사탕이며 약과 배분을 하시는데,

한두 살 터울 아이들이 너무 많아

색동저고리 무늬 사탕이며 과자는 

손톱만큼 쪼개 먹어야 했다.


그나마 오래간만에 맛보는 단 것이라

우리들 모두는 신났다.


성묘는 다시 어르신들 묘가 있는

우리 동네로 백홈을 하는데

동네에는 북적북적 사람들로

넘쳐난다.

동네는 이제 외지인들과 아파트 숲으로 둘러 쌓였다.

동네 앞 화학공장 앞마당에는

청년회 주최 배구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한참 힘이 남아도는 고등학교 형들과

서울에서 공장 다니는 형 누나들의

웃음소리에 동네는 간만에

활기가 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명절 특별 용돈으로

소년중앙 산 걸 돌려 보거나

특별부록으로 나온

종이 카메라 같은 걸 자랑하기에 바빴고

서울에서 오랜만에 내려온

이 집 저 집 사촌 또래들과

설날 이후 근황에 대해 묻고 답하곤 했다.

(그때 귀엽던 옆집 서울 동생은

20년 후 그집 할아버지 장례식 때 보니

무서운 마약단속 형사로 변해 있었다)


저녁이 되면 뒷동산 솔밭 특설무대에 차려진

콩쿠르대회에서는 동네 누나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최신가요를 열창한다.

오래간만에 송편 과자 같은 단 것과

기름진 음식 과식에

명절 다음날은 늘 배탈난

아이들이 많았다.

화장실을 들락거려도 아이들은

명절이 좋았다.

모두 해피한 날이니까.

잔디밭과 솔밭, 그리고 영동고속도로가 훠히 보이던 고갯길은 이제 잊혀진 옛길이 되고 말았다.

하늘하늘 코스모스가

마을 입구에 정렬해 있고

콩 팥 깨 들어있는 송편을 나누고

덕담을 주고받던 동네는


산업화 도시화로

집도 사람도 거의 사라져

원주민은 이제

10% 정도만 남았다.

나도 나머지 90%에 해당돼

그 마을 찾은 지 몇 년이 되었다.


어른들은 공원묘지 수목 아래에서

우리들은 시내 아파트나 빌라에서

추석을 보내지만


산에 밤나무 가득 차고

강아지들도 신났던

그때 그 추석날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가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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