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앙 일기 1 >
디모데 전서 1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본인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라고 말하고 있다. ‘괴수’란 악당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사도 바울은 본인이 죄인들 중에 우두머리처럼 제일 죄가 많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처음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할 때 내가 왜 죄인인지에 대해 전혀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지은 죄 때문에 우리 사람들에게는 태어나기 전부터 원죄가 있다는 목사님들의 말씀에 동의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도 바울이 말한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내 안의 수많은 죄들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가 기회만 주어지면 순간순간 내 안에서 비집고 나오는 죄덩어리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딸아이가 6살 때인가 보다.
옆집 아주머니가 암에 걸린 남편의 간병을 하러 가기 위해 두 아들을 내게 부탁을 한 적이 있다. 두 아들은 초등학생이라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저녁 식사만 해 줄 수 없냐고 부탁을 해 왔다.
“아이고…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흔쾌히 대답을 했다.
그날 저녁, 옆집 아들 두 명과 우리 딸을 위해 돈가스 3덩어리를 튀겼다. 카레 소스와 함께.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그리 요사스러울 줄 몰랐다.
‘어? 어쩌지… 가장 큰걸 우리 딸에게 주어야겠지.’
3덩어리의 돈가스 크기가 각각 달랐기 때문에 순간 동공이 흔들렸지만,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큰 돈가스에 눈이 가면서 우리 딸이 생각났고, 자동적으로 딸의 접시 위에 가장 큰 돈가스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돈가스를 두 접시에 담고는 아무 거리낌 없이 옆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점점 옆집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꺼림칙한 기분이 몽글몽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얄미운 짓인가?’
‘집에 아빠 엄마도 없는데…’
‘큰 걸로 가져왔어야 하나…’
우리 집과 옆집의 거리는 걸어서 1분도 안 걸릴 정도로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짧은 거리를 가는 동안 나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어쩌지… 다시 가서 바꿔올까?’
‘아니야! 제일 큰걸 우리 딸을 주는 게 맞아!’
‘아니야! 그래도 남을 먼저 챙겨야지’
‘아니야! 우리 딸이 먼저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래서 되겠어!’
내 안의 두 사람이 수없이 싸웠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가 돈가스를 바꿔오긴 했지만, 그때 나는 내 안에 있던 죄성을 보게 되었다.
결국 사람이란 타인보다는 본인, 자기 가족들을 먼저 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하! 바로 이게 내가 죄인이라는 증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배운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본성 : 죄성이라는 사실을 그때 깊이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나를 불편하게 하면 싫고, 내 것을 빼앗기면 기분 나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련의 모든 것들이 학습된 것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죄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 예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모두 다 죄인이다. 모두 다 부족하다.’라는 시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예전에 비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폭이 더 넓어지면서 부딪힘도 덜 했다.
그런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예수님이 오셨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다. 또한 내 안의 죄성들이 움직이려 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누그러지며 한없이 평온해짐을 느끼게 된다. 잘 안 될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누구나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내 안의 죄성이 꼼짝 못 하도록 단단히 붙들어 맬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