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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Dec 23. 2023

머리 하는 날

미용실 가는 길에 번호 따일 확률은?


저기요. 제가 친구랑 걸어가다 봤는데요.
죄송하지만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뭐야. 아주 클래식한 멘트네.

누군진 몰라도 아주 청춘이다, 청춘이야.'

라는 생각이 스친 순간,

멀끔한 성인 남자가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겨울철 내 살가죽 = 롱패딩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이런 제안을 듣기에 적합한(?) 행색은

못 된다 싶었기에 어버버 거릴 수밖에 없었달까요.


그런데 아마 화려하게 화장을 고,

반짝이는 원피스를 입었더라도 허둥대던

제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듯합니다.

제가 오랫동안 앓고 있는 이거든요.




오늘은 이 '병()' 대해서

더 자세히 고백해보려고 합니다.

마땅히 명명할 방법이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까요.

주로 보이는 증상들은 이렇습니다.


저는 평상시 몸무게에서 1kg만 빠져도

꽤나 심한 감기 몸살을 앓습니다.  

정말 우습죠.

그까짓 것, 화장실 한 번이면 되는데.


사실 몸살을 앓는 것 보다도

매일 아침 습관적으로 몸무게를 재고

겨우 0.5의 편차를 왔다 갔다 하는

'두 자릿수'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것에

방점을 찍을 수 있을 듯합니다.


또, 코로나 때문에 의무적으로 쓰던 마스크를

업무상 벗어야만 했을 때도 내심 마음고생을 했달까요.

만약 이런 증상을 병이라 할 수 있다면,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병을 앓고 있을 듯합니다.


Copyright. 시빅뉴스_기자 김연우(2022.07.24.)

 

'마기꾼'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니

사회인류학적으로도 여러 방면에서 해석할 수 있겠죠.

다수가 앓는 꽤나 고질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짧다면 짧은 제 인생을 놓고 보아도 이 일은

이미 10여 년 전에 시작되었으니까요.




이야. 그 옷이 저런 핏이 나냐.


한참 감수성 예민한 고2 여학생이

느끼기엔 너무나도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곱씹을수록 속이 상하는 그런 말을

그맘때쯤 들은 것 같습니다.


저는 기숙생활을 하는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미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공부만 열심히 하던 학생이었고요.


그렇다고 교우관계가 엉망인 건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생활 내내 입술에 틴트 한 번

바르지 않고 공부하기 바빴던 터라

연애나 이성에는 관심 둘 겨를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원만한 관계를 맺었던 것 같습니다.


카풀을 하던 친구 중 한 명이

소위 말하는 '뮤즈'였거든요.

어떻게 하면 그녀와 더 친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숱한 남학생들의 걱정부터,  

남 모르는 뮤즈의 고민까지 들어주며

그렇게 대나무 숲 역할을 해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내 머리에 뭔가 집어넣기 바빠

그 자리만 벗어나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깔끔하게

잊으니 얼마나 울창한 대나무 숲이었겠어요.


그러던 어느 날,

뮤즈와 함께 차를 타는 날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날씨는 너무 춥고,

친구 옷은 너무 얇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주 입던 집업을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기숙사 계단을 내려오고 있던

남학생 한 명이 그 모습을 보고 다짜고짜

"이야. 저 플리스가 그런 핏이 나는구나"라며,

제 딴에 개그였을 말을 던졌습니다.


그저 흩날려 사라졌으면 좋았을 눈송이가

그 짧은 찰나 뭉치가 되어버렸나 봅니다.

그로부터 벌써 몇 년째, 저는 그 안에 있는

돌멩이와 모래를 솎아내야 하는 걸 보면 말이죠.


아무 의미 없는 두 자리 숫자에 울고 웃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고,

누군가가 호감을 표시해도 '물음표'부터 떠오르는.


몇 년을 앓고 있는 증상을 진단하자면,

저는 꼭 이 날이 떠오릅니다.




미끄럼틀을 탈 수 있다면 참 재밌을 텐데


1학년 겨울교과에는 '눈송이'라는 차시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수많은 눈결정 이미지를 보았고,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 더욱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눈결정은 그때의 바람, 습도, 그리고

온도에 따라 다른 모양을 띄는 것이라고 합니다.

인공적으로 모든 조건을 맞추지 않는 이상

똑같은 모습이 되긴 어려운 것이지요.


12월 20일 출근길


어쩌면,

정말 어쩌면 우리 모두

겨울왕국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눈송이일 수도 있겠지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미움받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다르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예사롭지 않게 듣고 넘겼던 문장들이 사실은

우리 마음 깊이 박힌 정언일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 타인을 대할 때

결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까요.




오랜만에 한적한 아침을 맞이합니다.

학기 중에는 8시부터 밀려드는 썰물에 휩쓸려

정신없이 하루를 시작하곤 하는데

아이들이 없는 휑한 교실이라니.

오늘은 정말 색다른 하루입니다.


대구 답지 않게 휘날리는 눈발 덕분에

감상에 젖어 아침을 맞이하는 영광을 누리네요.

이 영광을 막 태어난 눈에게 돌리고 싶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굽실거리는 제 머리를

알아차린 아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던 찰나,

잊지 않고 얼음 한 조각은 꼭 제 몫으로

남겨 놓는 아이들이 있어 행복합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조용히 읊조리게 되네요.


그래, 얘들아.

선생님의 바뀐 헤어스타일보다

하얗게 뒤덮인 세상에 먼저 눈길이 가는

그 말간 마음을 항상 간직해 주렴.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더 많은 엘사와 안나가 등장하는

겨울왕국이 되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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