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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작가야 Dec 30. 2023

너는 나의 홍삼

8살의 애정표현


 어린이들에게서 부러운 이 있다면 바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어린이들은 수업 활동 중에도, 친구 및 교사와의 관계를 맺을 때에도 일관되게 솔직한 자세로 임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저는 올해도 어린이들의 일관성 있는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특출 난 재능도 없는데 이런 애정이라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생활하다 보면 제가 마치 일류 연예인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생각도 못한 방식으로 어린이들의 애정공세를 받게 되거든요. 물론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극성팬들도 있습니다만, 일상 속 느껴지는 소소한 감동이 모든 선생님으로 하여금 교직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리라 생각합니다.


 원래 마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이상하리만큼 어린이들의 마음은 선명하게 보입니다. 겨울을 맞아 우리네 마음 온도를 높이고자, 최근 제가 목격했던 어린이들의 순수함을 나눠보려 합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너 정말 창의적이구나!  
그런데 말이야, 어머니도 알고 계시지...?

어머님, 안 쓰시는 키보드 맞죠…?

 

 1학년 교실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양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년기의 몇 달이 얼마나 큰지 체감하고 싶다면 어느 초등학교든 1학년 교실을 살펴보면 됩니다. 그중에서도 ‘바로 2학년 올라가도 될 것 같은데’ 싶은 어린이가 한 두 명 꼭 있지요. 주경(*가명) 이는 딱 그런 학생입니다.


 주경이는 수학익힘책 풀기와 같은 정적인 활동부터, 축구 및 달리기 같은 동적인 활동까지 골고루 잘합니다. 특히 정적인 활동과 동적인 활동 사이 전환하는 시간이 짧은 데다 어떤 활동에도 잘 몰입하는 모습이 돋보이는 학생입니다. 또 남학생과 여학생을 굳이 편가르지 않고 놀아 학급에서 교우관계도 아주 뛰어나죠. 그런그런 학생이 다짜고짜 키보드 키판을 뜯어서 가져온 게 아니겠습니까.

 

‘1학년 말이라서 그런가 보다’, ‘여느 아이들처럼 장난이 치고 싶었나 보다’ 생각하며 놀란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꽤나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점잖게 물었죠.


키보드 자판을 빼서 색을 칠하고 스티커까지 붙이다니 아주 창의적인 걸~(칭찬), 혹시 이 사실을 어머님도 인지하고 계시니...?(본심)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키보드 자판, 주경이만의 업사이클링 작품이었습니다. 고장 난 키보드를 그냥 버리기 아까우니 키판을 하나씩 뽑아 색을 칠하고 꾸며 제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죠. 그리고 한 달여간 떨어져 지내야 할 담임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적어 선물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어린이들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백 한 가지 방법이 있는 듯합니다. 어른이 된 제가 싹 다 잊어버린, 아주 귀한 방법들을요.




선생님은 남아서 뭐해요?
일해요? 힘들어요?



 수현이(*)는 오늘도 하교 후가 더 바쁩니다. 점심 식사를 마친 뒤 교사 책상은 거의 수현이 차지가 됩니다. 수현이는 책상에 딱 붙어 한참을 '요요요' 시리즈를 반복하거든요. 선생님은 남아서 뭘 하냐, 일 하냐, 오늘도 바쁘냐. 질문 공세를 쏟다가 문뜩 무엇인가 생각난 듯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뭔가를 던지다시피 하고 교실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맞습니다. 제 손에 들린 '튼튼 쑥쑥 녹용홍삼'은 수현이가 주고 간 선물입니다. 8세가 이걸 줬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요. 너무 귀여워서 소장하고, 또 자랑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건 받을 수 없겠다 싶어 수현이 손을 꼭 잡고 이야기합니다.


 “수현아, 선생님은 학생들이 손수 만든 게 아니면 받을 수 없어. 뭔가를 받으면, 선물 때문에 너네를 좋아하는 것 같잖아. 이런 걸로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널 좋아해.” 선물 준 마음이 다치지 않을 만큼 다정하게, 그리고 쉽게 이야기를 했지만 수현이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저도 그런 거 다 알아요. 근데 선생님이 받아주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안-녕"

존댓말과 다급한 반말이 섞인 짧은 인사만 남기고 수현이는 쏜쌀같이 1학년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집니다.




 흔히 어린이를 바라볼 때 어린이는 작고 약해서 그저 미숙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들도 나름의 사회생활을 합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머랭쿠키만 건네다가, 어느 순간 내가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살필 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서서히 애정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여태 저는 교사로서 어린이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올바르게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각색 없이 받는 방법에 대해 지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오히려 제가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오롯이 받지 못할 때가 더 많다 싶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어린이들로부터 많이 배우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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