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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과 쌤 Jan 17. 2020

#5. 금식하는 사람의 마음

나는 아이들을 다 이해한 줄 알았다.

금식.


췌장염은 음식을 소화시키는 췌장액이 과하게 분비되어 염증을 만드는 병이다. 음식물을 입으로 먹게 되면 우리 몸은 췌장액을 분비하기 때문에 췌장염의 치료법은 금식이다. 물도 먹지 않는다. 의학용어로는 NPO라고 하는데 라틴어 Nil per os에서 유래하였고 영어로 바꾸면 Nothing by mouth, 입으로는 뭐든 넣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신 수액은 맞는다. 수액은 혈액으로 바로 흘러들어 가기 때문에 췌장액 분비를 촉진하지 않기에 수액으로 전해질과 수분을 보충받으면서 염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췌장염으로 입원해야 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긴 시간 동안 금식을 버틸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지만 그것은 아주 찰나였다. 통증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이다. 입원 첫날, 무언가를 먹는 행위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입원 당일 나는 통증 조절을 위해 모르핀을 맞으면 곧 자고, 자고 일어나서 구역질을 좀 하고, 어지러우면 가만히 누워있다가 다시 자기를 반복했다. 다음날 통증이 거의 없어지고 모르핀 투여 횟수를 줄이면서 어지러움과 토할 것 같은 느낌이 없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배는 고프지 않았고 무언가를 먹고 싶은 생각 또한 들지 않았다.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이렇게 오랫동안 금식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쩌면 통증이 너무 심했기에 내 소화기관이 음식에 대한 공포가 생겨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에너지 소모가 적은 것도 원인이지 않을까? 수분을 수액을 통해서 공급받고 있기도 하고.


금식을 하면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를 외부에서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내부에서 찾는다. 그 과정에서 근육과 배 둘레, 간에 저장되어 있는 지방을 케톤이라는 물질로 바꾸어 이용한다. 가만히 있을 때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관은 뇌다. 금식을 하면 뇌는 케톤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수도승이 금식 수행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혹은 배가 고픈 상태에서 공부가 평소보다 잘 되었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이런 일례를 바탕으로 케톤을 연료로 뇌가 활동을 하면 각성되고, 정신이 맑아진다는 개념을 통해 시작된 뇌전증 치료법이 케톤식이법이다. 수련받았던 병원에서 케톤식이를 하는 환아들의 경기 횟수는 드라마틱하게 줄었다. 병원에 입원한 나 또한 금식의 덕택인지, 이런 내용을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머리가 개운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케톤식이는 맛이 별로 없다. 경련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맛있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니, 더 큰 목표를 위해서 작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논리는 맞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많이 괴롭다. 부모도 꽤나 고생한다. 입맛에 잘 맞지 않아 하는 아이에게 식단을 강제해야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사람들에게 시간은 상대적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짧은 시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긴 시간이 될 수 있다. 의사는 금식이나 식이요법을 지시하고,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 있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 그 시간은 매우 길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처음에는 버틸만하면서 금방 끝날 거라는 희망이 가지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인내의 고통이 온다. 의료진에게 부담을 주기 싫고, 최대한 참아보려는 모습이 얼굴에 얼핏 드러나는 환자도 있다.



나에게 그 기간은 딱 3일이었다. 입원 초의 금식에 대한 무감각이 무색하게 어느 순간부터 음식에 대한 갈망이 몰려왔다. 입원 셋째 날 오후, 주치의는 나에게 물부터 먹어보고 다음날부터 죽을 먹어보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날 저녁 죽부터 시작하겠다고 했다.


- 췌장염은 금식을 하는데,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금식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럼 환자 분들이 물어본단 말이죠. 저는 언제 다시 식사를 할 수 있느냐고... 그러면 "환자 분이 배가 고프실 때쯤 알게 되실 거예요. 그때 천천히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 됩니다. 신기하게도 이게 나을 때쯤 되면 배가 고프거든요.


학창 시절 소화기내과 교수님이 말씀하신 강의 내용대로 배가 고프면 췌장염이 호전되는 신호라는 이야기를 앞세웠지만 사실은 금식에 대한 인내의 끈이 끊어진 것일 테다. 그렇게 요구해서 저녁에 침대 위에 올라온 희멀건 죽을 한입한입 떠서 조심스럽게 입 속에 넣으며, 나를 스쳐 지나간 아이들 생각을 했다. 얘들아, 나는 너희의 마음을 알고 충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이제야 겨우 아주 조금 느낀다. 아직 선생님은 멀었나 보다.




의사이지만 아파서 입원한 경험을 쓰고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선생님, 입원하셔야겠는데요?

#2. 의사도 주사는 싫어

#3. 아픔을 느끼는 의사

#4. 입원 첫날, 몸무게 3킬로그램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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