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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과 쌤 Jan 07. 2020

#3. 아픔을 느끼는 의사

어쩌면 가끔, 잊을 때도 있다.

췌장염으로 입원하게 되면서 가장 신경이 쓰였던 것은 통증이었다. 췌장염의 통증은 개인에 따라 정도가 다를 수 있는데 심한 경우 산통과 비슷하다고 한다. 이런 통증의 정도를 의학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픈 정도를 10점이라고 하고, 하나도 안 아픈 것을 0점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통증은 몇 점 정도인지 본인이 점수를 매기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7~8점 정도였다. 엄살이나 과장이 심한 사람들은 이 숫자를 높게 말할 수 있고,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사람의 경우 이 숫자를 낮게 말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찰자가 아픈 사람의 얼굴 찡그림이나 행동을 보고 이 점수를 매기는 기준도 있다. 이를 통해 응급실 간호사가 평가한 나의 통증 정도는 8이었다.  


이렇게 나의 통증을 파악한 응급실 J 선생은 재바르게 모르핀 투약을 하자고 했다. 모르핀 한 번 투여 후에 나의 통증 정도는 3점 정도로 떨어졌고 두 번째 이후부터는 통증이 거의 없어졌다. 전쟁영화에서나 보던, 엄청난 진통 효과를 직접 경험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모르핀은 마약성 진통제로 19세기 청나라를 망하게 한 아편, 그 아편에서 추출한 물질이다. 의학적으로는 강력한 진통효과를 위해 쓰지만, 통증이 없는 상태에서 쓰면 행복감을 느끼게 하고 끊기 어려운 중독성을 가진 마약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새해 첫날을 병원에서 지내도 그렇게 침울하지 않고 약간 업된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의사는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지만, 양날의 검과 같은 이 약을 다루는데 부담을 가진다. 사용을 위한 절차도 복잡하고, 가능하다면 비(非) 마약성 진통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다. 철저한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만이 이 양날의 검을 능숙하고 시의적절하게 사용한다.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수련 4년 중에 일정 기간 소아혈액종양과의 소아암 진료에 참여했다. 이런저런 일로 선배 선생님들에게도 많이 혼나고, 교수님들에게도 여러모로 지적을 받곤 했지만 한 번은 교수님께서 크게 화를 내신 적이 있다.

병동 당직으로 근무하는 동안 새벽에 암으로 인한 통증으로 힘들어하는 아이가 있었는데, 마약성 진통제를 쓰기가 부담스러웠던 나는 비마약성 진통제로 질질 끌다가 아우성 끝에 뒤늦게 마약성 진통제를 사용했다. 다음날 아침 이를 발견하신 교수님은 암 환자의 통증 조절을 가이드라인에 준해서 마약성 진통제로 제대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나를 꾸중하셨다.


통증이란 것은 불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화재는 처음부터 잘 대응하면, 크게 번지기 전에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진압에 실패하면 불을 끄기가 더 어려워진다. 통증도 처음에 잘 잡으면 크게 고생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지만 초기에 잘 대응하지 못하면 더 심해지면서 조절하기가 어려워진다. 그 아이는 마약성 진통제가 들어간 후에도 한동안 아픔으로 잠을 못 이루었고, 다음날 아침 회진 때는 지쳐 쓰러져 자고 있었다.


교수님은 고개 숙인 나에게 자는 아이를 보여주시며 나직이 말씀하셨다.

- 이 아이가 만약 너의 아들이었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고통스럽게 놔두었겠니?




병동에서 정신없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다 보면 어느새 내 앞에 있는 환자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공감의 민감도가 태생적으로 다를 수 있어도 바쁜 와중에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 것이 명확한 사실이다. 매 순간 환자의 감정을 느끼면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가 있어 자기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차단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급하게 행동해야 할 때가 많아서 그럴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과감하게 주사 바늘을 찔러야 할 때처럼. 하지만 냉철하게 행동하는 것과 무신경한 것은 다른 것이다. 제대로 된 지식을 준비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던 나는 무신경한 의사였을 뿐이다. 부끄럽지만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나는 부족했고 매 순간마다 그 사실을 느꼈다. 어쩌면 환자의 아픔을 양분으로 조금씩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2020년 새해 첫날 아침, 통증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잠시 스친 생각이었다.





의사이지만 아파서 입원한 경험을 쓰고 있습니다. 앞선 이야기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1. 선생님, 입원하셔야겠는데요?

#2. 의사도 주사는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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