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을 떠나 보내며.
1
꼬까가 떠난 지 오늘 딱 일주일이 되었다. 일주일 전 낮, 아르바이트에 가기 전 잠깐 산책을 시켜주려 함께 밖으로 나왔고, 꼬까가 진돗개에게 물렸다. 바로 좀 좋은 병원으로 갔으면 좋았을 걸, 내새끼를 내가 못 챙긴 게, 왜 거기서 어버버하고 있었는지 너무너무 후회스럽다. 그리고 자정 무렵 강아지는 떠났다.
2
나는 꼬까가 떠난 후의 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직 헤어지기까지 십여 년은 더 지나야 했으므로 그건 몇 년 후에 생각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다룬 웹툰을 보며 눈시울을 붉히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다고 안도했다. 어쨌거나 이별은 당장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꼬까는, 정말 갑작스레 떠났다. 당시 나는 그것을 '당혹스럽다'고 표현했는데 지금 보니 좀 더 알맞은 단어가 있다.
황망하다.
3
세상을 살아가면서, 특히 요 몇 년간 절실히 느끼는 사실이 있다. 사람은 경험을 한 뒤에야 비로소 상대방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 내가 겪은 몇 가지를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짝사랑에 임하는 태도, 친구를 대하는 태도, -꼬까에 대해서라면- 강아지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에 대한 것 등등. 공감이나 이해가 경험에 기반한다는 것은 특히 마음과 관련될 때 더욱 명확해진다. 한때, 친구가 나에게 소홀해지자 무척 속상했더랬다. 그런데 어느 날 뒤집어서 생각해보니 내가 비슷한 행동을 다른 친구에게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친구가 왜 내게 '외롭다'고 얘기하는지 공감하지 못했는데,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서니 그제야 이해가 가더라.
나의 마음속에는 늘 '역지사지'가 들어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요 몇 년간 많은 상황들을 직접 마주하자 그 생각이 꽤나 오만하며 건방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저 상대방의 입장에 나를 가져다 두었을 뿐이지 전심으로 공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4
꼬까의 죽음도 이런 상황이 되었다.
나는 반려동물이 떠난 후 간격을 두지 않고 또 다른 생명을 들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되돌아보건대, 사람마다 슬픔을 삭이는 방법이 다를 따름이었다. 누군가는 떠난 아이가 너무 그립고 아프고 미안해서 다른 강아지를 들일 수 없으며/누군가는 떠난 아이의 빈자리가 너무 차가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두 유형은 사랑의 크기와는 관계가 없다.
5
이 글은 나에 대한 변론이며 꼬까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앞서 말했듯 꼬까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생각했던 적이 없으므로, 스스로가 어떤 유형인지 알지 못했다. '슬퍼서 키우고 싶지 않겠지'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후자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
꼬까가 죽은 다음날 혼자 걷던 길 위에서, '왜 이제 못 보는 건데' 토해내듯 외쳤다.
정말, 그 빈자리는 상상 이상으로 크고 휑했다. 더 이상 누군가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이상했다. 강아지가 앉던 방석을 볼 때 찾아오는 물리적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어떤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그래서, 결국 그 빈자리가 너무너무 커서, 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해서. 누구라도 좋으니 어디에든 온기를 불어넣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6
다시 한 번 느낀다. 사람은 이렇게 확장되어 나가는구나. 너를 이해한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구나.
7
꼬까의 빈자리에 있어서는. 내가 담뿍 사랑을 주었던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모르겠다.
이게 바로 가슴에 '묻는'다는 일인 듯한데, 이 아픔을 속에 품어야 한다 생각하니 앞으로의 삶이 두려워진다. 수없이 많은 어떠한 존재들을 잊지도 못하고 그냥 가슴에 계속 계속 묻어놓아야 할 테니. 내 마음이 그 구덩이들을 수용할 만큼 커다랄까?
내가 최근 들어 제일 슬펐던 순간. 퇴근 후 불 꺼진 집에 들어섰을 때. 한때는 따뜻했던.
어둠이 순간적으로 텅 빈 공간으로 보였다. 꼬까가 떠난 뒤의 공허함이 새까만 공간을 통해 너무 직접적으로 보여졌다. 새까맣게 비어있는, 잴 수 없는. 그 커다란 덩어리가 전부 너의 자리이더라.
- 2012.03.11. 00:15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