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24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둘째 날 아침, 전날 회식의 여파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눈을 떴다.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각자 자유롭게 오전 시간을 보낸 뒤 오후에 신주쿠에서 모이기로 했던 어제의 결정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덕분에 체력이 넘치는 멤버들은 일찍이 관광길에 올랐고, 나처럼 기력이 쇠한 ‘아저씨’들은 꿀맛 같은 늦잠을 선택해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냥 침대에 몸을 맡기고 있을 수만은 없는 시간이었다. 서둘러 외출 채비를 마치고, 마침 나처럼 숙소에 남아 휴식을 취하던 멤버 한 명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신주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작년의 쓰라린 실수를 떠올렸다(너무 짠 라멘을 골라 원성을 샀던 ‘5화’의 기억). 이번에는 실패 없는 검증된 맛을 찾아 가부키초의 ‘이치란 라멘’으로 향했다. 아침 겸 점심으로 마주한 라멘 한 그릇. 적당히 칼칼한 맵기를 선택해 걸쭉한 국물에 밥까지 말아 넣으니, 이건 라멘이라기보다 부산의 진한 돼지국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뜨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몸속에 남아있던 전날의 알코올 조각들이 비로소 말끔히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 공식 일정은 작년과 다름없이 시네시티 광장에 위치한 ‘신주쿠 VR 존(Shinjuku VR Zone)’이었다. 새로운 멤버들에게는 신선한 자극을, 나에게는 1년 만의 재방문이라는 설렘을 주는 곳이었다. 특히 드래곤퀘스트나 건담 같은 강력한 IP를 활용한 신규 콘텐츠들이 추가되었다는 소식에 기대감은 더욱 고조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위기감이 엄습했다. 지난해만 해도 예약 없이는 입장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이곳이, 믿기지 않을 만큼 한산했기 때문이다. 신작과 구작을 가릴 것 없이 대기 줄은 자취를 감췄고, 대부분의 어트랙션은 기다림 없이 곧바로 체험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웠다. 심지어 어떤 비인기 콘텐츠는 상주하는 직원조차 없어, 체험을 위해 운영 인력을 직접 부르러 가야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뉴페이스 멤버들은 헤드셋을 쓰자마자 펼쳐지는 가상 세계에 연신 감탄하며 깊이 몰입했다.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고 워크샵 기획자로선 뿌듯한 광경이었지만, 내 마음은 마냥 즐거울 수 없었다. 이 정도의 막대한 자본과 높은 퀄리티가 투입된 서비스임에도 공간 전체를 휘감고 있는 썰렁한 정적. 그 광경을 지켜보며 문득 ‘혹시 VR 트렌드라는 거대한 파도에 이상 징후가 생긴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찝찝한 기분을 안고 VR 존을 나온 우리는 바로 근처 세가(SEGA) 아케이드 게임센터 2층으로 발길을 옮겼다. 독일의 VR 전문 기업 ‘VR 너드(VR Nerd)’가 개발한 ‘타워 태그(Tower-Tag)’를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완성도 높은 멀티플레이 슈팅 게임으로 정평이 난 콘텐츠였고, 서울 홍대에서도 긴 대기 줄을 견뎌야 할 만큼 인기였기에 도쿄 현지의 반응은 어떨지 무척 궁금했다.
그러나 기대는 다시 한번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운영 직원도, 플레이하는 유저도 없었다. 기기들은 마치 철거를 앞둔 폐기물처럼 덩그러니 방치된 채 차가운 공기만 머금고 있었다. 단정 짓기엔 일렀지만, 오랫동안 현장에서 발로 뛰며 다져온 전략기획자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이 싸늘한 기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허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시부야로 향했다. 이 싸늘한 분위기가 특정 매장의 문제인지, 아니면 오프라인 VR 시장 전체의 퇴보를 알리는 전조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만약 후자라면, 현재 우리 비즈니스의 핵심 축 중 하나인 ‘오프라인 VR 테마파크용 콘텐츠 개발’ 사업은 근본부터 재검토해야 할 중차대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복잡한 머릿속을 뒤로하고 일단 밥부터 먹기로 했다. VR 존에서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경험상 배가 고프면 사고가 흐려지기 마련이다. 공복 상태에서의 판단은 감정적이고 위태롭기 쉽기에, 냉철한 분석을 위해서라도 든든한 한 끼가 절실했다.
발길이 닿은 곳은 최근 한국 방송을 타며 입소문이 난 ‘토리카츠 치킨’ 집이었다. 갓 튀겨낸 튀김과 밥, 장국이 곁들여지는 소박한 구성. 특별할 것 없는 밥상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햄카츠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선 좀처럼 접하기 힘든 메뉴를 마주하고 나니 비로소 이곳이 일본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바삭한 튀김옷이 입안에서 경쾌하게 부서지는 소리를 감상하며, 잠시 요동치던 두뇌 회전을 멈추고 온전히 미식에 집중했다.
식사를 마친 뒤 시부야 일대의 아케이드 게임장들을 샅샅이 훑었다. 다행히 일반적인 아케이드 게임장들은 우려와 달리 게임을 즐기는 인파로 제법 활기가 넘쳤다. 활기를 확인하며 한참을 걷다 지친 우리는 오모테산도로 넘어가는 언덕 근처의 ‘스트리머 커피 컴퍼니(Streamer Coffee Company)’에 자리를 잡았다. 진한 카페인이 수혈되자마자 멤버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열띤 토론의 장이 열렸다.
신주쿠 VR 존의 그 묘한 한산함은 VR 기술 자체의 한계일까, 아니면 오프라인 공간이 주는 매력이 반감된 결과일까. 중국에서는 폭발적으로 성장 중이라는데 일본은 왜 유독 하향세를 타는 걸까. 거실에서 홀로 콘솔 게임을 즐기는 일본 특유의 ‘히키코모리형’ 플레이 성향 탓일까, 아니면 단순히 오픈 특수가 끝난 거품의 붕괴일까. 오늘이 평일이라는 점이 변수일 수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까지 제기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Why)’라는 질문에 각자의 통찰을 보태는 모습, 그 자체가 참으로 워크숍다운 풍경이었다.
대화에 몰입하다 보니 어느덧 창밖엔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우리는 긴 하루가 남긴 질문들을 가슴에 품은 채, 숙소가 있는 아사쿠사로 발걸음을 돌렸다.
아사쿠사 상점가에서 저녁 메뉴를 고민하며 걷던 중,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흥겨운 선율이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소리의 근원은 ‘HUB’라는 이름의 프랜차이즈 펍. 하지만 창너머로 슬쩍 들여다본 풍경은 일반적인 펍과는 사뭇 달랐다. 넓은 무대 위에서 밴드가 생생한 라이브 공연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HUB 아사쿠사점은 라이브 재즈 클럽 컨셉으로 운영되며, 매일 밤 각기 다른 팀이 무대를 채우는 곳이었다. “여기서 재즈를?”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홀린 듯이 입구로 향했다.
평소에는 예약 없이는 발 들이기조차 힘든 곳이라 했지만, 다행히 공연이 중반을 넘긴 시점이라 빈자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다른 고민 없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시원한 맥주와 안주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곧 무대 위로 시선을 던졌다.
그날 무대를 채운 이들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로 구성된 밴드였다. 그들의 연주는 단순한 음악이라기보다, 삶을 향유하는 태도 그 자체에 가까웠다. 화려한 손끝의 기교보다 빛났던 것은 무대를 대하는 능숙한 여유, 관객과 주고받는 농담 섞인 교감, 그리고 오랜 세월 음악과 동행해온 이들만이 뿜어낼 수 있는 깊은 정서였다. 어느새 펍 안은 국적도 나이도 잊은 채 웃고, 박수 치며, 리듬에 몸을 맡기는 이들의 열기로 훈훈하게 물들어갔다.
머릿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낮에 보았던 VR 트렌드에 대한 의구심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지만, 나는 기꺼이 그 고민을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내일은 내일의 내가 또 열심히 고민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현재의 즐거움에 집중했다. 술잔에 담긴 재즈의 선율이 제법 달콤했다.
다음편, '일본 도쿄 : 쑥스러운 첫경험과 합리적 의심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