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 쑥스러운 첫경험과 합리적 의심 3

비스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25

by chill십구년생guy


개발은 상품, 사업은 돈벌이
온갖 대의명분으로 포장해도 그것만이 진실



아침이 밝았다.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 희뿌연 여명에 눈을 뜨는 순간, 잠시 멈췄던 머릿속 회로가 다시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몸은 여전히 천근만근이었지만, 이번 여정의 하이라이트가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감각이 피곤한 세포들을 거칠게 깨웠다.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멤버들과 함께 도쿄 게임쇼 2018이 열리는 ‘마쿠하리 멧세’로 향했다. 올해는 숙소가 아사쿠사라 작년 신주쿠에 묵었을 때보다 이동 시간이 조금은 단축될 줄 알았는데, 체감상 여전히 만만치 않은 원정길이었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며, 이른 아침 출근길에 오른 도쿄 직장인들의 무거운 행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도시의 거대한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한참을 달린 끝에야 비로소 가이힌마쿠하리 역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KakaoTalk_Photo_2025-07-11-16-21-14 001.jpeg 뉴페이스들과 함께 인증샷은 못참지



도쿄 게임쇼는 그 압도적인 규모와 명성에 걸맞게 역 입구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수십 미터 앞까지 끝없이 늘어선 인파를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우리는 그저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는 묘한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인근 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마친 뒤, 티켓팅을 거쳐 마침내 행사장 내부로 들어섰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각자 자유롭게 부스를 둘러본 뒤 약속 시간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나와 친구(대표)는 미리 약속해둔 일본 개발사 ‘뱅가드(VANGUARD)’와의 미팅을 위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마련한 공동관 부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첫 세레모니는 너무 어려워



다양한 일본 기업들의 화려한 부스 사이를 지나 한국 공동관으로 들어서자, 특유의 익숙한 분위기와 함께 열띤 에너지가 전해졌다. 부스마다 중소 개발사 대표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관람객들의 시선을 붙잡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 앞을 지나는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호기심 가득한 기대감이 묻어났다. 특히 도쿄 게임쇼는 B2C와 B2B 구역을 특별히 나누지 않는 덕분에, 업계 관계자와 일반 유저가 한데 뒤섞여 게임을 체험하고 날 선 평가를 주고받는 진풍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낯익은 참가사 대표들과 가벼운 안부를 나누며 현장 분위기를 살피던 중, 약속한 시간에 맞춰 뱅가드(VANGUARD)의 오타하라 대표가 도착했다. 진흥원 매니저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예정대로 공동관 입구에 마련된 메인 무대에서 MOU 체결 세레모니가 시작되었다.



KakaoTalk_Photo_2025-07-11-16-21-14 002.jpeg 친구만 홀로 스테이지에 올려보내고, 나는 그저 구경꾼인척 군중속에서 찰칵찰칵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저 구석에서 적당히 사인이나 하고 기념사진 한두 장 남기는 의례적인 절차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타하라 대표와 내 친구가 무대 위로 오르자마자 웅장한 장내 방송이 행사장 전체에 울려 퍼졌고, 어디선가 나타난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순식간에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어느새 무대 앞은 발 디딜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찼고,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시선이 그들을 향해 쏟아졌다.


그 압도적인 광경을 아래에서 지켜보며 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부담스러운 자리에 서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친구라 정말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때는 정말 꿈에도 몰랐다. 훗날 홀로 참석하게 될 수많은 행사에서, 친구를 대신해 저 무대 위 주인공이 되어야 할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한숨)



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나



세레모니가 끝난 후, 오타하라 대표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다행히 진흥원에서 배정해 준 통역사 덕분에 언어의 장벽 없이 평소 궁금했던 질문들을 가감 없이 던질 수 있었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역시나 ‘일본 VR 콘텐츠 개발사들의 실질적인 동향’이었다.


오타하라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의 VR LBE(Location-Based Entertainment, 위치 기반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태생부터 대형 IP를 보유한 거대 기업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어 있었다. 대다수 중소 개발사는 그들의 하청 구조 안에서 움직일 뿐, 독립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한 팀은 극히 드물다는 것이었다.


최근의 흐름은 더욱 명확했다. 오프라인 체험형 VR에 매달리기보다 ‘버추얼 유튜버(VTuber)’ 시장으로 발 빠르게 방향을 틀거나, 물리적 공간의 제약 없이 유통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으로 눈을 돌리고 있었다. 하드웨어 역시 전시장에 특화된 HTC 바이브(Vive) 중심에서, 개인화된 기기인 오큘러스 스탠드얼론(Oculus Standalone) 기반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제부터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퍼즐 조각들이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비즈니스의 끝은 ‘수익성’으로 귀결된다. 아무리 압도적인 몰입감을 선사한다 해도, 오프라인 VR은 공간 유지비와 운영 인건비 등 고정비 지출이 일반 아케이드 게임장보다 훨씬 크다. 자연히 개발사에게 돌아가는 수익 지분은 박해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이 화려한 IP로 시장을 견인하려 해도, 그 생태계를 뒷받침할 중소 개발사들이 수익 구조의 한계로 이탈하기 시작하면 콘텐츠는 고갈된다. 볼거리가 사라진 곳에서 이용자의 흥미가 식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어쩐지, 올해 게임쇼 현장에 일부 인디 게임관을 제외하고는 VR 콘텐츠 개발사의 부스가 눈에 띄게 줄어든 이유가 있었다. 그제야 시장의 냉정한 흐름이 한눈에 읽히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기분이 저기압 일땐 고기앞 으로



MOU 세레모니를 무사히 마친 우리는 다시 멤버들과 합류해 아사쿠사로 돌아왔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게임쇼 현장에서 공수해 온 각종 굿즈와 기념품, 그리고 며칠간의 여정이 남긴 자잘한 짐들이 방 안 가득 쏟아졌다. 한바탕 짐 정리를 하고 잠시 숨을 돌린 뒤,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거리로 나섰다.


피날레를 장식할 회식 메뉴는 야키니쿠(やきにく)였다. 달궈진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함께, 시원한 맥주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고, 테이블에는 멤버들의 웃음소리와 즐거운 대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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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고기 구이와 일본식 야끼니꾸는 뿌리가 같으면서도 서로 묘하게 다르다



이번 여정의 핵심 목표였던 글로벌 MOU 체결과 새로운 멤버들의 ‘치얼업(Cheer-up)’은 분명 성공적이었다.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활기찬 마무리였지만, 사실 내 마음 한구석은 낮에 확인한 시장의 현실 때문에 꽤 묵직했다. 프로젝트의 근본적인 방향성, 오프라인 사업의 수익성, 그리고 그 변화의 파도 속에서 내가 리드해야 할 역할들. 경영진으로서 짊어진 고민의 무게는 오히려 한국을 떠나올 때보다 더 깊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고민을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이 자리는 워크샵을 마무리하는 즐거운 자리니까. 나는 깊은 속내를 잠시 접어두고, 그저 곁에 있는 이들과 함께 소중한 밤을 즐기며 활짝 웃어 보였다.


그렇게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을 뒤로하고, 다음 날 우리는 저마다의 수확을 품은 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후일담



내 머릿속은 온통 거대한 질문표로 가득 찼다. ‘버추얼 닌자’를 필두로 밀어붙였던 오프라인 기반의 LBE VR 프로젝트를 여기서 멈춰야 할까? 아니면 이 싸늘한 징후들을 무시하고, 온라인 플랫폼 ‘갤럭시티’와 함께 양손에 떡을 쥔 채 계속 달려야 할까? 어쩌면 지금의 정체는 오직 온라인에만 모든 화력을 쏟아부으라는 하늘의 계시일지도 몰랐다.


비즈니스에서 ‘선택과 집중’은 생존을 결정짓는 가장 냉혹한 전략이다. 이것저것 손을 대며 몸집만 불리다, 결국 무엇 하나 제대로 꽃피우지 못한 채 스러져가는 팀들을 수없이 목격해 왔다. 더욱이 우리는 파산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지 불과 1년 남짓이었다. 이번에 다시 한번 ‘헛다리’를 짚는다면, 그때는 정말로 재기 불가능한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시장은 이미 정직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영국 맨체스터 IMAX VR 매장은 민망할 정도로 한산했고, 도쿄의 아케이드는 활기가 넘쳤으나 그 안에서 유독 VR 구역만은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LBE 매장들이 우후죽순 들어선 서울 홍대 거리조차 손님 하나 없이 텅 빈 채 전기료만 축내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내가 발로 뛴 그 어떤 현장도 오프라인 시장의 희망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 ‘이제 그만 출구 전략을 짜라’는 명확한 경고등이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미련의 찌꺼기가 남아 결단을 가로막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4차 산업혁명의 선봉장’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VR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장밋빛 기사들, 그리고 중국에는 이미 수천 개의 VR 테마파크가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는 매혹적인 소문들까지. 그런 정보들은 내가 목격한 차가운 현실을 자꾸만 부정하게 만들며 헛된 희망을 품게 했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이 모순된 정보들이 소용돌이치는 진원지, ‘중국’으로 가기로. 소문만 무성한 그곳의 실체가 진짜 기회인지, 아니면 거대한 신기루에 불과한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결단을,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곧바로 실행에 옮기게 된다.




다음편, '중국 난창 : 아무도 없는 도시속에서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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