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27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낮과 밤이 다른 도시
난창에서 맞이한 둘째 날, 드디어 ‘2018 세계 VR 산업대회’의 막이 올랐다. 거창한 이름만 들으면 전 세계 VR 기업들이 한데 모인 화려한 국제 비즈니스의 장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전시장의 주인공은 압도적으로 중국 기업들이었으며, 외국 기업들은 그저 ‘국제’라는 타이틀을 위해 구색을 맞춘 소규모 부스들로 자리를 채운 수준이었다. 그 가운데 한국관은 제법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냉정히 말해 이는 중국 시장을 향한 우리나라 특유의 맹목적인 기대치가 만들어낸 결과물처럼 보였다. 특히 일본 기업들이 아예 참가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 전시회를 바라보는 각국의 시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듯해 묘한 인상을 남겼다.
전날까지만 해도 적막이 감돌던 전시장 안팎은 행사 시작과 동시에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인파가 발 디딜 틈 없이 밀려들었고, 부스 앞은 물론 복도까지 사람들로 빼곡히 메워졌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난창시를 포함한 인근 지역의 초·중·고등학교가 이 행사를 위해 일제히 휴교를 선언했고, 학생과 학부모들이 관람객으로 대거 동원되었다고 한다. 중국 정부 주도 행사 특유의 일사불란한 추진 방식이 어떤 것인지 피부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당초 계획은 시장 조사를 핑계 삼아 느긋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인파에 휩쓸려 꼼짝없이 부스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부스에는 체력 좋고 성실한 현지 대학생이 통역 요원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그 친구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에 간신히 폭풍 같은 상황을 버텨낼 수 있었다. 만약 그마저 없었다면, 아마 행사 시작 몇 시간 만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짐을 싸서 도망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관 내 각 부스에는 관람객들의 긴 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체험 요청에 끼니를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허겁지겁 전시장 한쪽 매점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전쟁터가 휩쓸고 지나간 듯 매대에는 음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선택의 여지 없이 덩그러니 남은 빵 몇 조각과 커피 한 잔으로 간신히 허기를 달래야 했다. 그렇게 하루가 눈 깜짝할 새 흘러갔다. 무엇을 했는지 복기조차 되지 않을 만큼 정신없고 분주하게, 첫날의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저녁 무렵, 전시 일행들과 함께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난창 시내에서 가장 크다는 쇼핑몰 ‘완다몰(Wanda Mall)’을 찾았다. 거대한 도자기를 형상화했다는 건물의 외관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화려하고 인상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웅장한 규모만큼이나 내부 역시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는 기이할 정도로 썰렁했다. 광활한 매장과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게 켜진 조명 아래, 정작 물건을 사는 손님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마주치는 이들이라곤 판매원이나 몰 관계자뿐, 일반 방문객은 우리 일행이 전부인 것만 같았다. 낮에 전시장 광장을 가득 메웠던 그 압도적인 인파는 도대체 어느 구석으로 증발해 버린 걸까. 의구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대충 식당가에 들러 저녁을 해결한 뒤, 가볍게 2차를 즐길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몰 전체가 지나치게 고요한 탓에 마땅한 가게를 고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간신히 손님이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는 중식당을 찾아 들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손님들마저 우리와 같은 전시에 참가한 한국 업체 직원들이었다. 타지에서 마주친 묘한 동질감 때문인지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면식 같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결국 중국 난창의 밤은 한국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기울이는, 다소 심심하고 익숙한 풍경으로 채워졌다.
날이 밝았고, ‘세계 VR 산업대회’의 일정은 쉼 없이 이어졌다. 다행히 전날 현지 통역사와 어느 정도 호흡을 맞춰본 덕분에 관람객 응대는 한결 매끄러워졌지만, 그렇다고 체력적인 소모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밀물처럼 밀려드는 체험객들을 쉴 틈 없이 안내하다 보니 정신은 여전히 아득했다.
그러다 행사가 막바지로 치닫던 무렵, 결국 사달이 났다. VR 체험을 하던 한 어린아이가 가상 현실의 몰입감을 이기지 못하고 흥분해 몸을 과격하게 휘두른 것이다. 그 순간, 아이의 손에 쥐여 있던 컨트롤러가 부스 벽면에 강하게 충돌했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장비 한쪽이 처참하게 파손되어 버렸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채 진행되는 VR 체험 특성상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지만, 막상 현장에서 맞닥뜨리니 당혹감이 앞섰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이는 다치지 않았으나, 진짜 문제는 고장 난 장비였다. 여분의 컨트롤러를 챙겨오지 않은 탓에 당장 남은 행사 기간의 시연 자체가 불투명해진 것이다.
내일 오전까지도 관람객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라 마음이 급해졌다. 서둘러 한국에 있는 멤버들에게 연락을 취해 상황을 공유했다. 그쪽에서도 백방으로 방법을 알아보겠다며 내일 아침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답을 보내왔지만,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체험 기기가 멈춰버린 부스에서 어떻게 남은 시간을 버텨내야 할지, 복잡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날 저녁, 한국관에 참여한 모든 업체가 한자리에 모이는 간담회가 열렸다. 제법 규모가 큰 현지 식당의 한쪽 홀을 통째로 빌렸고, 커다란 원형 테이블 위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한 중국 요리들이 끝도 없이 차려졌다.
온종일 먼지 날리는 전시장 바닥에서 고군분투한 탓인지, 다들 말보다는 술이 먼저였다. 옆자리에 앉은 이들과 연신 잔을 기울이며 행사장에서 겪은 무용담을 안주 삼아 주고받았다. 그동안 정부 기관이 주최하는 수많은 네트워킹 행사에 참여해 봤지만, 이날만큼은 형식적인 명함 교환보다는 전우애 섞인 회포를 푸는 분위기에 훨씬 가까웠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건, 주최 측에서 위로의 의미로 아낌없이 내놓은 고급 고량주 ‘수정방(水井坊)’이었다. 예상치 못한 인파에 시달린 참가사들을 달래기 위해 특별히 준비했다는 설명에 다들 놀라워하면서도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나 역시 평소 즐기던 술이었지만, 고된 하루 끝에 마주한 수정방은 유독 그 향이 깊고 달콤했다. 잔은 쉴 새 없이 채워졌고, 나는 기분 좋은 소란함에 몸을 맡긴 채 신나게 먹고 마셨다.
좋은 백주(白酒)의 미덕은 마실 때는 취기가 화끈하게 오르지만, 다음 날 뒤끝 없이 깔끔하다는 데 있다. 그 덕분인지 복잡한 고민은 잠시 미뤄둔 채 가벼운 마음으로 잔을 비울 수 있었다. 망가진 장비는 어떻게 고칠지, 내일 시연은 또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같은 걱정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할 땐 하더라도, 수정방 한 잔쯤은 괜찮잖아?’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잔을 비웠다.
다음편, '중국 난창 : 아무도 없는 도시속에서 3' 으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