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28
위기 속에서
기회가 피어난다
‘2018 세계 VR 산업대회’의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전날 밤 그토록 많은 ‘수정방(水井坊)’을 들이켰음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는 의외로 가뿐했다. 과연 명불허전, 좋은 백주는 괜히 명주라 불리는 게 아니었다. 숙취 하나 없이 깔끔하게 깨어난 정신으로 눈을 떴다.
하지만 몸은 가벼웠을지언정 마음만은 천근만근이었다. 여전히 머릿속을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는 건 전날 파손된 VR 컨트롤러였다. 내가 가져온 콘텐츠들은 조작 특성상 양손을 모두 정교하게 사용해야 하는 방식이라, 한쪽 장비가 먹통이 된 이상 정상적인 체험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명색이 전시 참가사인데, 오늘도 어김없이 몰려들 인파를 앞에 두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조심스레 노트북을 열고 메일함을 확인했다. 무언가 드라마틱한 반전이 일어나길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정말로, 한국에서 보낸 한 통의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멤버들이 자진해서 출근해 문제 해결에 매달렸다는 소식이었다. 메일에는 한 손의 컨트롤러만으로도 콘텐츠의 모든 기능을 조작할 수 있도록 긴급 수정된 새로운 버전의 클라이언트가 첨부되어 있었다. 믿기지 않을 만큼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대체 어떻게 이 짧은 시간 안에 로직을 수정한 건지, 밤을 꼬박 새운 건 아닌지 묻고 싶은 말이 굴뚝같았지만, 감동을 만끽할 틈도 없이 서둘러 행사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시장에 도착하자마자 노트북을 연결해 새 버전을 설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의 조명이 하나둘 켜졌고, 약속이라도 한 듯 관람객들이 다시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의 당혹감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나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고, 더 이상 우리 앞을 가로막을 문제는 없었다.
오전 일정을 끝으로 전시회는 공식적인 막을 내렸다. 이틀 반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일정이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관람객을 응대하느라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조여야 했다. 체험 부스의 장비를 하나하나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 속에 맺혀 있던 긴 숨이 터져 나왔다.
오후에는 모든 참가사와 함께 주최 측이 안내한 난창 시 중심부의 VR 홍보관을 견학했다. 일종의 산업 선전용 박물관이라 할 만한 거대한 공간이었지만, 그 안을 채운 공기는 기이할 정도로 썰렁했다. 일반 관람객의 발길은 완전히 끊긴 듯 보였고, 광활한 홀에는 우리 일행과 무표정한 직원들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전시 시설은 최신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려는 듯 화려한 조명과 스크린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볼수록 본질보다는 외형에, 실효보다는 형식에 치중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동선과 연출은 철저하게 국가적 성과를 과시하는 ‘보여주기’에 매몰되어 있었고, 그 화려한 껍데기 안에 담겨 있어야 할 기술적 통찰이나 철학은 전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눈앞의 풍경은 눈부시게 번쩍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아무런 감흥도, 깊은 인상도 남기지 못한 채 공허하게 겉돌 뿐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나는 하루 더 난창에 머무르기로 했다. 출장의 본래 목적이었던 ‘현지 시장 조사’를 매듭짓기 위해서였다. 마침 일요일이었기에 전시회의 긴장감을 덜어내고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시내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주말이라면 현지인들이 쇼핑과 여가를 즐기러 쏟아져 나올 터였고, 나는 평일과는 다른 생동감을 기대하며 다시 ‘완다몰(万达广场)’로 향했다.
주말의 몰 안은 지난번 방문 때보다 확실히 온기가 돌았다. 텅 비어 있던 통로에는 이따금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발걸음이 교차했고, 매장 안에서도 쇼핑백을 든 이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물론 대도시의 북적임에는 한참 못 미쳤지만, 적어도 유령 도시 같았던 며칠 전의 정막과는 분명 달랐다.
나는 곧장 목표로 삼았던 VR 및 아케이드 게임 체험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선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나온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유료 체험을 시켜주는 모습이 듬성듬성 보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처럼 활기가 넘치거나 긴 대기줄이 늘어서는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에서 전설처럼 들려오던 ‘중국 VR 시장의 폭발적 성장’과는 온도 차가 너무도 컸다. 안정적인 수익 모델로 자리 잡았다는 호언장담이 무색할 정도로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고, 사람들의 반응 또한 무던했다. 차라리 한국의 대형 영화관 앞에 놓인 흔한 오락실 코너가 더 활기차 보일 정도였다.
솔직히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이번 현장 조사는 이 도시의 소비 흐름과 실질적인 수요를 피부로 확인하겠다는 야심 찬 목적이 있었지만, 정작 그 ‘시장’이라는 실체 자체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난창 같은 중국의 계획도시들은 대부분 정부 주도로 인프라를 먼저 깔고 인구를 강제로 유입시키는 방식이라, 외형과 실질 사이에 거대한 골짜기가 존재한다고 했다. 땅은 넓고 건물은 화려하지만, 정작 사람과 활기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도시. 그런 곳에서 시장의 역동성을 찾으려 했던 내 발상이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몰랐다.
해 질 녘까지 쇼핑몰 구석구석을 끈질기게 관찰했지만 끝내 반전은 없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몰 안의 공기는 다시 싸늘하게 식어갔고,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썰물처럼 자취를 감췄다. 더 이상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한 나는 숙소로 돌아와 짐을 꾸렸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씁쓸한 답을 품은 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여러모로 아쉬움과 허탈함이 교차하는 여정이었다. 애초에 기대했던 시장 조사는 제대로 시작조차 해보지 못한 채, 정부 주도로 동원된 인파를 상대하고 화려한 선전 문구에 휘말려 있다가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것을 과연 의미 있는 비즈니스 여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괜히 귀중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짙은 회의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뼈아픈 실망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성과는 존재했다. 전시 중 발생한 컨트롤러 파손 사고 덕분에 급조해야 했던 ‘한 손 조작 모드’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기술적 전환점을 선사한 것이다. 당시에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임시방편에 불과했지만, 우리는 이 기술을 더욱 고도화하여 어떤 기기나 환경에서도 유연하게 작동할 수 있는 맘모식스만의 고유 기술로 발전시켰다.
이는 단순한 편의 기능을 넘어, 장기적으로 우리 회사가 콘텐츠 제작사를 넘어 기술 기반의 스타트업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년 뒤, 맘모식스는 이 고도화된 기술력을 인정받아 중소벤처기업부의 기술창업 지원 프로그램인 TIPS(팁스)에 선정되었고, 본격적인 기술 기업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강력한 동력을 확보하게 된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격언은 식상한 말이 아닌, 살아있는 실체였다.
물론 본래 목표였던 현장 조사는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돌이켜보면 1.5선 계획도시인 난창을 조사지로 선택한 것 자체가 착오였다. 인프라만 번듯할 뿐 소비 흐름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도시에서는 시장의 진짜 온도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중국 시장의 민낯과 실질적인 수요를 확인하려면, 이미 인프라와 자본이 고일 대로 고인 ‘1선 도시’로 향했어야 했다.
그 뼈저린 깨달음은 곧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달, 나는 다시 한번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번엔 진짜 ‘전쟁터’인 1선 도시로 가기 위해서였다.
다음편, '중국 상해 : 어쩌면 우린 홀딱 속았수다 1'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