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29
90%는 과장이며
진실은 10%도 안된다
2018년 11월, 나는 오프라인 VR 콘텐츠를 수출하기만 하면 거대한 부를 쥘 수 있다는 이른바 ‘VR 중국몽(中國夢)’의 실체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 전 직접 다녀온 장시성 난창(南昌)은 내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정부 주도로 설계된 1.5선 도시 난창은 실제 수요보다 계획과 예산이 앞서는 거대한 실험장 같았다. 그곳에선 사람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살아 있는 상업적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안에는 여전히 시장에 대한 갈증이 남았다. 박제된 전시관이 아닌, 진짜 시장의 열기와 펄떡이는 수요를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당시 활동하던 ‘경기도 NRP(Next Reality Partners)’ 프로그램에서 새로운 공지가 올라왔다.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리는 ‘VR 코어 어워드(VR Core Award)’에 참가할 국내 기업을 모집한다는 소식이었다.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베이징, 광저우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부동의 1선 도시이자, 전 세계의 자본과 기술이 휘몰아치는 경제·문화의 중심지. 바로 그 상하이가 아닌가! 나는 공지를 확인한 당일 곧장 신청서를 제출했고, 홀린 듯 상하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화려한 마천루가 즐비한 상하이에서 내가 마주하게 될 현실은, 난창의 정막보다 훨씬 더 파괴적이고 충격적일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아나 항공에 몸을 실고 상하이 홍차오 공항에 내렸다. 함께 참가한 다른 기업 대표들과 함께 경기도콘텐츠진흥원에서 준비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상하이 중심가에서 한참을 떨어진 외곽, 바오산(宝山区) 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낯선 지명이었지만, 단체 일정을 소화하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하며 짐을 풀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전형적인 중국식 볶음 요리와 함께 우리나라 짜장면의 원조 격인 자장미옌(炸酱面)이 테이블에 올랐다. 여기에 차갑게 식힌 설화(雪花)와 하얼빈(哈尔滨) 맥주가 곁들여지자, 긴 비행의 피로와 긴장감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식사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자기소개와 상하이에 온 목적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대부분의 대표는 이미 현지 파트너나 바이어와 구체적인 미팅 일정을 빼곡히 잡아온 상태였다. 나는 별다른 사전 일정 없이, 직접 발로 뛰며 시장의 실체를 조사하러 왔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대답이 떨어지자 식탁 위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이내 여기저기서 “정말요? 아무런 미팅도 없이 그냥 오신 거예요?”라는 당혹 섞인 반응이 터져 나왔다. 모두가 나를 신기한 생명체 보듯 바라보았지만,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그들의 반응이 더 생경했다.
비즈니스의 기본은 현장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것 아닌가? 사전 미팅도 중요하지만,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시장의 진짜 온도를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내 방식이 이들에게는 이토록 낯선 객기로 비칠 줄은 몰랐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었다. ‘VR Core 어워드’ 본 행사는 내일이었지만, 오늘은 참여 기업들이 서로를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는 네트워킹 세션이 먼저 열렸다.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각 사의 대표가 발표를 맡는 게 관례였으나, 대표인 친구는 한국 일정 때문에 오늘 저녁 비행기로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결국 발표는 오롯이 내 몫이 되었고, 이어진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서도 어쩔 수 없이 내가 총대를 메야 했다.
한 팀 한 팀 인사를 나누다 보니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작 상하이에 본사를 둔 업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는 점이다. 참여한 기업들은 대부분 베이징(北京)이나 선전(深圳), 항저우(杭州) 등 중국 전역에서 몰려온 팀들이었다. 알고 보니 상하이는 일종의 ‘중립지대’이자 ‘창구’였다. 중국 기업들 사이에서도 상하이는 해외 기업과 교류하거나 중요한 국제 전시·포럼이 열리는 관문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같은 해외 참가자들을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곳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회사들이 태반이었지만, 대화 도중 그들이 슬쩍 보여주는 사무실이나 공장 사진을 볼 때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산업단지, 수백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오피스, 최신 기계들이 줄지어 선 생산 설비까지. 사진 속 규모는 하나같이 압도적이었다. 겉으로는 짐짓 무심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역시 대국의 스케일은 차원이 다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저녁이 되어 마침내 친구가 도착했다. 그의 등장이 그토록 반가웠던 건 단지 발표와 응대라는 짐을 나눌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이제야 우리 팀이 온전한 진용을 갖추고, 이 거대한 시장의 실체를 파헤칠 준비가 끝났다는 든든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이 마련한 공식 만찬이 시작되었다. 중국식 회식답게 테이블 위에는 형형색색의 꼬치 요리가 산처럼 쌓였고, 그 곁을 연경맥주(燕京啤酒)가 호위하듯 지키고 있었다. 기름진 꼬치를 한입 베어 문 뒤, 가볍고 청량한 라거 스타일의 연경 맥주를 들이키니 그 조화가 기막혔다. 이로써 칭따오, 하얼빈, 설화에 이어 연경까지, 이른바 ‘중국 4대 맥주’를 모두 섭렵했다는 소소한 성취감에 잠시 기분이 들떴다. 낯선 타지에서 맛보는 이런 작은 즐거움이야말로 여정의 묘미라 믿었다.
공식 행사가 끝난 뒤, 한국 참가사들끼리 따로 2차 자리를 가졌다.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에는 싱싱한 해산물 요리와 함께 ‘강소백(江小白)’이라는 백주가 올랐다. 젊은 층 사이에서 힙한 술로 통한다는 강소백은 전통 백주 특유의 독한 향 대신 부드럽고 깔끔한 목 넘김을 선사했다. 하지만 이국적인 술향에 취해 대화가 깊어질 무렵, 나는 예상치 못한 현실의 벽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 대표가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중국 현지 기업과 비즈니스를 할 때, 첫 만남에서 그들이 내뱉는 말을 절대 곧이곧대로 믿지 말라는 충고였다. “그들이 늘어놓는 화려한 청사진의 90%는 과장이며, 실제 진실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낮에 만난 업체들이 꽤 탄탄해 보였다고 반문하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고 보니 내가 감탄하며 지켜본 그들은 대부분 영세한 시뮬레이터 장비 업체에 불과했다. 겉으로는 거창한 글로벌 파트너십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한국의 순진한 개발사를 끌어들여 허울뿐인 장비에 콘텐츠를 끼워 넣고 중국 시장에 폭리를 취하며 팔아넘기는 구조였다. 심지어 그 장비를 다시 한국에 고가로 재판매하기도 하는데, 정작 콘텐츠를 만든 개발사에게 돌아가는 몫은 ‘쥐꼬리’만 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왜 다른 대표들이 이곳에 오기 전 수차례 파트너를 검증하고 계약 조건을 그토록 날카롭게 따졌는지, 왜 맨몸으로 부딪혀보겠다는 내 방식이 그들에게는 무모한 객기로 보였는지 말이다. 몰랐던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무지했던 내 모습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젖어 들었다.
돌이켜보니 올해 초 대만 출장에서 만난 중국 업체들도 비슷한 냄새를 풍겼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의심이라는 필터 없이 그들을 대했다. ‘진실은 어디서든 통한다’는 나의 순진한 믿음은 이곳 상하이의 차가운 현실 앞에서 속절없이 바스러져 갔다.
손에 든 맥주잔이 갑자기 납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입안에 머금은 연경 맥주의 끝맛은 더 이상 산뜻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비릿하고 씁쓸한 현실을 단숨에 삼켜버렸다.
다음편, '중국 상해 : 어쩌면 우린 홀딱 속았수다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