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30
소문대로 그렇게 대세라면
시내에 하나쯤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상하이에서의 셋째 날이 밝았다. 오늘은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VR 코어 어워드(VR Core Award)’ 시상식이 열리는 날이자, 우리를 포함한 한국 기업들이 공식적으로 전시에 참여하는 날이기도 했다.
솔직히 말해, 화려한 조명 아래 치러지는 시상식 자체는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이번 여정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발로 뛰는 현장 조사에 있었고, 누가 트로피를 거머쥐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지는 내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아, 물론 오해는 마시라. 우리 팀이 수상 후보에 오르지 못해서 짐짓 쿨한 척하는 건 결코 아니다. 정말이다. 흠흠.
내가 정작 고대했던 것은 따로 있었다. 어워드 기간에 맞춰 중국 현지 기업들, 특히 수상 후보로 초청된 쟁쟁한 팀들이 직접 부스를 열고 자사 프로젝트를 시연한다는 점이었다. 그들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 기회야말로 천금 같았다. 현지 개발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오프라인 VR 사업의 실질적인 반응은 어떤지, 그리고 그들이 그리는 시장의 청사진은 과연 어떤 색인지 생생한 목소리로 듣고 싶었다.
단순한 외신 기사나 정제된 보도자료로는 절대 읽어낼 수 없는 날 것 그대로의 온도감. 바로 그것이 안개에 싸인 ‘중국몽(中國夢)’의 실체를 가장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금석이라 믿었다.
행사가 시작되자 어디선가 약속이라도 한 듯 구름떼 같은 인파가 몰려와 부스 주변을 에워쌌다. 조금 전까지 정막이 흐르던 전시장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이 광경은, 지난 난창 출장에서 목격했던 그 기이하고도 익숙한 에너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어제 인사를 나눴던 현지 업체 몇몇도 군중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그들이 내미는 사업 조건을 슬쩍 떠보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대부분 “우리가 시뮬레이터 장비를 제공할 테니, 당신들은 콘텐츠를 무료로 입점시켜라. 수익 배분은 추후에 논의하자”는 식이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협업’의 포장을 두르고 있었지만, 실상은 양질의 콘텐츠를 공짜로 받아 가겠다는 노골적인 계산에 가까웠다. 더 이상 그런 달콤한 독배를 덥석 들이켤 만큼 순진하지 않았기에, 나는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틈이 날 때마다 친구에게 부스를 맡기고 주변 중국 기업들의 부스를 유심히 살피며 대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눈에 띄는 실력을 갖춘 콘텐츠 개발사들은 하나같이 오프라인이 아닌 스팀(Steam)이나 플레이스테이션 VR 같은 글로벌 온라인 플랫폼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의아한 마음에 “왜 오프라인 시장에는 관심이 없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얼음물처럼 차갑고 명확했다. “이미 한물간 시장인데, 굳이 힘을 뺄 이유가 없죠.”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워드에 초청될 만큼 내로라하는 현지 업체들조차 이런 냉소적인 시각을 공유하고 있다면, 이는 단순한 유행의 변화 그 이상을 의미했다. 중국 시장의 밑바닥 생태계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이 외면하는 길을, 정작 이방인인 우리가 ‘아묻따’식으로 밀고 들어가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소문만 무성했던 1년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중국 오프라인 VR 시장은 내가 꿈꾸던 ‘약속의 땅’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혔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우리는 미련 없이 부스를 정리하고 행사장을 빠져나왔다. 시상식은 이제 막 막을 올리는 분위기였고, 초대를 받은 참가사들은 화려한 만찬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애초에 트로피도, 화려한 연회도 아니었다.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상하이 여행자라면 한 번쯤 들른다는 ‘예원(豫园)’으로 향했다. 사전 정보 없이 무작정 나선 길이라 시내 중심가의 현대적인 거리 어딘가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마주한 풍경은 예상과 전혀 딴판이었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고풍스러운 기와지붕과 골목마다 늘어진 형형색색의 조명, 그리고 전통적인 정원과 빛바랜 상점들이 묘한 정취를 풍기고 있었다. 시장 조사를 위해 찾아다녔던 VR 테마파크는커녕, 전자기기 하나 구경하기 힘든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공간이었다.
처음엔 발길을 잘못 들였나 싶어 당황했다. 하지만 기왕 도착한 마당에 서둘러 돌아나갈 이유는 없었다. 마침 허기도 밀려오던 참이라, 이 고즈넉한 풍경 속에 몸을 맡기고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현지에서 이름난 식당인 ‘남상만두(南翔馒头)’에 들어가 대표 메뉴인 샤오롱바오와 일명 ‘빨대 만두’라 불리는 탕바오(汤包)를 주문했다. 새우와 돼지고기가 어우러진 샤오롱바오는 속이 꽉 찬 채 적당한 간을 머금고 있어 입안에서 기분 좋게 감돌았다. 반면 커다란 만두피에 빨대를 꽂아 육즙을 마시는 탕바오는 특유의 비릿한 향 탓에 내 취향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이 역시 이곳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경험이라 생각하며 끝까지 잔을 비우듯 만두를 비워냈다. 정신없이 몰아치던 일정 속에서 모처럼 만난 낯선 여유였고, 그래서일까 그날의 비릿하면서도 뜨거웠던 만두의 맛은 상하이의 어떤 화려한 장면보다 더 진한 잔상으로 남았다.
식사를 마친 뒤, 부추가 듬뿍 들어간 큼직한 전병 스타일의 길거리 간식을 하나 사 들고 와이탄(外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하이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만큼, 이 화려한 거리 근처라면 VR 테마파크 하나쯤은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걷는 동안 내 시선을 사로잡은 건 VR 체험존이 아니었다. 대신 기묘한 음악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춤을 추는 중년 여성들의 무리, 이른바 ‘광장무(广场舞)’ 행렬이었다. 중국의 저녁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 모습은 처음엔 당혹감을 안겨주었지만, 거리 곳곳에 포진한 수많은 춤 그룹을 마주하다 보니 어느새 그것이 그들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상임을 깨닫게 되었다.
한참을 더 걸어 마침내 와이탄의 중심에 닿았으나, 결국 끝까지 VR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내심 걸었던 기대가 컸던 터라 짙은 허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이곳은 어디까지나 뜨내기 관광객 중심의 지역일 뿐이다. VR 같은 신기술 체험 공간은 젊은 층의 에너지가 폭발하는 거리 어딘가에 더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그 가능성을 믿고 발길을 돌려보기로 했다.
그때, 유럽풍 근대 건축물 위로 황금빛 조명이 하나둘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강 건너편으로는 물안개를 뚫고 동방명주(东方明珠)의 웅장한 실루엣이 야경의 정점을 찍고 있었다. 비록 목표했던 ‘시장’은 찾지 못했지만, 압도적인 상하이의 밤 풍경은 허전했던 마음을 말없이 위로해 주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근처의 근사한 바(Bar)를 수소문했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가장 핫하다는 곳을 찾아갔더니, 입구는 이미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번호표를 받아 들고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조차, 왠지 모를 특별한 장소로 초대받은 것만 같아 가슴이 설렜다.
마침내 들어선 바의 테라스 너머로는 동방명주가 마치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들어왔다. 거대하게 펼쳐지는 도시의 야경을 병풍 삼아 시그니처 칵테일 한 잔을 들이키자, 무작정 시내를 헤매느라 묵직하게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르르 풀려나갔다.
그 순간, ‘가상현실(VR)’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펼쳐진 이 압도적인 풍경이야말로 현실이 선사하는 최고의 VR이 아닐까. 강변에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공간을 채우는 여유로운 음악, 그리고 특유의 칠(chill)한 분위기가 엉켜있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다듬어주었다. 복잡했던 시장 조사의 고뇌는 잠시 밀어둔 채, 나는 상하이의 이국적인 밤공기 속으로 느긋하게 스며들었다.
다음편, '중국 상해 : 어쩌면 우린 홀딱 속았수다 3' 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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