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 쑥스러운 첫경험과 합리적 의심 1

비스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 23

by chill십구년생guy


MOU
Memorandum of Understanding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정식 계약서를 쓰기에 앞서, 당사자 간의 협력 의지와 방향을 문서로 정리해두는 절차가 있다. 이를 흔히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라 하며, 우리말로는 ‘양해각서’ 혹은 ‘업무협약’이라 부른다. 협약의 주체는 일반 기업부터 공공기관, 나아가 국가와 국가 사이가 되기도 한다.


2018년 9월, 우리는 창업 이래 처음으로 해외 기업과 MOU를 체결했다. 일본의 개발사와 맺은 이 협약은, 이후 우리가 써 내려간 수십 개의 글로벌 협약 가운데 가장 먼저 꿴 ‘첫 번째 단추’였다.



181012_kocca_photo_1_3.jpg MOU는 단지 사인만이 아니라 세레모니를 할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다



비즈니스 판에서 MOU는 흔히 법적 구속력 없는 '형식적인 약속'으로 치부되곤 한다. 당시의 나 역시 MOU를 그리 대단치 않게 여겼다. 실질적인 매출로 이어지는 계약도 아닌데, 단지 잘해 보자는 식의 선언이 사업에 무슨 실질적인 동력이 될까 싶었다.


하지만 나의 오산이었다. 그저 통과의례라 여겼던 이 일본 기업과의 MOU는, 내가 미처 예상치 못한 측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서로를 단순한 '잠재적 파트너'에서 '속내를 공유하는 동료'로 격상시켜주는 마법 같은 장치였다.


MOU라는 공식적인 첫 단추를 꿴 덕분에, 우리는 비즈니스의 딱딱한 경계를 허물고 그 어느 때보다 허심탄회하게 시장의 실상을 공유하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 친밀한 대화 속에서 나는 우리가 그토록 믿어왔던 시장의 화려한 껍데기 뒤에 숨겨진 차가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설렘으로 시작했던 이 약속이, 우리 사업의 방향을 뿌리째 흔드는 거대한 통찰의 시작점이 될 줄은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시 도쿄로



도쿄 게임쇼의 시즌이 다시 돌아왔다. 작년 창업 멤버들과 함께했던 워크숍이 기대 이상의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졌기에, 올해도 주저 없이 전 직원이 함께하는 도쿄행을 추진하기로 했다.


팀의 구성이 달라졌다는 점도 이번 워크숍을 밀어붙인 중요한 이유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회사를 떠난 이들이 있었고, 그 빈자리는 새로운 열정을 가진 이들이 채웠다. 이번 여정의 핵심 목적은 이 ‘뉴페이스’들에게도 작년 멤버들이 느꼈던 것과 동일한 강력한 동기부여를 심어주는 것이었다. 2년 연속 같은 계절, 같은 행사, 같은 도시를 찾게 되니 자연스럽게 ‘전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고작 두 번째일 뿐이지만, 반복되는 의식에는 팀을 하나로 묶는 분명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한편, 팀원들의 워크숍 일정과는 별개로 경영진인 나와 친구는 또 다른 중요한 미션을 설계하고 있었다. 바로 일본의 VR 스타트업인 ‘뱅가드(VANGUARD)’와 만나 MOU 체결식을 진행하는 일이었다. 훗날 우리 비즈니스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이 만남의 시작은, 사실 지난달 뜨거운 열기 속에 참여했던 독일 쾰른에서의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 함 해보입시더



뱅가드(VANGUARD)는 독일 게임스컴 현장에서 재회한 일본 파트너사, ‘미디어 쿠보(Media Kubo)’의 담당자가 연결해준 팀이었다. “도쿄에서 실력 있는 VR 스타트업과 함께 왔다”며 우리를 소개해준 덕분에 자연스럽게 첫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국콘텐츠진흥원 관계자는 양사의 우호를 다지는 의미로 정식 MOU를 체결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해 왔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절차가 다소 번거롭고 거창하게만 느껴져 적당히 웃으며 넘겨버렸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 보니, 기관 주최 행사에서 맺어지는 MOU는 단순한 약속을 넘어 해당 기관의 유의미한 실적으로 기록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주변의 다른 대표들로부터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기관 돕는 셈 치고 그냥 한 번 해주지 그랬냐”는 가벼운 핀잔을 듣고 나서야, 무심했던 내 태도에 괜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다행히 게임스컴 이후에도 뱅가드 측과는 일본 시장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며 꾸준히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중 마침 전 직원 워크숍을 겸해 도쿄 게임쇼에 방문하게 되었고, 이 기회에 한국콘텐츠진흥원 공동관 부스에서 정식으로 MOU 체결식을 진행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먼저 제안을 건넸다. 그들은 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해주었고, 덕분에 이번 도쿄 일정은 팀의 결속을 다지는 ‘워크숍’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공식화하는 ‘MOU’라는 두 가지 핵심 목표를 동시에 품게 되었다.



게임쇼도 식후경



이번 숙소는 도쿄의 동쪽, 고즈넉한 정취가 살아있는 아사쿠사에 잡았다. 작년에는 일본이 낯선 멤버들을 배려해 코리아타운인 신오쿠보에 머물렀지만, 이번에는 전시장과의 접근성을 높이고 일본 특유의 로컬 분위기도 제대로 만끽해보자는 취지였다. 에어비앤비로 복층 구조의 오래된 가옥을 통째로 빌렸는데, 워크숍 기간 내내 여섯 명의 멤버가 그곳에서 옹기종기 모여 부대끼며 지내기로 했다.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스카이액세스를 타고 아사쿠사역에 내린 우리는, 체크인에 앞서 우선 든든하게 몸보신부터 하기로 했다. 마침 아사쿠사 인근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장어 전문점들이 즐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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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쿠사의 우나테츠는 ‘우나쥬’ 외에도 ‘히츠마부시’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장어를 주로 소금이나 양념 구이로 즐기지만, 일본은 달콤 짭짤한 타레 소스를 덧발라 구운 덮밥이 주를 이룬다. 조리법과 담아내는 용기에 따라 ‘히츠마부시(잘게 썰어 나무 밥통에 담아내는 방식)’, ‘우나쥬(장어를 통째로 구워 옻칠한 찬합에 담아내는 전통 방식)’, ‘우나동(일반적인 대접에 담아내는 방식)’ 등으로 나뉘는데, 기왕이면 로컬 특유의 감성(일명 ‘로컬뽕’)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어 다 같이 우나쥬를 주문했다.


모두가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황홀한 식사를 마쳤지만, 역시나 장어의 몸값은 만만치 않았다. 마지막에 계산서를 받아든 친구(대표)가 찰나의 순간 얼음이 된 채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뒤로하고, 나는 애써 웃으며 멤버들을 다독여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The Drink Must Go On



새벽부터 시작된 여정의 긴장이 풀리자, 숙소에 도착함과 동시에 묵직한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짐을 풀고 각자의 방식대로 짧은 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커튼 틈새로 스며드는 나른한 오후 햇살 아래, 말없이 누워 유튜브를 보거나 선잠을 청하며 조용한 휴식을 만끽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우리는 다시 몸을 일으켜 우에노로 향했다. 우에노 공원 한복판에 자리한 스타벅스 야외 테라스에 앉아 석양을 감상했는데, 그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붉게 물들어가는 노을빛 속에서 낯선 타국이 주는 긴장감은 서서히 녹아내렸고, 멤버들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여유가 번지기 시작했다.


카페인으로 기운을 북돋운 우리는 곧장 인근의 아메요코 상점가로 발길을 옮겼다. 본격적인 워크숍의 시작을 알리는 회식 자리였다. 첫 메뉴는 야키토리였다. 비좁은 골목마다 아기자기한 노포들이 빼곡히 들어선 탓에 여섯 명의 일행이 함께 앉을 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그 과정조차 마치 게임 속 작은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처럼 즐거웠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고 앉아 쉴 새 없이 구워져 나오는 꼬치 요리를 즐기다 보니, 술기운과 함께 분위기도 한껏 무르익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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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에서 폭우와 맥주로 범벅이 된 밤



1차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땐,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거센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 하나 없이 맞닥뜨린 갑작스러운 악천후에 잠시 당황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상황조차 낭만이라며 우리는 주저 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근처 가게를 찾아 들어가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며 2차, 3차 자리를 이어갔다. 젖은 옷가지에서 느껴지는 눅눅함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우리의 대화는 뜨거웠고, 취기가 깊어질수록 웃음소리도 커져만 갔다.


그렇게 도쿄에서의 첫날밤은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와 함께 새벽까지 이어졌다.




다음편, '일본 도쿄 : 쑥스러운 첫경험과 합리적 의심 2' 로 이어집니다
'비즈니스 여행자의 세계출장 견문록'은 브런치스토리에서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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