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만 안 신었으면 1시간은 더 머무르고 싶었다...
교토에서 3일째 보내는 날에는 오전 10시 즈음에 눈이 떠졌다. 이상하게 평소에는 아무리 늦게 자도 피곤하기 일쑤였는데 여행을 다닐 때는 전날에 아무리 늦게 자고 다음 날 일찍 일어나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원래는 그랬는데, 아무래도 오늘 귀국해서 집에 들어가면 내 여권이 무사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눈이 더 잘 떠졌던 것 같다. 비록 어제 통화에서 엄마가 화를 내지 않았다고는 했지만, 화면 너머로 보는 것과 실제로 얼굴을 맞대는 건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은가. 집에 돌아가서 혼나기 전에 오늘을 더 즐겨야 해! 라는 결심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렇게 오늘을 알차게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열심히 씻는데, 사실 아침에 어딜 가야 할지는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후에 어제 슬쩍 눈길만 줬던 이시베 코지를 방문하기로 계획을 짜뒀지만, 교토 여행 둘째 날에 오늘 오전에 가야 할 곳을 가버려서 오전 일정이 비어 있었다.
지난밤에 오늘 아침에 먹으려 사둔 우유 푸딩을 먹으며 주변을 검색했는데, 숙소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니조 성이라는 유명 관광지가 있었다. 15세기에 지어진 쇼군의 화려한 성이라는데 사진 너머로 본 광경이 굉장히 금빛으로 삐까번쩍해서 다녀올 만한 듯 보였다.
마지막 날이니만큼 깔끔하면서도 예쁜 옷을 입고 싶어서 어제 단화를 신고 뒤꿈치가 까진 걸 그새 까먹고 오늘은 5cm 구두를 냉큼 신었다! 이 구두를 신은 죗값은 3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대로 돌려받게 된다. 니조 성을 돌아다닐 때는 괜찮았으니 구두를 신은 발에 대해서는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체크 아웃을 하고 캐리어를 맡긴 뒤 좀 더 가벼운 짐을 갖고 니조 성으로 향했다. 과연 유명한 관광지가 맞긴 한 건지 막 도착했을 때 단체 이용권을 끊는 팀이 3팀 정도 있었다. 10명 이상으로 구성된 팀들이었으니 이곳이 정말 크고 구경거리가 많은 곳인 듯했다.
그래서 실제로 니조 성이 볼거리가 많냐고 묻는다면, 22년부터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니조 성에서 메인이벤트라고 할 수 있는 장소는 혼마루어전인데 이곳이 21년까지 공사 중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니조 성을 방문했던 19년도에도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올해 코로나가 진정돼서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다면 공사 중인 장소가 적어지겠지만 그래도 완공되고 다녀오는 게 더 많은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공사 중인 장소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고궁을 돌아다니는 경험은 새롭고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경복궁 관광과 비슷한 느낌이다. 과학 기술이 발달한 21세기 한가운데에서 옛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은 몇 없지 않던가. 니조 성을 걷는 것도 그런 기분이었다.
경복궁을 자주 가 본 사람으로서 가장 피부로 와닿는 경복궁과 니조 성의 차이점이라면 바닥이다. 경복궁은 고른 모래로 바닥이 이뤄져 있다면 니조 성은 작은 자갈이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 점이 왜 가장 와닿냐, 내가 구두를 신어서 그렇다. 구두 굽이 자갈 사이사이로 푹푹 빠지는데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정말 사진을 위해서 발을 이 정도로 포기한 적이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이때 역시 아직 버틸만했기 때문에 이것 역시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곳곳이 공사 중이었기 때문에 그 원래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웠지만 그런 건 음성 안내를 대여해서 들으면 이곳이 원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해 볼 수 있어 좋았다. 음성 안내 대여는 유료지만 여느 박물관이 제공하는 퀄리티처럼 매우 만족스러우니 한국어 버전을 대여해서 듣는 걸 추천한다.
또한 벚꽃을 보러 가는 이번 여행 테마에도 딱 맞아떨어졌다. 성의 이곳저곳을 봐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분홍색과 자색 계열의 꽃이 대부분이어서 다양하지만 비슷한 색채로 성이 꽉 채워져 있었다. 간혹 가다가 하얀 벚꽃도 볼 수 있었는데, 꽃이 잔뜩 달린 가지가 아래로 뻗어 있어 마치 꽃 장막 같았다. 여기저기 자그마한 꽃부터 옹기종기 모여있는 꽃 덤불도 꽤 있어서 사진 찍기에도 좋았다.
계획에 없던 방문지였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날까지 원 없이 벚꽃을 구경할 수 있던 니조 성이었다.